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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힘을 다시 묻는다 - 한국영화의 미래를 찾아서 [2]
글·사진 이성욱(<팝툰> 편집장) 2003-12-05

위대한 ‘반동’을 만나다

파리의 겨울은 지독하게 우울하다. 늘 흐린 하늘에 툭하면 차가운 비를 뿌리고 냉기는 집요하게 옷 속으로 파고든다. 하지만 그에 비할 수 없이 힘들었던 건 레지스 드브레를 만나는 일이었다. 3주 전부터 섭외를 시작했으나 가타부타 답은 좀체 오지 않았고, 기획을 개편 특집이 아니라 신년 특집으로 미뤄야겠다고 내부 조율을 마치려는 찰나 약속시간을 통보받았다. 파리에서 취소 위기를 겪었고 시간은 한번 더 바뀌었다. 소르본 부근에 있는, 파리의 전형적인 고급 주택에서 만난 그는 파리의 겨울 하늘 못지않게 냉철하고 까다로웠다. 건네준 <씨네21>을 뒤적거리며 던진 그의 첫 일성은 “68년 5월이라면 잘못 선택했다”였다. “난 그때를 대표하지 않는다. 그 당시 난 남미 감옥에 있었으니까. 무엇보다 나는 철학자였으며, 정치적 혁명운동에 전념했고, 최근에는 종교를 연구하고 있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갖는 바는 ‘영향’(influence)이다. 설득하고 매혹하는 것. 강제하지 않고 사람을 움직이는 것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 맘이 놓였다. 궁금한 게 바로 그것이기도 했고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엄포가 미더웠다.

레지스 드브레에게는 ‘실천적 지식인’ 이상의 수식어가 필요해 보인다. 프랑스 최고 명문인 고등사범학교 수석입학자였던 그는 1967년 <혁명 속의 혁명>이란 글을 발표하고 남미로 날아갔다. 볼리비아에서 체 게바라와 함께 무장투쟁을 벌이다가 게바라가 붙잡혀 총살당하기 전에 체포돼 30년형을 언도받았다. 세계 지식인들의 구명운동 덕에 3년 만에 석방된 그는 프랑스로 돌아온 10년 뒤 미테랑 대통령의 특별자문 역을 맡아 사회당 정부의 ‘두뇌’ 구실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그는 미디어와 이데올로기를 합성한 ‘미디올로지’(Mediologie: 매개학 혹은 매체학)를 주창하며 이미지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그를 만나려 했던 게 이 때문이다.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그는 현재를 ‘비디오스페르’의 시대로 칭하며 이미지의 노예처럼 된 인간의 처지를 예술사로, 종교사로 서술해나갔다. <지식인의 종말>에선 이미지, 곧 미디어의 하인 노릇을 하는 동료 지식인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혁명의 최전선에서 무엇을 봤기에 이미지에 눈을 돌렸으며, 왜 우리는 그의 글에서 희망이 아니라 비관을 느껴야 하는지 물어야 했다. 이미지를 이길 수 없다면, 우리가 영화로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이미지는 세상을 움직인다

앙리 랑글루아의 시네마테크 사건, 고다르의 <주말> 등이 68혁명에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에 동의하는가? 랑글루아 사건은 2월에 있었고 5월의 시발점이 된 부분이 있다. 시네마테크를 정부 관료 체제 아래에 넣으려 했고, 이에 대한 반대 시위가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그 시위가 5월까지 주욱 이어졌다. 고다르의 영화는 당시 상황을 드러내주는 것뿐이다. 마오주의를 나이브하게 보여주는 영화다. 오늘날의 영화는 과거를 회상하고 향수에 젖어 있다. 예컨대 드니 아르캉의 <미 제국의 쇠퇴>(1986)와 속편인 <야만족의 침입>의 경우, 뭔가 지키려 한다는 ‘보수’라는 말 뜻 그대로의 의미에서 보수적이다. 미래에 대해 말하기보다 회상에 젖어 있다. 사실 난 거의 극장에 가지 않아서 최근 영화에 대해서는 말할 게 없다(<미 제국의 쇠퇴>는 남녀 8명이 휴양지에서 성과 성공, 신뢰와 친밀감 등에 대해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며, 10여년이 훨씬 지나 만들어진 <야만족의 침입>은 그때 배우들을 다시 출연시켜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캐나다 퀘벡의 특이한 불어 대화에 프랑스인들이 굉장히 재밌어하며 열광했다고 한다.)

철학자이자 혁명 전사였던 당신이 어떤 시점에서 왜 이미지를 연구하게 됐나? 평소 예술에 특히 그림, 사진, 영화에 관심이 있었다. 정치는 사람들을 움직이는 기술이다. 이 점에서 정치와 예술이 만난다. 68년 이후에 관심을 가진 건 스크린의 등장 때문이다. TV와 컴퓨터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글로 쓰여진 것, 즉 책, 신문, 정당을 대체했다. 책은 지식인으로, 신문은 노동자로 연결되며 정당이 이 둘을 매개해왔다. 재밌는 건 70년대 이후 좌파들이 계속 글로 쓰여진 것, 말에 집착했던 반면 우파들은 이미지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말은 언제나 전달에 시간이 많이 걸리며 엘리트적이다. 반면 이미지는 짧은 시간에 좀더 넓은 범위로 전달된다.

그렇다면 이미지를 누가 어떤 목적으로 만들고 운용하는가의 문제, 즉 이미지 제조와 유통을 둘러싼 헤게모니 싸움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진 게 아닌가 이미지가 매혹의 힘을 발휘하는 건 자본주의 시장, 즉 상품과 관계있다.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계는 결국 모든 걸 상품화한 사회다. 사회주의 국가에는 지도자의 이미지가 있을 뿐 다른 건 모두 구호로 만들어져 있다. 구호는 상품이 될 수 없다. 이미지는 에로티시즘과 타락에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데 전자는 여성의 이미지와 후자는 황금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다시 이건 부와 관계된다. 사는 데 돈이 많이 드니까. 이슬람이 이미지를 금지하는 건 어찌보면 부를 누리지 않으려는 가난한 종교이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이미지가 너무 많아서 부패하기도 했다.

-그러면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는 이미지가 주는 것만을 보며 수동적으로 살아야 하나?

=이미지를 너무 악마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건 좀 지나치다. 이미지는 시간이 지나면서 닳아 없어진다. TV는 20년 전처럼 우리를 매혹하지 않는다. 이미지는 다양한 측면을 갖고 있는데 싸잡아서 매도하면 안 된다. 예전부터 늘 그런 시도가 있는데, 탈레반이 성상을 파괴한 것도, 과거 기독교가 성상 파괴 움직임을 보인 것도 그런 예에 속한다. 또 재밌는 건 이미지가 국경을 넘나든다는 건데, (<올드보이>의 최민식, 유지태가 등장한 <씨네21>을 가리키면서) 나는 한글을 모르지만 이 표지가 뭘 의미하는지 알 수 있다(그는 한글을 불어가 아닌 ‘한글’이라고 발음했다). 이미지는 곧 세계화를 뜻한다. 초기 기독교가 널리 퍼질 수 있었던 건 십자가, 성상 등 이미지들의 집합 때문이었다. 이미지는 수평적으로 굉장한 넓이를 가지고 있다.

이미지가 세상을 움직인다면 그 이미지를 다루는 사람들이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닌가? 70년대의 좌파들이 글이 아니라 이미지에 주력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이미지는 대단히 테크닉한 것이다. 그렇게 볼 수 없다. 좌파도 이미지를 쓴다. 스탈린이 죽었을 때 피카소가 그의 초상화를 그려 공산당 기관지에 실은 적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공산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위엄있게 그린 것이 아니라 별볼일 없는 젊은 청년의 모습을 그렸으니까. 기본적으로 좌파는 논리를 믿고, 펼치고, 질서지우려고 해서 이미지를 사용하는 것과 거리가 멀다.

당신은 <이미지의 삶과 죽음>에서 “영화에 대해 가장 깊이있는 반성적 텍스트들을 모아놓은 ‘제7의 예술’ 총서를 도미니크회 신부들의 출판사인 ‘르 세르’에서 펴내고 있으며, 영화평론의 선구인 앙드레 바쟁은 가톨릭적인 강렬한 색조에 젖어 있다”고 비판적인 어조로 말했다. 바쟁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것인가? 바쟁은 <카이에 뒤 시네마>를 만든 전설적인 평론가다. 그는 매우 가톨릭적이고, 굉장히 로셀리니적 생각을 갖고 있다. 그는 실재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고, 이 세계 그리고 실재하는 건 어떤 식으로든 구체적 형상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봤다. 세계를 바꾸려 하지 않고 포착하려고 했다. 이런 생각이 누벨바그에 직접 영향을 끼쳤다. 누벨바그 세대가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나선 건 존재하는 현실을 포착하려고 했던 것이다.

당신은 “나는 68혁명을 함께한 내 또래를 메시아를 기대한 마지막 세대로 본다”고 했고, 비디오스페르의 시대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덜 메시아적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구원이 될 수 있나? 이 시대는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다. 구원이 있다면 비매개적인 것에 있다. 예를 들어 현재에 집착하는 것이다. 개인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는. 지금은 이미지의 시대이기 때문에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에 집중한다. 미래는 말이나 글로 쓰여지지 이미지로 보여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블레이드 러너>가 어두운 미래, 디스토피아를 보여주긴 했지만 말이다. 중세나 근대 초기까지는 죽음 등 과거에 집착했고, 19세기는 미래에 중심을 둔 세기였다. 지금은 현재에 집착하는 시대다.

푸코, 들뢰즈, 라캉 등 각각 다르기는 하지만 이른바 ‘68사상’으로 묶이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푸코의 경우, 무정부주의자에 가깝다. 모든 종류의 제도에 반대했던 사람이니까. 그러면서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고자 했다. 이 무정부주의적이고 좌파적 주장은 거꾸로 우파 자유주의자의 비판을 받고 있다. 68 당시에는 규율을 없애야 한다고 했는데 지금은 오히려 규율을 세워야 한다는 쪽으로 바뀌고 있다. 나는 이걸 부정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패러다임이 바뀐 것일 뿐이다. 이슬람 학교가 학생들에게 차도르를 머리에 쓰게 하는데, 프랑스는 학교가 종교를 드러내지 않는 방침을 가지고 있어서 차도르를 쓰지 못하게 했다. 프랑스가 취한 이 금지라는 방법은 68 당시에는 상상도 못할 것이었다.

드브레는 이따금 놀라운 소신을 밝혀 파란을 일으키는 독특한 행보를 취해왔다. 지난 99년 코소보 전쟁 당시에는 인종청소의 원흉처럼 지목되던 밀로셰비치 전 유고 대통령을 옹호해 파란을 일으켰다. 밀로셰비치는 적어도 3번이나 선거를 통해 집권했으며 그가 독재자라면 어떻게 그의 정당이 의회 내 소수당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런 행적 때문에 일부에선 그를 ‘반동’ 내지 ‘변절자’로 바라본다. 하지만 이미 구원은 없다고 판단한 그에게 두려운 게 있을까? 드브레에게서 어떤 희망을 가늠하기는 힘들었다.

통역 차민철, 장태순, 오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