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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 그 신화의 현장 도쿄를 가다 [2]

1. 오즈를 추억하는 일본의 풍경

인터내셔널 평론가. 왼쪽부터 장 미셸 프로동. 크리스 후지와라. 샤를 테송. 임재철

이제 오즈 야스지로가 태어난 지 100년이 지났고, 그가 죽은 뒤로 40년이 흘렀다. 그는 태어날 때 이미 약속이나 한 듯이 12월12일 육십 번째 생일날 다시 돌아갔다. 자신의 영화처럼 ‘완전한 구도’로 살다간 그 우연성을 작은 신화로서 보고 싶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일까? 오즈 100주년에 맞춰 현지의 공기를 직접 느낀다는 취지하에 도쿄로 향하기 전날, 엘비스 프레슬리를 찾아 멤피스로 향하는 <미스터리 트레인>의 첫 번째 에피소드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지만 때때로 제어할 수 있는 신화가 동기를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오즈 100주년에 맞춰 일본의 NHK는 거의 매일 저녁 그의 영화를 텔레비전에서 상영하고 있었다. 행선지 곳곳에서 그들의 취재카메라를 마주하기도 했다. 아카이브이면서 상영관이기도 한 도쿄필름센터는 11월18일에서 2004년 1월25일까지 예정되어 있는 오즈의 회고전을 상영 중이었다. 우선 회고전의 상영목록에는 현존하는 오즈의 가장 오래된 영화 <젊은 날>(1929)이 들어 있다. 오즈 영화의 영원한 아버지상으로 잘 알려져 있는 배우 류치슈가 두 주인공의 친구로 잠깐 등장한다. <젊은 날>은 류치슈가 오즈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는 첫 작품이다. 그리고, 1989년 평론가 야마네 사다오가 극적으로 발견해낸 <못

말리는 꼬마>와 1997년 필름센터가 발견해낸 <일본식 싸움친구> 역시 포함되어 있다. 오즈 회고전의 기획자이기도 한 오카다 히데노리는 도쿄필름센터가 “개인 소장자에게 9.5mm 축소판 필름으로 기증받은 <일본식 싸움친구>가 이토 다이스케의 <창인창마> 이후 두 번째로 디지털 작업을 통해 35mm로 복원된 작품”이라는 점과 그 보관 형태인 “9.5mm 필름은 전쟁 전 지금의 비디오처럼 일반인들에게 팔 수도 있고, 개인 소장할 수 있는 축소판”이라는 사실을 들려준다. “주로 개인 소장용으로서의 축소판이었기 때문에 일부분만 갖고 있다”는 아쉬움까지 토로하면서.

도쿄필름센터의 7층 전시장에서는 ‘젊은 날: 쇼치쿠 가마타 스튜디오 시기의 오즈와 시미즈’라는 제목의 포스터 및 스틸 사진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이 전시는 시미즈와 오즈가 활동하던 가마타 스튜디오 시절 쇼치쿠 작품 중 현존하지 않는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시미즈 히로시는 오즈와 같은 해에 쇼치쿠에 입사했으며 오랜 기간 오즈의 친구이기도 했다. 시미즈 히로시의 경우에는 포스터까지 남아 있지만, 오즈는 17편의 작품에 해당하는 스틸 사진들만을 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눈에 띄는 것이 있었는데, 오즈의 최초 서민극으로 알려져 있는 <회사원 생활>에 대해 그가 직접 스토리와 작품을 소개한 글이 실려 있는 <제국간 뉴스>라는 팸플릿이다. 오즈는 “시나리오 작가 노다 고고, 그리고 애써준 출연자들과 함께 열심히 한편을 만들었다. 비판과 조언을 주시면 달게 받겠다”라는 말로 맺음하고 있다. 만약 올 초 기타 가마쿠라 박물관에 갈 수 있었더라면 오즈의 유족들이 내놓은 오즈 유품 전시회를 볼 수 있는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2. 묘비명의 단 한 글자, 無

엔가쿠지 전경

오즈 야스지로의 묘

그러나 그 지나가버린 경험을 대신하여 <지금, 오즈>라는 책에서 얻은 간접적인 몇 가지 정보를 제공한다. 이 책에 의하면, 오즈는 촬영 중에 항상 면으로 된 모자를 썼고 개인적인 자리에서는 중절모를 썼다고 한다. 촬영장에서도 정장 바지를 입었고 작업복을 입는 일은 결코 없었다. 양말조차 “이게 아니면 안 되지”라는 신념으로 미국제와 영국제를 신었고, 그가 사용한 물품 중에는 수입품과 주문제 작품이 많았다. 또한, 그는 좋아하는 식당의 이름과 약도를 적어둔 ‘식도락 수첩’을 따로 들고 다녔다고 한다. 그는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생활에서도 예의 패턴을 유지했으며, 또한 불균질한 ‘모던 보이’였다. 그리고, 그의 영화에 음식에 대한 이야기가 멈추지 않는 데에도 이유가 있는 셈이다.

되돌아가, 취재 첫날 방문한 곳은 도쿄 근방 기타-가마쿠라 지역에 있는 엔가쿠지 사원이다. 사실, 공인된 ‘길치’가 도쿄의 전철을 탄다는 것은 난수표 같은 전광판에 하루를 맡기는 일이나 진배없다. 그러면서도 찾아간다. 그곳에 오즈가 묻혀 있기 때문이다. 막부시대에 지어진 사원이라는 관광책자의 설명은 아무 의미가 없다. 오즈를 찾아간 사람에게 그곳은 아버지와 며느리가 같이 산책을 하고, 노부부가 나란히 앉아 풍경을 바라보고, 헤어지기 직전의 가족이 슬픈 나들이를 하는 ‘오즈의 사원’일 뿐이고, 그가 묻힌 곳일 뿐이다. 그의 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은 기념품 가게 아주머니조차 그가 여기 묻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점에서 느낄 수 있다. 그의 무덤 앞에 서자, 오즈가 엔가쿠지의 스님에게 받아 평소에도 마음에 두고 즐겼다는 단 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無.’

“깊고, 모순된 감정을 수용하는 것이 가능하고, 또한 그 감정을 일체화된 영원의 초월적인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은 형식”으로 오즈의 영화를 설명한 폴 슈레이더였다면 묘비에 새겨져 있는 ‘무’라는 한 글자가 자신의 불교철학적인 해석을 증명하는 개념으로 보였을 것이다. 한편, 일본영화 연구가 도널드 리치는 ‘무’에 대해 “비어 있음 그리고 침묵은 작품의 일부분으로서 긍정적인 요소가 된다”고 말하면서 오즈 영화의 의미없어 보이는 사물들의 포착이 사실은 감정을 담는 그릇의 역할을 하고, 그것은 새로운 틈을 만들어내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는 비어 있음 그 자체를 오즈가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 전통주의와 규범 파괴

서구 사람들은 쉽게 자신의 영화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지만 언젠가는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한 오즈 자신의 예언은 그의 영화를 ‘일본적인 전통’ 혹은 동양적인 ‘선’(zen)의 개념으로 받아들이는 의식으로 먼저 나타난 것이다(하지만 오즈의 영화가 ‘일본적’이라는 데에는 외국뿐만 아니라 실상 일본에서의 인식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오즈의 영화를 지배하는 로 포지션의 카메라는 일본 가옥에 맞춰진 일명 ‘다다미 숏’으로 설명되었고, 그의 영화에서 앙상하게 남아 있는 스토리는 어떤 정신적인 것의 반영이자 효과로서 인식되었다. 도널드 리치는 오즈가 <그 여인은 무엇을 잊어버렸나>를 만들기까지 “한계에 다다름, 스토리 없음”이라고 자주 불평했다는 것을 주시한다. 그리고 <도다가의 형제 자매들> 이후로 그런 말이 오즈의 노트에서 사라진 것은 바로 무언가 해결점을 찾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오즈 회고전을 상영 중인 도쿄필름센터 전경

그렇지만, 신형식주의자 데이비드 보드웰은 오즈의 영화를 전통문화에 근거해서 설명하는 이런 해석틀을 반박한다. 오히려 고전적인 할리우드 규범(norm)에 대한 혁신적인 저항자로 오즈의 위치를 바꾸려 한다. 그는 180도 가상선의 파괴와 360도 화면구성(하지만 이런 형식을 지닌 감독은 오즈의 동세대에도 역시 있었다), 그리고 짜여진 프레임 안에서 도상적으로 맞춰져 있는 피사체들의 구도 등을 들어 오즈를 모더니즘 예술가로 탈바꿈시킨다. 이런 형식이 할리우드의 관습적인 연속성을 뛰어넘는 대안으로서 오즈에게서 채택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보드웰의 논점은 오즈를 모더니즘 논쟁의 예시로 몰아갔고, 그뒤로 이어지는 반론과 재반론은 애초 제기되었던 ‘오즈의 영화를 둘러싼 전통과 모더니즘의 논쟁’이기보다 ‘모더니즘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하는 원론적인 문제로 선회하게 된다.

논쟁은 일단 오즈의 영화가 쉽게 설명될 수 없는 자의적인 논리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생겨난다. 오즈는 스스로 납득할 수 있다면 그것이 옳다고 믿었다. 하나의 예가 있다. 오즈의 편집기사였던 하마무라 요시야수는 오즈에게 시선의 매치가 틀렸으니 다시 찍자고 건의했다. 그러자고 동의한 오즈는 숏과 리버스 숏의 시선이 불일치하는 항상 그대로의 ‘틀린 방식’과 하마무라가 제기한 원래 ‘맞는 방식’ 둘 모두로 촬영했다. 그리고 이 둘을 비교해보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음, 별 차이가 없군.” 그는 자의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누군가를 구체적으로 납득시키려고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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