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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2] - 이동진
권은주 2004-02-20

오빠들의 잔혹사는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남성 추억담의 입체적 판타지

이동진/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 djlee@chosun.com

<말죽거리 잔혹사>

새해 한국영화는 온통 ‘과거’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가 ‘공적인 과거’인 ‘역사’를 다루는 데 비해 <말죽거리 잔혹사>는 ‘사적인 과거’인 ‘추억’을 다루고 있다. 지금 관객은 온통 ‘스펙터클한 역사의 잔상’에 열광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난 ‘화석이 된 추억의 이명(耳鳴)’에 더 관심이 있다. 완성도 높은 대중영화들로, 개별 에피소드까지 상당히 겹치는 이 셋은 농담 삼아 말하자면, ‘오빠는 고등학교 때 이랬단다 3부작’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근친관계에 있다.

하지만 정체성을 만드는 것은 언제나 공통점이 아니라 차이점이다. 나는 세 영화가 과거를 강렬히 환기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음에도 과거를 대하는 방식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차이점은 이 영화들이 흥행이란 형태로 대중에게 수용될 때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다고 믿는다(이 글에서 <친구>는 비교를 위해 고교 시절을 다룬 전반부 위주로 논의한다).

1. 시제 - 증오가 강할수록 그리움도 깊다

1978년의 <말죽거리 잔혹사>, 1981년의 <친구>, 1986년의 <품행제로>는 모두 남자 고교에서 펼쳐진다. 그리고 그 시대가 그러했듯, 영화 속 고교들 모습은 하나같이 정글 같다. 폭압적 권력의 축도인 교사들은 학생들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고, 폭력의 메커니즘을 체화한 학생들 역시 ‘짱’이라는 권력의 정점 주위에 둘러서서 서로 주먹을 날린다.

그러나 <품행제로>에서 학생들은 일상화된 교사 폭력에 대해 저항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도 교사가 발로 짓밟기까지 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카메라는 맞는 아이들의 과장된 행동 위주로 코믹하게 담아냄으로써 폭력을 고발하진 않는다. <품행제로>에서 교사 폭력은 그저 그 시절의 풍경일 뿐이다.

<친구>에서는 아버지 직업을 물으며 때리는 담임교사의 무자비한 폭력장면에서 매를 맞던 준석(유오성)이 화를 벌컥 내고 동수(장동건)와 함께 교실을 박차고 나온다. 동수는 패싸움으로 퇴학당한 뒤 학교를 찾아가 교무실의 장식장을 박살낸 뒤 놀라는 담임교사에게 “길에서 내하고 만나지 마소”라고 위협적으로 내뱉는다.

교사 폭력에 대한 증오가 가장 강한 것은 <말죽거리 잔혹사>이다. 군복 입은 교련교사의 ‘캐비닛 폭행’을 비롯한 교사 폭력은 양으로도 가장 많다. 학생들 반발도 제일 거세다. 현수(권상우)는 때리는 교련교사의 주먹을 쥐어 제지하고, 찍새(김인권)는 아예 그에게 ‘헤드록’을 걸어 직접적 위해를 가한다.

이는 서울 강남(<말죽거리 잔혹사>-양재동)과 강북(<품행제로>-종로), 그리고 지방 도시(<친구>-부산)라는 공간의 차이일 수도 있다. 교사 폭력 정도가 가장 강한 <말죽거리 잔혹사>의 강남은 지난 30년간 ‘욕망의 땅’으로 상징되지 않았던가.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런 차이는 과거와의 거리 정도에 달려 있다. 단적으로 말하면, 과거와의 심리적 거리는 <말죽거리 잔혹사> <친구> <품행제로>의 순서로 가깝다. <품행제로>의 시제는 이미 발생한 일회적 사건을 기술하는 ‘과거시제’다. 이 영화는 뒷짐진 채 웃음과 관조가 반씩 섞인 시선으로 지난날을 바라본다. 과거를 이미 서랍 속에 정리해놓은 사람의 여유가 엿보이는 이 영화는 작품 마지막을 장난기 가득한 후일담으로 장식할 수 있을 만큼 넉넉한 거리를 확보했다.

<친구>의 시제는 ‘과거완료’다. 영화 속 어린 시절과 고교 시절은 그 자체로 완벽한 폐곡선 같다. 노래하는 진숙(김보경)을 보고 친구들이 동시에 반하는 일로 시작해서 퇴학과 가출로 막을 내리는 고교 시절 부분은 결국 ‘우리 모두 하나였던 그리운 과거’로 완결지어져 있다. 사라진 (반)영웅들 뒤로 완결된 신화가 남은 것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시제는 ‘현재완료진행형’이다. 여기서 과거는 여전히 현재의 악몽으로 출몰한다. 세월이 흘렀지만 만든 이는 과거를 마치 현재인 것처럼 느끼고 있다. 이 영화에서 고통은 ‘고통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 ‘환부로 남아 영원한 통증을 안기는 고통’이다. 그 고통이 여전히 현실이기에 고통을 안긴 대상에 대한 증오가 날것 그대로 표출되는 것이다. 강력한 악의 존재를 상정하는 순간, 과거는 현재가 된다. 80년대의 상징인 성룡 앞에서 현수가 70년대를 은유하는 이소룡을 고집스럽게 내세우는 엔딩은 이 영화의 과거에 대한 자세를 드러낸다.

2. 구조 - 숲에서 나오지 않으면 숲을 볼 수 없다

<품행제로>

스토리를 펼치는 방식을 살펴보면 이런 차이는 더 확실해진다. <품행제로> 화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일어난 사건에 대해 학생들이 ‘뒷말’을 나누는 장면들을 계속 집어넣는 것이다. 풍문으로 이야기 전체를 감싸는 방식은 이야기 자체에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 영화는 과거란 의미가 생성되는 과정에서 과장과 윤색으로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풍문의 메커니즘을 통해 끊임없이 환기시킴으로써 과거를 ‘그저’ 과거로 남긴다. 가끔 그리워도, 과거란 결국 삶의 가십일 뿐이다. 여기서 풍문은 과거 사건을 다루는 ‘기사’의 구실을 한다.

반면 <친구>에서 상택(서태화)의 내레이션은 ‘편집 후기’와 같다. 감독의 시선을 품고 있는 캐릭터 상택은 관찰자이다. 그때그때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친구들이 빚는 사건의 추이를 함께 담아내는 이 내레이션은 안정된 대표 집필로 ‘학급 문집’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 영화의 과거는 관찰자의 내레이션으로 표구된 채 액자에 완결된 형태로 담겼다.

<말죽거리 잔혹사> 역시 내레이션을 곁들인다. 그러나 그 내레이션이 주인공의 것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일기’와 흡사하다. 일기는 형식상 과거의 기록이지만, 내용적으론 생생한 현재를 담지한다. 그리고 당연히도 주관적이다. 펼쳐지는 순간 일기는 늘 세월을 소거해 현재 앞에 과거를 일으켜세운다. 일기 쓰는 사람이 쓰는 자신과 쓰여지는 대상인 자신을 구분하지 않듯, 이 영화 역시 과거 속으로 온몸을 던진다.

3. 액션 - 가장 강렬한 판타지는 리얼리즘의 외투를 입는다

세 영화는 개봉 당시 모두 ‘직접 치고받는 사실적 액션’을 강조했다. 그러나 <품행제로> 마지막 싸움장면의 리얼리티와 비교한다면, 잘 안무된 나머지 둘의 액션은 상대적으로 액션영화에 가깝게 양식화되어있다.

흥미로운 것은 가장 만화적인 액션장면과 가장 사실적인 액션장면이 모두 다 <품행제로>에 있다는 점이다. 이 영화엔 3개의 액션 시퀀스가 나오는데 중필과 태권도부의 싸움, ‘악당’ 상만과 유도부의 싸움은 황당하기 그지없는 만화적 액션으로 펼쳐진다.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중필과 상만의 싸움장면은 말 그대로 ‘개싸움’이다. 중필과 민희(임은경)의 키스장면은 갖가지 앵글로 드라마틱하게 담아냈던 카메라가 여기선 흔들리는 촬영감독의 어깨에 실려 컷을 나누지 않은 채 지켜보기만 한다. <품행제로>의 액션 판타지는 그 과장된 톤으로 오히려 ‘판타지스러움’을 스스로 발라낸다. 풍문에 따라 펼쳐지는 두개의 시퀀스를 최대한 과장한 뒤 가장 사실적인 싸움장면을 정점에 놓아 대조케 함으로써 판타지와 현실 사이에 명확히 금을 긋는다.

판타지가 관객에게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은 역설적으로 리얼리즘의 외투를 입었을 때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마지막 액션이 그 예가 될 것이다. 현수가 여러 명의 선도부원들을 상대로 주먹과 발, 그리고 쌍절곤을 휘두르며 ‘처절하게’ 싸우는 장면은 동선과 액션이 잘 짜여진, 액션에 대한 관객의 판타지를 그대로 만족시켜주는 시퀀스이다. 다만 컷의 길이가 상대적으로 길고 카메라가 트릭을 부리지 않아 사실적으로 보일 뿐이다. 리얼리즘 그릇에 담긴 이 영화의 액션 판타지는 관객에게 강력한 카타르시스를 준다.

<친구>에서 극장 안 패싸움은 액션영화의 전형적 테크닉으로 구성됐다. 유리창과 소화기를 휘두르며 싸우는 이 장면의 박진감은 고교 시절을 내내 역동적으로 담아온 카메라의 특성을 극대화한다. 다른 두 영화에서와 달리 <친구>의 극장 패싸움은 둘러서서 지켜보는 구경꾼들이 없다. 그건 <친구>가 이미 구경꾼 시선이 필요없는, 자기완결적 ‘과거완료’ 영화이기 때문이다.

4. 내용 - 우정, 사랑, 성장의 곁에 선 여성들

내용적으로 세 영화의 차이는 무엇보다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어떻게 묘사하느냐에 있다. 상대적 비교를 할 때, <품행제로>는 사랑에 대한 영화이고, <친구>는 우정에 대한 영화이며, <말죽거리 잔혹사>는 ‘성장’에 대한 영화이다.>&n

<친구>에서 진숙은 그저 강렬한 ‘싸나이들의 우정’에 소품처럼 끼어 있다. 그는 사랑을 중심 테마로 끌어올리기는커녕 완전무결했던 우정에 첫 균열을 가져오는 뇌관 역할을 할 뿐이다. 참극의 순간까지도 비장한 우정으로 덧칠하는 이 영화에서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대사는 “(우리는) 친구 아이가!”이다. 모든 의문을 무화시키는 동어반복적 대답은 결국 맹목적인 ‘내 편’의 갈구일 뿐이다. 달리

<친구>

<친구>에서 진숙은 그저 강렬한 ‘싸나이들의 우정’에 소품처럼 끼어 있다. 그는 사랑을 중심 테마로 끌어올리기는커녕 완전무결했던 우정에 첫 균열을 가져오는 뇌관 역할을 할 뿐이다. 참극의 순간까지도 비장한 우정으로 덧칠하는 이 영화에서 사랑이 들어설 자리는 없다.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대사는 “(우리는) 친구 아이가!”이다. 모든 의문을 무화시키는 동어반복적 대답은 결국 맹목적인 ‘내 편’의 갈구일 뿐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은주(한가인)는 참한 여고생으로 보이지만, 사실 ‘팜므파탈’에 가깝다. 두 남자 사이에서 이중적인 그의 처신은 결국 우식(이정진)과 현수의 우정을 망가뜨린다. 극중 비중에도 불구하고 전체 맥락에서 볼 때 은주는 현수의 ‘아픈 성장’을 이끌어내기 위한 ‘스쳐지나가는 바람’의 역할을 할 뿐이다. 우정도 마찬가지다. <친구>에 비하면 이 영화의 우정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연히도 함께 농구를 잘해서 친구가 됐고, 무리가 되는 게 좀더 유리했기에 어울려 다닌 것뿐이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식과 함께 떠난 우정이나 은주와 함께 사라진 사랑이 아니라, 모든 게 증발하고 난 뒤 남겨진 현수가 느끼는 절망적 상황이며 세계와 홀로 대면하게 된 자의 실존 자체이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세계’를 상징하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가 등장하지 않는 <친구>와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발휘하는 것은 아버지들이다. 이 두 영화는 세상과의 투쟁에 나선 남자(들)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품행제로>에는 어머니만 있다. 그리고 그 어머니는 다른 두 영화에서의 아버지들과는 달리 지극히 평범하다. 그건 이 영화가 세상과 맞서는 대신, 세상을 끌어안거나 세상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기 때문이다.

세 영화 중 <품행제로>의 민희만이 ‘평범한’ 여학생이다. 다른 두 영화와 달리 <품행제로>의 애정구도에선 남자가 중심이 된다. 중필을 둘러싸고 나영(공효진)과 민희가 신경전을 벌이는 구도가 말하는 것은 명백하다. 남성 화자가 이끄는 영화에서 남자가 삼각관계 중심이 된다는 것은 러브 스토리의 절대적 비중을 의미한다. 다른 두 ‘남성영화’와는 달리 여기선 여자 때문에 남자들끼리 맞서는 설정이 없다.

5. 향수 - 천국의 동경은 지옥의 불길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셋을 비교하면서 내게 가장 흥미로운 것은 <말죽거리 잔혹사>가 다른 두편의 영화와 달리 이율배반적이고 자기 모순이 있는 작품이라는 점이다. 어린 시절 네 친구들이 바닷가에서 “조오련이 빠른지, 거북이가 빠른지” 즐겁게 논쟁하는 장면을 엔딩으로 삼을 정도로 지나간 과거를 ‘완벽했던 황금시대’로 여기는 <친구>는 초지일관 과거를 그리움으로 그리는 작품이고, <품행제로>는 과거에 명확히 떠나보낸 뒤 즐겁고도 느긋하게 ‘옛날얘기’를 들려주는 영화다. 하지만 <말죽거리 잔혹사>는 과거를 거세게 부정하면서도 거기서 뛰쳐나오기를 거절하는 이상한 영화다.

이 영화 속 지옥 같은 학교생활 속에는 기이하게도 회귀본능에 가까운 짙은 향수가 담겨 있다. 폭력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다. 이 영화의 ‘머리’는 폭력에 비판적이지만, ‘가슴’은 ‘수컷다움’에 강렬한 매혹을 느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사는 “대한민국 학교 좆까라 그래”라는 현수의 고함이겠지만, 그가 싸움을 앞둔 채 거울을 보며 “너 지금 나한테 뭐라고 그랬냐? 한판 뛸까”라고 싸움걸기를 연습하는 대사도 못잖게 중요하다. 세상에 제대로 싸움을 걸지 못했던 평범한 사람의 억눌린 내면은 장렬한 클라이맥스 액션 속에서 그 내밀한 욕망을 발산한다.

그런데 사실 이율배반은 우리 모두의 ‘입체적 판타지’의 정체다. 우린 천국의 나날을 동경하면서도 불현듯 지옥의 불길도 궁금해한다. 구름 위에서 세상 모두를 품는 영화(榮華)를 바라면서도 모두에게서 처절하게 버려지는 밑바닥도 은밀히 꿈꾼다. 판타지는 종종 피학적이다. 어떤 종류의 판타지를 완성하기 위해선 사랑의 배반과 우정의 실종 그리고 압도적인 세상의 무게가 반드시 필요하다. 가장 참혹한 과거를 그리는 <말죽거리 잔혹사>가 과거에 대해 제일 애착을 느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친구>는 과거를 이상화한다. <품행제로>는 과거를 관조한다. 그리고 <말죽거리 잔혹사>는 한손으로 과거를 밀쳐내면서 다른 손으로는 끌어당긴다. 영화는 결국 관객의 판타지를 겨냥한다. 관객은 스크린에 펼쳐진 ‘공적 판타지’ 중에서 자신과 맞는 부분을 ‘사적 판타지’로 받아들인다. <친구>는 완결된 형태로 존재하는 안전한 신화적 영웅담이고, <말죽거리 잔혹사>는 카타르시스와 현재적 부담을 동시에 안기는 장렬한 패배의 연대기이며, <품행제로>는 과거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추억의 에피소드 모음집이다. 세 영화의 흥행 양상 차이는 부분적으로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편 중 어떤 것을 가장 매력적으로 느끼느냐 하는 것은 당신이 어떤 과거를 지나왔느냐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지금’ 당신이 건너온 과거를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에 달렸다. 현재는 경험하는 순간 휘발되어버리고, 미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시간은, 어차피 과거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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