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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음악이 스크린으로 간 까닭은 [1]

현대음악이 스크린으로 간 까닭은

<새>부터 <디 아워스>까지, 음향으로서의 음악의 정체성

현대음악의 대표적 장르인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가 필립 글라스가 그의 앙상블을 이끌고 처음으로 내한해 공연을 갖는다. ‘필립 온 필름’이란 이름으로 10월14∼15일 LG아트센터(02-2005-0114)에서 열리는 이 공연은 컬트 다큐멘터리로 꼽히는 고드프리 레지오의 3부작 중 <균형 잃은 삶>과 <변형 속의 삶>이 상영되는 무대 위에서 열린다. 필립 글라스와 고드프리 레지오의 ‘합작품’은 현대사회의 삭막함과 기술에 점령당한 참상을 ‘눈으로 듣는 음악, 귀로 보는 이미지’로 드러내는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 이 3부작은 글라스가 레지오의 영상에 맞추어 곡을 작곡하고 레지오가 음악에 맞추어 영상들을 다시 쪼개넣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필립 글라스는 이후에도 <디 아워스> <쿤둔> <트루먼 쇼> 등의 영화음악을 통해 영상과 음악의 또 다른 앙상블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필립 글라스의 첫 내한을 맞아 현대음악과 영화의 예사롭지 않은 관계를 짚어본다. - 편집자

전위음악에 대한 어떤 오해

오늘날 슈톡하우젠의 <접촉>을 집에서 감상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식의 전위적 전자음악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나는 그거 모르겠소’ 하고 외면하거나 경원한다. 심지어 음악하는 사람들조차 그런 유의 음악에 대해서는 쓸데없이 잘난 척하는 사이코 음악이나 일종의 불필요한 장난쯤으로 취급하기 일쑤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조차, 예를 들어 아주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영화인 <스크림>이 케이블TV 영화채널에서 방영될 때 이 영화에서 나오는 전위적인 음악에 대해서는 그다지 거부감을 보이지 않는다. <스크림>뿐 아니라 수많은 호러물, 사이-파이(SF)필름에서 우리는 첨단 전자음악이나 전위음악에서 영향을 받은 불협화음을 듣는 데 익숙해져 있다. 사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TV의 CF에서도 전위적인 사운드의 음악은 간간이 흘러나온다. 아무런 거리낌없이 그 음악들은 매일매일 안방에서 감상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사람들이 전위음악을 대할 때의 모순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앉혀놓고 들으라면 전위음악을 절대 못 듣는 사람들에게도 전위음악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친근한 음악이기도 하다. 이것은 선입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음악이란 철저하게 ‘뻔한 어떤 것’이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게 된 배경에는 현대 대중매체 시스템의 광범위한 문화적 획일화가 놓여 있다. 대중매체는 장르화된 상업적 ‘팝음악’을 너무나 철저하게 교육시킨 나머지 그 이외의 것들에 대해 무관심하고 심지어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도록 대중을 길들여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대중매체는 은연중에 전위음악의 힘을 이용한다. 앞서 말한 상업적인 호러물에서도 그렇듯, 전위음악은 특별한 상황 속에서 장면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 소음성 불협화음들은 대중의 주의력을 매체에 속박시키는 하나의 심리적 도구 역할을 하고 있다.

사실 이런 식으로 전위음악이 이용당하는 것이 바람직한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어차피 ‘전위음악은 나와 절대 상관없는 쓸데없는 음악’이라는 구호가 대중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역설적으로 영화음악과 같은 장르음악이 전위음악의 한 탈출구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부인할 수는 없다. 오늘날 무용과 같은 공연음악이나 영화음악은 현대적 전위음악이 노는 가장 중요한 터전이 되고 있다. 시각적 기호들은 음악에 상황을 부여한다. 또한 시각적 기호들이 주는 그럴듯함, 안정감이 음악을 듣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심리적 확실성을 부여한다. 그래서 영화는 약간은 아이로니컬한 방식으로 전위음악의 이해 가능성을 넓힐 수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와 전위음악의 관계가 이처럼 소극적이고 우회적인 상호협력 관계에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현대음악이 새롭게 정립한 음악에 대한 개념은 영화가 음악을 취급하는 방식과 근본적으로 비슷하다. 독일의 전위음악 작곡가인 슈톡하우젠은 음열주의의 태두 쇤베르크의 제자인 베베른의 음악에 주목하면서 “음악을 음향으로 이해하는 사고는 음악사의 발전결과”라고 말한다. 현대음악은 전통적인 서양 기보법을 무력화했는데, 그 이유는 더이상 악보에 표기된 음악적 소리를 일상의 소리와 구분하는 것이 무의미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도레미파솔라시도’에 익숙해 있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음향적 접근법은 현대음악을 멀게 느껴지도록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어쨌든 슈톡하우젠이 언급한 ‘음악을 음향으로 이해하는 사고’는 서양의 현대 전위음악을 이해하는 키포인트라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영화는 사운드트랙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자기도 모르게 '음악의 음향적 속성'을 영화 속에서 발전시켜왔다. 사운드 트랙을 이루는 대사, 효과음, 그리고 음악은 근본적으로 평등한 요소들이다. 사람에 따라서 음악에, 또는 효과음에, 아니면 대사에 좀더 큰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그 평등성을 보여준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주인공의 테마음악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영화는 사운드트랙이 탄생하기 이전부터 자기도 모르게 이러한 원칙을 영화 속에서 발전시켜왔다. ‘사운드트랙’이라는 말이 알려주는 대로 음악은 전체 사운드의 일부이다. 사운드트랙을 이루는 대사, 효과음, 그리고 음악은 근본적으로 평등한 요소들이다. 사람에 따라서 음악에, 또는 효과음에, 아니면 대사에 좀더 큰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벌써 그 평등성을 보여준다. 영화는 근본적으로 문이 쾅 닫히는 소리와 주인공의 테마음악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때로 문소리를 더 들리게 하기 위해 음악을 삭제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쇤베르크가 이미 1930년대에 <영상을 위한 배경음악>을 만든 것도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는 이 음악들을 통해 영화에서 발견되는 심리적, 공간적 상황들 속에서 음악적 ‘음향’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주목하고자 한다. 쇤베르크의 이러한 관심은 1970년대의 브라이언 이노가 발전시킨 ‘앰비언트’라는 발상을 한참 앞서 보여준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구체음악’(concrete music)이라는 장르는 이미 1940년대 후반에 일상의 다양한 소리들을 샘플링하여 음악적 사운드의 재료로 삼는 ‘테이프 루핑’ 음악을 시도하고 있었는데, 음악사의 혁명적 변화에 한 단초를 마련한 이와 같은 시도는 정작 영화 사운드트랙에서는 토키가 발명되기 시작한 직후부터 시도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필립 글라스의 <변형 속의 삶>

전위음반 7選 #1

<접촉>(Kontakte) | 칼하인츠 슈톡하우젠

전자음악의 포문을 연 엄청난 앨범. 사운드의 측면에서만 봐도 이 이상 선언적인 미증유의 전위 음악이 다시 없을 정도. 듣기 힘들지만 가만히 듣다 보면 빨려드는 느낌이 나는, 특유의 지속과 단절을 보여주는 구조로 되어 있다.

<라이히 리믹스>(Reich Remixed) | 스티브 라이히

스티브 라이히의 주요 작품들을 최근에 이름을 날리는 일렉트로니카 뮤지션들이 리믹스했다. 라이히의 원곡들을 먼저 들어본 후 이 앨범을 듣는 것이 순서겠지만 꼭 그럴 필요도 없다고 봄. 라이히의 작품들을 몽타쥬한 이 리믹스 앨범 자체가 영화적이다.

<이레이저헤드 O.S.T>(Eraserhead) | 스티브 라이히

미증유의 사운드 트랙을 지니고 있는 <이레이저헤드>의 사운드트랙 앨범. 환각적인 앰비언트 사운드의 컬트를 낳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새로운 느낌이 도출된다. 영화 속에서 들을 때와 따로 들을 때가 또 다르다.

<앤쏠로지 오브 노이즈&일렉트로닉 뮤직, Vol. 2>(Anthology of Noise & Electronic Music) | 스티브 라이히

전위적인 전자 사운드와 소음을 다룬 모음집. 다양한 전위 사운드의 향연을 맛볼 수 있는 앨범인데, 특히 <이레이저헤드>의 사운드 디자인을 데이비드 린치와 함께 해낸 전설적인 사운드 디자이너 앨런 스플렛(Alan Splet)의 스페이스 노이즈 메이킹도 들을만 하다.

▶ 현대음악이 스크린으로 간 까닭은 [1]

▶ 현대음악이 스크린으로 간 까닭은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