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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통 영화로 치유하기 [1]

상처받은 영혼에게 스크린의 빛을 투사하노라

케빈 스페이시 주연의 <케이-펙스>(9월19일 개봉)가 똑같이 정신병동을 배경으로 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와 가장 다른 점은 환자들의 상태일 것이다. 자신이 ‘케이 펙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케빈 스페이시를 비롯해 맨해튼 정신병원의 환자들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아주 흐릿하게 만들 정도로 ‘안전’하다. 그들은 누구나 조금씩은 안고 있을 정신적 외상들, 예컨대 가족의 붕괴, 애정결핍, 강박증, 소심증 등을 조금 과하게 앓고 있을 뿐이다. 이 기획은 여기서 출발했다. 누구나 앓고 있을 마음의 고통을 손쉽게 보고 즐길 수 있는 영화로 치유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 길로 가는 실마리를 조금만이라도 보여줄 수 있다면, 하는 소망. 영화평론가이자 임상심리학자인 심영섭씨가 그 수고로움을 맡아주었다. 자신의 실제 경험과 각종 상담 사례로 ‘영화치료’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동시에 무작위로 선택한 감독, 프로듀서, 배우, 시나리오 작가 등 4명의 영화인들과 집단상담을 벌였다. 확실히 영화는 오락물이면서 그 이상이기도 하다. - 편집자편집 심은하

영화는 영화에 놓는 주사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 세상을 경험하면서 마음을 열다

자글자글 끓던 열점에 시원한 한줄기 물을 쏟아붓듯

2001년 1월30일, 나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그는 다정했고, 성실했으며, 내가 만났던 많은 남자들과 달리 나에게 현실의 격랑에서 닻을 내릴 수 있게 만드는 지브롤터의 바위 같은 든든함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우리에겐 서로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우리는 만난 지 3개월 만에 동거를 시작했고 그뒤로부터 4개월 만에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과 달리 아이를 갖는 문제만큼은 확신도 희망의 여신도 방문하지 않았다.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우리는 이미 이전의 결혼으로 인해 아이들이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고 싶었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은 뭔가 짐승스러운 데가 있어야 하는 일이다. 그건 머리로는 안 되는 일이고, 레지던트 2년차 때 갓 낳은 아들이 일개월이었던 나는 간호사 보고시간(nursing report time)에 가축처럼 졸았던 기억, 저항할 수 없이 뼛속까지 칼침처럼 스며들던 그 피곤의 느낌이 아직도 고스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고백하자면 무엇보다도 이제는 학위 논문을 쓰고 싶었다. 못다 쓴 학위 논문은 입속의 혓바늘로 늘 깔깔하게 내 안에 있어왔다. 동료들이 하나둘 떠나 연구실에 빈 책상이 늘어날 때마다, 내 학번 근처에 태어난 아이들이 다시 신입생이 되어 강의실을 채울 때마다, 웬 지적 속물주의의 바보 같은 집착이냐고 다그쳐봐야 포기되지 않는, 너무 오래되어 화석처럼 굳어진 열망이 거기에는 있었다.

<캐스트 어웨이>

아마 그때 본 영화가 톰 행크스의 <캐스트 어웨이>였을 것이다. 애인과의 크리스마스 약속을 뒤로 하고 몸을 담고 있는 페덱스 회사의 물품 배달을 위해 비행기에 올라탔던 사내는 그만 4년을 무인도에 갇혀 지낸다. 그리고는 마침내 그 무인도에서 탈출한 날,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찾으려 하지만, 여자는 이미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여자의 집까지 찾아가 남자는 눈물인 것 같은 빗물을 수건으로 닦아내며, 여자에게 물어본다. 딸 이름이 뭐냐고. 그리고 교수 꿈은 어떻게 되었고 왜 닥터 켈리 래빗이 아직도 아니냐고. 여자는 비행기가 추락했을 때 모든 게 멈춰버렸다고 짧게 대답한다. 논문을 다시 시작할까 한다는 말을 삼키며. 그러자 남자는 뚫어지게 여자를 쳐다보며, 회한과 그 한숨조차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아는 담담함으로 “그 비행기를 타는 것이 아니었다”고 고백한다. 차에서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고. 그리고 아이를 더 가질 거냐고 물어보며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더 가지도록 해봐. 진심이야 더 낳아. 나라면 더 갖겠어.” 그 순간, 비평적으로 보자면 로빈슨 크루소의 창백한 모사품이거나 톰 행크스의 원맨쇼 같은 <캐스트 어웨이>의 그 장면이 내 심장 속으로 걸어들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우주적인 한순간을 손에 잡은 듯한 느낌, 마음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자글자글 끓던 열점에 시원한 한줄기 물을 쏟아붓는 빛의 분수를 맞은 느낌과도 같았다. 톰 행크스가 더 가지라고 했던 그 소유는 단순히 아이를 넘어 인생의 더 중요한 것들을 가지라는 어떤 계시 같기도 했다. 물론 오즈 야스히로나 브레송의 영화에도 그런 느낌이 있었지만, <캐스트 어웨이>의 그 장면은 아주 쉽고 평이하고 구체적인 방식으로, 인생의 의미란 양화될 수 없음을, 아마도 지.금.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인생을 저어가면서 난, 이미 후회할 만한 선택을 여러 번 하였다. 그로부터 10개월 뒤, 2002년 7월에, 나는 딸을 낳았다.

마음을 맑게, 행동할 힘을, 오래된 의문에 해답을

매우 개인적이지만 생생한 ‘캐스트 어웨이 사건’이 보여주듯, 때론 영화는 치유적인 수단이 된다. 일찍이 카타르시스라는 개념을 정립하면서 모든 예술은 치료의 형태를 띤다는 것을 주장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릴 것도 없이 어떤 영화는 마음을 맑게 하고, 행동할 힘을 주며, 오래된 의문에 해답을 주곤 한다. 오히려 영화가 책처럼 정화의 힘이 있으면서도 행동적, 인지적인 영역 모두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강력한 매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90년대에 와서야 비로소 영화치료가 정신보건 종사자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는 사실은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1995년에 <영화 처방전>(motion picture prescription)이란 책을 쓴 영화치료의 선구자 게리 솔로몬은 우리는 이미 우리의 삶에서 영화를 스스로를 돕기 위해(self-helf) 활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영화치료는 이미 일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자가요법(self-therapy)이라고 갈파한 적이 있다(그런 의미에서라면 대한민국 주부의 절반 이상이 매일 밤마다 스스로 연속극 치료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지난밤 비디오 가게에 가서 빌린 비디오 한편에 손수건을 적신 것 외에 달리 누군가를 어딘가를 찾아갈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일단 영화치료에 전문가적 개입이 필요한 시점은 진정으로 영화치료의 효과를 낼 수 있는 영화를 ‘선택’하는 문제부터 시작된다. 캔사스 주립대학에서 가족치료를 담당하는 샤논 더머와 제니퍼 허칭스는 영화치료를 위한 영화를 선택하는 일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이라고 정의하였다. 영화치료의 가장 중요한 원리 중 하나는 영화 안의 인물들과 동일시할 정도로 심리적으로 가까워야 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객관적으로 보아 자신의 문제를 파악할 수 있게 할 정도로 멀어야 한다는 것이다. ‘안전한 거리’라는 이 개념은 영화치료의 영화 선택이 사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녹록지 않은 것임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샌드라 불럭이 알코올중독자로 분하여 28일간의 알코올중독 치료를 받은 뒤 다시 성공적으로 사회에 복귀하는 영화 이 알코올 문제를 가진 이들에게 도움을 줄 것인가? 그렇다면 <꿈의 구장>은 중년의 위기에 빠진 남성에게 희망의 빛을 던져줄 수 있을까? 물론 영화치료는 서로 다른 태도와 행동을 선택하고 문제 해결책을 관찰학습하는 데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하비 그린버그나 스티븐 슐렌버그 같은 심리학자와 정신과 의사들은 영화치료의 진정한 힘은 지적인 수준보다는 정서적 수준에 영향을 끼치고, 억압이나 다른 심리적 방어기제를 낮추는 데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 마음의 고통 영화로 치유하기 [1]

▶ 마음의 고통 영화로 치유하기 [2]

▶ 마음의 고통 영화로 치유하기 [3]

▶ 마음의 고통 영화로 치유하기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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