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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힘을 다시 묻는다 - 한국영화의 미래를 찾아서 [5]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 한국의 문화적 투쟁을 지지하다

미국 보스턴의 웬트워스 공과대 인문사회과학부 교수이며 <뉴 폴리티컬 사이언스>의 편집장이기도 한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신좌파의 상상력>에서 68혁명이 일종의 문화혁명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사회과학자인 그에게 굳이 서면으로나마 인터뷰를 청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으나, 그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마르쿠제와 연구하며 그의 영향을 받아 ‘에로스 이론’을 자신의 분석틀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아마도 그는 영화인과 인문학자보다 한 발짝 멀찍이 떨어져 우리에게 좀더 객관적이고 유용한 정보를 줄 수 있을지 모른다.

-68혁명이 벌어지던 그때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나? 11년 동안 캘리포니아주의 오션비치에 있는 급진적인 반문화 공동체에서 활동했다고 하던데.

=그렇다. 오션비치는 1970년대의 청년문화가 꽃피웠던 반문화의 안식처이자 대안적 생활방식, 상업적 문화와 체계에 맞서는 정치 활동의 중심지였다. 한번은 닉슨이 공화당 전당대회를 그곳에서 열겠다고 발표했다. 재선을 위한 수순이었다. 우리는 곧장 시위 계획을 세웠고 존 레넌, 밥 딜런, 그레이트풀 데드 같은 유명인사들이 참여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FBI가 백색테러 단체를 조직해 우리의 코뮌을 공격했다. 집에 총알을 퍼부어 여성 한명이 부상당했고 내 차는 불길에 휩싸이기도 했다.

우리가 오션비치에서 행했던 투쟁은 두 가지다. 현존 권력에 맞서는 것과 우리의 제도를 구축하는 것. 이 투쟁은 상호보완적이었다. 우리는 그곳의 경찰 본부장을 쫓아내고, 정치범들의 네트워크를 지원했으며, 인근 대학에 상주해 있던 CIA에 맞서 사람들을 조직하기도 했다. 우리는 이 모든 걸 충분히 즐기기도 했다. 그런 코뮌적 생활방식이 체제와 싸우는 데 막강한 힘이 되어줬다.

-68혁명의 구호였던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이 구호가 “미래 세대의 삶과 제도에 새겨질 것”이라고 했는데, 이 구호가 현재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는가?

=사실 미국에서는 이 구호가 1968년 5월 파리에서 울려퍼지기 이전부터, 블랙팬더 당원들이 이 구호를 내걸고 있었다. 팬더 당원들은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고, 베트남을 파괴하고, 닉슨 같은 범죄자 대통령을 양산해온 미국의 ‘민주주의’와는 정반대인 직접적이고 참여적인 민주주의를 뜻하기 위해서 이 구호를 썼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권력을 상상력에게로”라는 구호는 더 많은 민주주의와 더 많은 자유를 뜻한다. 오늘날 전세계에서는 대기업들이 주도하는 세계화, WTO, IMF, 세계은행 그리고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맞서 각지의 사회운동들이 결집하고 있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국내적, 국제적 문제에 대해서 대중적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고 확신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68 정신은 ...ing

-“더 많이 혁명할수록 더 많이 사랑을 즐긴다”는 68혁명의 또 다른 구호는 <신좌파의 상상력>의 핵심어인 ‘에로스 효과’를 떠오르게 한다. 당신은 “해방을 향한 본능적 욕구에의 자각이 당대의 사회적 현실을 뛰어넘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나아가는 현상”이 에로스 효과라고 했다. 그렇다면 특정 시기에, 특정 상황에서 인간의 의지로 이 효과를 일으키거나 가속화하는 것도 가능한가?

=지금으로서는 에로스 효과가 총파업이나 봉기를 통해서 현실화될 수는 없다. 총파업이나 봉기는 조직된 단체들의 계획에 의해서 이뤄질 수 있는 것들이다. 1980년 광주에서 발생했던 것 같은 에로스적 단결과 숭고한 연대감이 언제 또다시 발생할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그렇지만 광주의 코뮌은 일반 대중의 지혜, 특정 시기에 사람들을 지배해왔던 그 어떤 엘리트들보다 이 사회를 훨씬 더 이성적이고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대중의 능력을 보여주는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68혁명 이후 “우리가 세상을 바꾸려 했으나 세상이 우리를 바꿨다”라는 말이 나왔다. 일상의 혁명을 화두로 떠올렸던 이 운동은 일상을 어떻게 바꿨나? 후퇴였나, 점진적 진보였나?

=만약 신좌파가 실패했다고 말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신좌파가 많은 사람들이 꿈꿨던 것 그 이상을 성취했기 때문일 것이다. 1968년 이래로 수천만명에 달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일상생활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흑인차별 정책이 산산조각났으니까. 여성들, 청년들, 학생들, 동성애자들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게다가 ‘베트남 신드롬’ 탓에 미국은 수년간 군사적 개입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1970년대 당시 미국에서 문화와 정치의 종합을 통한 정치적 히피들, 즉 프릭스가 등장했다고 말했다. 현재에도 이런 세력들이 유효할 수 있는가?

=프릭스는 정치활동을 했던 히피들을 말한다. 문화와 정치가 결합되자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 놓이게 됐다. 한편에선 철두철미했던 정치 활동가들이 코뮌을 이뤄 함께 살고 있는 우리에게 위계질서를 거부한다며 비웃었다. 다른 한편에선 히피들이 우리가 권력의 세계에 매혹됐다고 여겼다. 그들은 “원하기만 하면 전쟁은 끝난다”라는 식으로 생각했으니까. 현재까지도 미국에는 주변화된 집단들이 계속 존재하고, 그들 중 몇몇은 활동적이기도 하지만, 히피에 ‘필적’할 만큼은 아니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흡수력에 있다. 흡수력이 강제력보다 훨씬 더 엄청난 힘이다. 만년필 제작사로도 유명한 파커브러더스사는 1973년에 이런 광고를 만들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모델로 나와 “계속 쓰십시오”(Write On)이라고 말하는 광고였다. 이 광고는 블랙팬더당의 구호인 “그대로 계속해”(Right On)를 패러디한 것이다. 할리우드는 샘 그린리의 소설 <문 옆에 앉아 있는 비밀탐정>(1969)을 영화로 만들기까지 했다. 이 소설은 암살됐던 블랙팬더당의 지도자 조지 잭슨을 연상시키는 어느 흑인이 CIA에 들어간 뒤, 그곳에서 배운 지식을 활용해 대도시 중심부의 흑인 갱들을 모아 혁명을 일으키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시기는 공산주의자들이 마틴 루터 킹을 영웅시했고, 프릭스들이 말콤 X를 자기 방어의 국가적 상징이라고 봤던 시기다. 이들의 이름을 딴 거리와 광장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최근 들어 대기업의 마케팅 담당자들이 들뢰즈/가타리의 ‘유목민’ 개념을 착취하고 있는 것도 다 그런 이유다. 이건 하나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더 많이 혁명할수록 더 많이 사랑을 즐긴다”

-당신은 68혁명의 특징이 정치적 해방을 위한 사회운동과 거대한 문화적 반란이 융합이었다고 분석했다. 한국의 경우 68혁명 때만큼 사회 변혁의 기운이 꿈틀댔던 건 1980년대다. 그렇지만 문화적 반란까지 일어났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거대 담론이 무너지던 1990년대에 들어와서 한국에서 서서히 문화적 반란이 일어났다. 한국의 영화는 이와 맞물려 새로운 르네상스를 맞았다고도 볼 수 있다. 영화가 상상력이나 유희를 주된 특징으로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감성에 호소해 그 감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주된 시각 매체라는 점에서, 당신이 68혁명의 유산으로 중시하는 ‘국제연대’를 문화의 영역에서 발현시키는 데 영화가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새로운 테크놀로지는 늘 여러 운동이 내부적으로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도록 상당한 기여를 해왔다. 최근 멕시코 칸쿤에서 열린 WTO 반대 시위를 담은 비디오 같은 비디오가 전세계에서 엄청나게 빨리 상영되고 있다는 점은 대중적인 영화제작 시스템이 사회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에서 가장 주목할 만했던 일들 중 하나도 운동 내부에서 제작된 영화나 베트남에서 제작된 영화가 집회 현장에서 상영됐다는 점이다. 이런 일은 운동이 조직되고, 국제적 연대의식이나 내부적 단결이 증진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에밀 드 안토니오의 <베트남: 피그만 사건의 해>(1968)가 상영된 것은 놀랄 만한 사건이었다. 쿠바의 기록영화 감독 산티아고 알바레즈가 만든 <호치민, 79년간의 청춘>(1969), 그 밖에 집단영화제작단체들이 찍은 여러 기록영화들도 마찬가지였다. 대중매체들도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기존의 사회 질서와 단절한 영화들을 제작했다. <이지 라이더>(1969)나 비틀스의 영화 <옐로 서브머린>(1968)이 생각난다. 우리는 집회 현장에서 이 영화 주제곡의 후렴구 “우리는 모두 노란 잠수함 속에서 살고 있죠”를 우리식으로 바꿔 부르기도 했다. “우리는 모두 파시스트 전쟁 기계 속에서 살고 있죠.” 1968년 당시 프랑스에서도 영화 활동가들이 급진적인 영화들을 만들어 여러 곳에서 상영했다.

그렇지만 흔히 영화는 르네상스 시기의 과학적 원근법에서 비롯된 대상/주체라는 이원성을 영속시키기도 한다. 단 하나의 시점만을 지닌 카메라를 제작 도구로 사용할 때의 문제점은 화면과 관객 사이에서 볼 수 있는 거리가 고스란히 재생산될 수 있다는 것에 있다. 영화는 본성상 일종의 구경거리다. 물론 상업영화도 사람들의 시각을 변화시키는 데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이클 무어가 좋은 본보기다. 그렇지만 돈을 내고 영화관에 들어가 익명의 구경꾼으로 영화를 관람한다는 데에서 생기는 문제점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

-2000년의 어느 인터뷰에서 당신은 “내가 한국에서 가장 놀란 것은 ‘세대차’가 유럽에서처럼 엄청난 문화적 갈등으로 비화되지 않았다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왜 그렇다고 보았나? 그리고 문화적 모순의 하나라는 세대차가 한국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신좌파의 상상력>이 출간됐던 1999년에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그때 만난 한국의 활동가들에게 이런 질문을 해봤다. “집 한채를 구해 다같이 살면서 코뮌을 만들어보는 것 어떤가? 그러면 일도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고 재밌게 살 수도 있을 텐데….” 나는 대답을 듣고는 놀라 자빠질 뻔했다. “아버님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목숨을 내건 채 쇠파이프를 들고 경찰들과 싸워왔던 활동가들, 운동을 위해서 모든 희생을 마다하지 않을 것같이 보였던 활동가들이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보기에 유교사회에는 두 가지 성격이 서로 얽혀 있는 것 같다. 공적인 자리에서 엿볼 수 있는 친절함과 신중함이 그중 하나라면, 이 친절함과 신중함을 억압하는 가부장적이고 위계적인 모습이 나머지 하나다. 특히, 한국에서는 결혼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부모와 함께 산다. 이런 모습을 보면 전통적인 문화 형태가 개인의 자연스런 발전을 억압하는 물리적 힘이 되는 듯 느껴진다. 청소년 센터나 코뮌 형태의 가옥이 이런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것도 좋은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말이 신좌파의 문제의식 중 하나였던 걸로 알고 있다. 당신은 ‘개인주의’를 새로운 ‘독자성’으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말을 했는데, 이 뜻을 좀더 자세히 설명해달라. 지난해 한국의 젊은이들은 월드컵 축제, 반미시위, 대통령 선거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흐름 속에서 이 말을 실천하는 듯 보였다. 젊은이들은 개인에서 정치적 군중으로, 다시 개인으로 순식간에 변화해갔다.

=“개인적인 것은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신좌파의 구호는 여성해방운동에서 계발된 것이다. 정치적·사회적 억압의 맹아를 담고 있는 일상생활의 억압적 관계를 사람들이 깨닫도록 도와주려던 여성운동의 구호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내 느낌을 말한다면 한국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는 것 같다. 따라서 한국의 경우에는 개인들을 좀더 자유로운 존재로 만드는 것이 투쟁의 일부가 되어야 할 듯하다.

인터뷰 진행 및 번역 이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