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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시아>와 박기형 감독 [1]

어떤 일그러진 ‘스위트홈’의 기억

현대가족의 이면을 그린 또 하나의 공포영화 <아카시아> 그리고 감독 박기형

가족은 괴물이다. <장화, 홍련>이나 처럼 박기형 감독의 신작 <아카시아>도 가족의 폐부에 기생하는 비극을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그려낸다. 화사한 꽃무늬로 단장한 집이 기괴한 사이코드라마의 무대가 됐듯, 단란한 가족을 위해 마련한 4인용 식탁에 죽은 아이들의 냉기가 자리하듯, 앙상했던 아카시아 나무가 꽃을 피울 때 그 속에선 죽음의 향기가 배어난다. 2003년의 가족호러 3부작라 불러도 좋을 세편 가운데 <아카시아>는 못지않게 불온한 영화다. “내 쉴 곳은 오직 집, 내 집뿐”이라고 노래하던 시절은 지나가고, 가족의 초상은 뒤틀리고 일그러진다. <아카시아>는 가족이 괴물이 된 이유를 따지고 들어가는 영화다. <여고괴담>에서 우리의 학창 시절이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들추어냈던 박기형은 이 영화에서 가족의 포근함 속에 깃든 잔인함에 주목한다. 가족의 사랑이 집착과 강박으로 변할 때, 진실은 외면하고픈 추악한 실체를 하나둘 드러낸다.

핏줄에 대한 강박, 악몽이 된 출산

<아카시아>는 지극히 평온해 보이는 한 상류층 가정이 아이를 입양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이야기다. 홈드라마로 시작해 호러물의 관습을 거쳐 비극의 여운으로 마무리짓는 이 영화에는 공포감을 조성하는 세 가지 이미지가 있다. 첫 번째는 뭉크의 <절규>를 닮은 그림이고 두 번째는 집안을 장식한 붉은 실이고 세 번째는 출산하는 장면이다. 먼저 뭉크를 닮은 그림은 아이가 그린 것이다. 죽은 엄마가 나무가 됐다고 믿는 아이는 나무를 그리고 그 옆에 사람을 그린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아이가 그린 그림에서 사람의 얼굴에는 눈, 코, 입이 따로 없다. 이목구비가 없는 얼굴, 아이가 마음먹기에 따라 그것은 엄마가 되기도 아빠가 되기도 한다. 아마 죽은 부모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에게 이목구비가 없는 얼굴은 당연한 것이리라. 아이는 상상으로 부모의 얼굴을 만드는 대신 사람의 형체를 그린다. 문제는 그 그림이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매우 불길하게 보이기도 한다는 점이다. 표정없는 얼굴이 주는 기괴한 느낌은 눈, 코, 입이 제 위치에 있는 그림에만 익숙한 어른들을 긴장시킨다. 여기엔 어떤 트릭이 있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림의 의미가 달라지듯 아이의 특이한 행동도 관점에 따라 무섭게도 측은하게도 보인다. <아카시아>에 내재한 긴장감은 이렇게 일방적인 해석을 교란하는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림 속의 사람들처럼 <아카시아>의 인물들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을 유지한다. 온화한 얼굴 뒤에 무언가 감춰진 듯한 느낌이 평온한 홈드라마를 예민하고 섬세한 공포물로 만들어간다.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이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대표적인 초현실적 이미지는 붉은 실이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장면이다. 아이를 질식시킬 것 같은 붉은 실의 공포는 핏줄에 대한 집착을 시각화한다. 그리고 <아카시아>에서 가족은 자기 핏줄에 대한 강박증을 표현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한다. 입양한 아이가 있는 상황에서 여자는 임신을 하고 입양된 아이는 그 순간부터 마음의 짐이 돼버린다. 말하지 않지만 가족은 이 아이가 없었으면 하고 바란다. 아이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가족의 욕망이 뒤틀려가는 것이다. 차츰 기형성을 드러내는 홈드라마는 아이를 사산하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산부인과 의사인 남편의 꿈에 등장하는 얼굴없는 산모와 아이, 흔히 숭고하고 아름답게만 묘사되는 출산이 <아카시아>에선 악몽이 된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 가족을 만든다는 것이 두렵고 겁나는 일이라는 사실을 <아카시아>의 출산장면은 한눈에 보여준다. 가족은 이상적 가족이 되고 싶다는 그 욕망 때문에 파멸의 길로 들어선다.

심장을 가진 원혼

다소 살벌하고 끔찍한 이야기지만 <아카시아>가 차갑기만 한 영화는 아니다. <여고괴담>이 그랬듯 박기형은 원혼에게도 심장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아이가 죽은 엄마의 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메마른 아카시아 나무는 <여고괴담>의 진주가 9년간 학교를 배회하며 소망했던 친구 지오처럼 아이가 유일하게 소통하는 대상이다. 아이는 나무에 올라 나무에 잎이 피기를 소망하고 나무와 대화한다. 하지만 그런 아이의 모습이 어른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지오를 괴롭히는 선생님을 향했던 진주의 분노처럼 아이는 나무에 손을 대려는 어른들에게 저항한다. 박기형의 영화에서 비극은 진심이 오가는 관계를 깨뜨릴 때 벌어진다. <비밀>은 그런 점에서 박기형 영화의 핵심을 투명하게 보여준다. 텔레파시로 대화를 나누는 구호와 미조, 그들의 만남이 방해받을 때 사건은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번져나간다. 박기형은 이런 소통의 단절이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어떤 것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고괴담>에선 입시경쟁을 최고 가치로 여기는 비인간적 교육시스템이 문제였고 <비밀>에선 원조교제로 대변되는 도덕의 붕괴와 사회적 편견이 걸림돌이었다. <아카시아>가 공격하는 대상 역시 기성세대의 죄악이다. 그들은 핏줄로 남과 나를 가르고 세상의 더러움을 욕하면서 자기 몸에 묻은 오물은 보지 못한다. 입양은 결국 그들의 위선을 폭로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 박기형 영화에서 언제나 극단에 내몰리고 자살을 결심하며 집을 뛰쳐나오는 아이들이 등장하는 건 우연이 아니다. 그는 아이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지는 시스템을 고발하는 한편 그 속에서 비극의 정서도 이끌어낸다. 영화는 기성세대의 잘못으로 질식당한 아이들의 억울함 때문에 슬퍼진다. 박기형에게 호러는 무서움과 슬픔이 공존하는 장르인 것이다.

<아카시아>, 2003년 호러의 피날레

이처럼 박기형이 호러 혹은 스릴러라는 틀을 통해 보여주는 것은 장르의 유희가 아니다. “영화광이었던 적도 없고 특정 장르에 열광한 적도 없는” 그가 주목한 것은 장르의 기교가 아니라 장르의 가능성이었다. “처음 영화를 시작한 곳이 김동빈, 홍기선 감독 등이 작업하던 파랑새영화사였다. 장산곶매가 <파업전야>를 만들 때 그 옆에의 작은 사무실에 있던 영화사였다. 영화운동의 열기가 사그라들 무렵, 영화운동의 중심부가 아닌 변두리에 끼어들어 영화를 배웠는데 그게 지금의 내 영화가 갖는 정체성이자 한계인 것 같다”는 말은 박기형이 장르를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대한 단서를 제공한다. 90년대 후반 등장한 다양한 젊은 감독들 가운데 박기형은 장르와 비판의식의 접점을 제대로 잡아내며 돋보이는 데뷔전을 치렀다. <여고괴담>은 흥행성공 이전에 장르영화의 돌파구로서 의미가 컸던 작품이다. <여고괴담>의 성공에 비해 참담한 흥행결과를 낳았지만 <비밀>에서도 박기형은 자신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멜로드라마의 감정을 구축하는 데 실패한 탓에 외면받았지만 <비밀>의 표현방식에는 비범한 면이 있다. 그는 손쉬운 관습적 표현에 투항하지 않고 장르의 한계를 돌파하려 했다. 초능력 소녀가 나오는 미스터리멜로물이라는 장르적 성격부터가 익히 보던 것이 아니었다.

<아카시아>는 박기형의 스타일이 다시 진일보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장르의 틀에서 새로움을 모색하는 작가적 집요함의 결과물로서 그는 과장과 왜곡을 최소화하면서 시종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도발적인 공포영화를 만들었다. <아카시아>는 감독 박기형에 대한 믿음을 확인시키는 영화라는 점에서 2003년 호러영화의 피날레로 손색이 없다.남동철 namdong@hani.co.kr

▶ <아카시아>와 박기형 감독 [1]

▶ <아카시아>와 박기형 감독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