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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허문영의 차승재라는 화두에 대한 근심 [2]

이쯤에서 <살인의 추억>에 대한 내 불만을 말하는 게 좋겠다. 이 영화의 뛰어난 만듦새에 대해선 다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살인의 추억>에서 먼저 혼란스러웠던 건 연쇄살인범으로 지목된 박현규(박해일)가 너무 아름답게 그려진다는 사실이다. 그는 우아하면서도 짙은 우수가 깃든 얼굴과 부드러운 손, 그리고 유재하의 <우울한 편지>를 좋아하는 풍부한 감수성, 게다가 무식한 세 형사의 강압과 폭력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는 결기와 강단의 소유자다. 혼자 살고 있는 그는 길을 잘못 찾아 이 시대에 도착한 고독한 이방인처럼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가 터널 속으로 사라질 때, 비장한 반영웅의 풍모까지 느껴진다. 내게 권한이 있다면 2003년 최고의 캐릭터와 배우상을 박현규와 박해일에게 주고 싶을 정도로 그는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가 진범인지는 영화 속에서 확증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건 교묘한 트릭이지만 어느 쪽이라도 문제가 남는다. 먼저 박현규가 진범일 경우. 그에 대한 나의 매혹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는 위에 열거한 갖가지 매력에다, 난폭하고 잔인하면서도 빈틈없이 유능한 악마의 이미지까지 갖췄다.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싸이코>의 노먼처럼 현실적으로가 아니라 장르적으로 매혹적인 인물인 것이다. 아니 그들보다 더욱 매혹적이다. 두 번째 박현규가 진범이 아닐 경우. 우리는 사기를 당한 셈이 된다. 우리는 헛것을 쫓느라 그렇게 안타까워하고 발광하고 부서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살인의 추억>은 영리하게도 어느 쪽이라고 말해주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판단과 욕망을 지연시킨다.

후반부에서 영화의 정서를 이끌고 가는 건, 다름아닌 박현규다. 붙잡고 싶었으나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대상을 향한 안타까움, 그리고 궁극적 실패에의 예감이 관객으로서의 나를 붙들었다. 실은 나는 실패에의 예감을 욕망한다. 영화의 표면적 구성이 유도하는 욕망은 그가 붙잡히는 것이었으나, 나의 은밀한 욕망은 그의 자리가 영원히 비어 있는 것이다. 이 욕망은 주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그가 잔혹하게 강간하고 살인하는 장면을 한번도 보지 못함으로써 그의 매혹을 성찰할 기회를 얻지 못하며, 세 번째 살인이며 프레임 안의 첫 살인 장면에서 이와시로 다로의 음악은 불안과 공포가 아닌 비애와 고독의 톤으로 그의 민첩하면서도 우아한 동선을 장식한다.

그러니 박현규가 체포돼 사형당한다면 나는 오히려 불편했을 것이다. 나의 욕망은 그가 사라짐으로써 내 공허와 슬픔을 남겨두는 것이다. 이 패턴은 비극적 연애담과 놀랍게도 흡사하다. 여기서 분명해진다. 진범 여부의 모호함은 실은 그의 현존마저 안개 속에 가둠으로써, 안타까움과 실패에의 예감, 그리고 그 매혹까지 더욱 짙게 만드는 장치인 것이다. 나는 <살인의 추억>이 매혹과 증오의 아이러니를 다룬 영화라고 생각한다.

그것만이었다면 나는 이 영화를 유보없이 사랑했을 것이다. 나를 머뭇거리게 한 건 <살인의 추억>이 인용하는 시대적 사건이다. 직접적으로 인용되는 건 강간 형사 문귀동의 체포장면 뉴스, 시위 진압, 등화관제 훈련이다. 뒤의 두 가지는 형사들의 발을 묶어 살인을 방조하는 내러티브상의 구성적 기능을 맡는다. 시대의 압제는 악마와 공모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것이다. 그럴듯해 보이지만 그냥 넘어가기 힘든 점이 있다. 단순히 시대적 요소를 편의적으로 끌어오는 데 따른 내러티브상의 허술함의 문제만은 아니다(이를테면 80년대적 상황이 아니었다면 살인은 두번으로 끝났을 것이다).

우리는 그 시대의 학살자이자 압제자를 알고 있다. 그리고 그가 우리 눈앞에서 저지른 80년대의 만행을 알고 있다. 그는 징벌자의 무기력과 비겁으로 멀쩡히 살아 있다. <살인의 추억>에서 시대적 악은 장르적 반영웅의 조력자로 포섭되면서, 그것에 동반되는 시대의 고통과 무기력과 비겁함은 숙명적 패배의 장르적 공기 속으로 증발해버린다. 시대적 악은 이제 터널 속으로 혹은 허공으로 사라져버린 반영웅의 아스라한 이미지 형성에 봉사하고 있을 뿐이다. <살인의 추억>은 시대를 끌어오면서, 시대의 무게는 버린다. 이 영화에 내가 빠져든 것이, 그리고 엄청난 대중적 환호가 쏟아진 것이, 나의 비겁과 무기력을 운명적 패배로 위장하고픈 우리의 욕망과 그 영화가 공모한 결과일지도 모른다는 짐작 때문에 이건 끝내 소화되지 않고 걸린다. 나는 진심으로 <살인의 추억>이 <파고>나 <쎄븐>처럼 그 시골마을이란 무대 안에서 자기 완결적인 이야기로 끝나기를 원했다.

사소하지만, 그래서 박두만이 카메라를 쳐다보는 마지막 장면도 동의하기 힘들다. <살인의 추억>이 매혹과 증오의 아이러니를 다룬 장르영화라면 이 결말은 최상이다. 그러나 시대와 공모한 악의 불가항력적인 현존을 말하려 했다면 이건 이해할 수 없다. 박두만은 왜 농촌으로 가서 살인범의 체취를 느끼는가. 그곳은 박두만이 오래전에 떠나온 잊혀진 과거의 공간이며, 그가 잠시 스쳐가는 곳일 뿐이다. 악이 그곳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추억일 뿐이다. 내게 맑은 가을 하늘로 시선을 옮기며 끝맺는 이 결말은 그곳을 빠져나왔던 반영웅이 어딘가에(정말 무섭게는 내 곁에) 현존하는 게 아니라, 처연한 아름다움마저 풍기는 과거의 공간에 봉인돼 있음을 말해주는 결말이다.

영화가 시대를 인용하고 각색하는 건 창작자의 자유다. 그 목적이 가벼운 유희와 농담, 혹은 악취미의 발현이어도 상관없다. 그러나 동시대 관객이 살아온 시대의 환부를 말할 때는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환부의 원인과 효과가 오늘의 삶에 지속되는 한 그것의 무게와 대면해야 한다. 나는 점점 더 과거를 많이 말해가고 있는 한국영화에서 그게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성일의 표현을 빌리면 ‘과거의 시간으로 가서 그 시간의 무게를 온전히 견뎌낸’ <선택>의 소리없는 실패와 <살인의 추억>의 요란한 성공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시대적 요소의 편의적 사용은 구성상의 결함뿐만 아니라 윤리적 결함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4. 맺으며

이 근심은 <살인의 추억>이나 차승재를 향한 게 아니라 나와 나처럼 생각해왔던 관찰자들에게 향해 있다. 차승재는 애초부터 예술가도 엔터테이너도 아니며 온전한 장사꾼도 아니다. 그는 차라리 교과서에 없는 미로를 스스로 만들어놓고 그걸 헤쳐가는 데 쾌감을 느끼는 게이머에 가깝다. 그에게 비평적 상찬이나 상은 일종의 덤이다. 여러 인터뷰를 통해 판단하건대 봉준호 역시 거장의 무운을 품은 젊은 작가라기보다, 자신의 쾌락을 위해 영화를 만드는 사람처럼 보인다. 국적성이나 예술가로서의 사명보다는 자신이 만족할 만큼 도전적인 과제가 그들을 움직인다.

<살인의 추억>은 차승재식 모험의 결정판이면서 또한 그것의 한계다. <살인의 추억>은 다른 차승재 영화처럼 장르를 경유하면서도, 갈등을 제시하고 해결하는 장르의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 장르의 또 다른 약속인 공동체의 안전도 보장하지 않는다. 이 비관과 모호성으로 가득 찬 이야기를 유머와 풍경과 음악과 갖가지 디테일로 촘촘히 엮어낸다. 나는 이 불안한 이야기 사이를 게이머의 욕망이 가로지른다고 느낀다. 모험적인 게이머의 태도를 지닌 사람에겐 반인륜적인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텍스트의 긴장을 높이는 한 어떤 것이든 자기 게임의 한 요소로 전용하고픈 유혹이 생기게 마련 아닐까. <살인의 추억>에서 내가 느낀 불만이나, 감탄하면서도 <유령>에서 내가 끝내 찜찜했던 호전적인 국수주의 영웅도 그런 사례라고 생각한다.

흥미롭게도 이런 성향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박찬욱이나 김지운, 이재용 같은 동세대 감독들에게도 느껴진다. <올드보이>는 다른 제작사의 작품이지만, 내게 그건 또 다른 차승재 영화처럼 보였다. 극한의 감정으로 치닫는 두 남자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랬으며, 아버지와 딸의 근친상간이 자연발생적 애정이 아니라 최면으로 촉발됐다는 설정은, 다른 층위이긴 하지만 <살인의 추억>이 끌어들인 시대적 요소를 생각나게 했다. <올드보이>야말로 한계체험에 이른 두 남자가 맞붙는 게임처럼 느껴진다.

내 근심의 대상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성취를 이상화해온 나의 시선이다. 그들에게 아시아적 비전, 한국적 감성의 영화를 요구하는 건 부질없는 짓일 것같다. 그들은 누가 뭐래도 자신의 길을 갈 것이다. 가면서 지금까지 그래왔듯 장르를 세련화하고 캐릭터를 입체화하고 갈등을 다면화하며, 더 복잡한 게임을 벌일 것이다. 차승재의 모험은 끝나기는커녕 아마도 더 맹렬하게 다각도로 뻗어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할리우드의 고전기 장르 감독들이 그랬듯, 몇몇은 눈부신 비약의 계기를 만날 것이다. 거장은 하늘에서 떨어지기도 하지만, 그렇게 자기 쾌락의 길이나 대중적 소통에 골몰하던 사람들 중에서도 태어난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 어떤 영화를 먼저 지지해야 하는가는 다른 문제다. 그것이 나의 근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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