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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3] - 정한석

어쩌다 우리는 이 지경이 되었을까

90년대 이후 한국 남성 멜로드라마의 궤적

정한석/ mapping@hani.co.kr

주인공들은 모두 이렇게 탄식하는 듯하다. ‘어쩌다 우리는 이 지경이 되었을까.’ 이 상상 가능한 회한의 문장이 노스탤지어로 홀려들어가는 한국 ‘남성 멜로드라마’- 린다 윌리엄스는 고통받는 희생자의 미덕에 연민을 느끼도록 초대하고, 순수의 회복과 상연이 이루어지는 면을 멜로드라마적인 특징으로 소개한다. 한편, 줄리안 스트링어는 남성 멜로드라마의 특징을 고통받으면서도, 행하는 남성 주체의 서사로 설명한다. 어쨌거나 이 용어는 여기에 빚지고 있다- 의 서사화를 매듭짓는 처음과 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시에, <말죽거리 잔혹사>가 갑자기 세상에 나온 영화가 아니라고도 여긴다. 이 한편의 영화를 이리저리 뜯어보는 것보다 그것이 놓여 있는 자리가 지금 어디인지 찾아 헤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 시작은 바로 ‘한국적 누아르’이다.

순수에의 강박 - ’한국적 누아르’

<게임의 법칙>(1994, 장현수)이 나온 직후 비평담론은 이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한국적 누아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한국적 누아르’는 실체가 아니라 언제나 위험천만한 명명의 역할을 떠맡고 있는 비평담론의 호명에 의해 만들어진 자리이다. 물론 더 많은 영화가 있지만, 특별히 <초록물고기>와 <킬리만자로>가 그뒤를 잇는다. 이 영화들이 일면 남성 멜로드라마라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에 소홀했던 이유는 우선 ‘액션’에 대한 과장된 오해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보아도 액션은 하등 중요한 요소가 아니며, 있다고 해도 정서적인 동력일 뿐 동적인 쾌감을 만들어내는 수준은 되지 못한다. 더욱이 액션-이미지와 누아르는 아무런 근친도 없다. 실제로 그 영화들 속에서 더욱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것은 남자주인공들을 둘러싼 멜로드라마적 파토스이다. 이 점이 깡패로 캐릭터화된 거친 남자들에 의해 어둡게 표출되었기 때문에 갱스터에 빚지고, 누아르라 불린 것이라고 생각된다. 남성 멜로드라마와 누아르가 치환될 수 있었다면 그건 다름 아닌 ‘비극성’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한 가지의 회복을 품고 있는데 그것은 ‘순수에의 강박’에서 비롯된다. 조직 내에서 이용당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는 <게임의 법칙>의 무식쟁이 용대는 영환이라는 영악하고 비열한 캐릭터와 대조되면서 그 무식함에조차 순수함의 상태를 거느리고 다닌다. 순수에의 본질을 끝까지 저버리지 못하는 <초록물고기>의 막동에게 돌아오는 것은 야비한 배태곤이 내리는 죽음의 칼날이다. <킬리만자로>의 부패 경찰 해식은 죽은 쌍둥이 동생 해철로 오해받으면서 오히려 순수한 자로 환골탈태하여 설원에서 죽어간다. 여기서 남성 멜로드라마 주인공들은 순수를 회복하기 위해 고투하다 끝내 이르고야 마는 파멸과 죽음이라는 내러티브 귀결을 통해 통상의 고통받는 여성 멜로드라마 주인공의 자리를 대체한다. 순수에의 회복은 언제나 정점에서 실패한다. 바꿔 말해서 썩을 대로 썩어야 순수로 승화한다. 인물들은 모두 죽어버리거나 내쳐진다. 이미 이루어졌지만 미루어진 것처럼 보여진다고 말할 수도 있다. 때문에 그 갈망은 더 강렬해진다. 이쯤에서 노스탤지어가 발동한다.

향수의 공간으로 직접 뛰어들다 - <친구>

이 말을 향수로 바꿔 불러보자. 그러니까, 선택적인 기억으로 완성되는 향수의 힘에 기대어 아름다운 과거를 돌이키는 문장, ‘그래도 그때가 참 좋았어’는 일면 남성 멜로드라마의 서사 안에서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와 같은 말이다. 지금 현재의 내러티브가 실패하였기에 추억은 아름다운 과거만을 길어올린다. 그 점을 <게임의 법칙> <초록물고기> <킬리만자로>는 각각 ‘다시 돌아가고 싶은 어떤 곳’으로 상정하면서 ‘공간화’한다. 시차를 두고 만들어졌지만 영화 <파이란>의 주인공 강재의 이야기는 이 수순과 특징을 고스란히 반복한다.

대신 <친구>는 이전의 한국적 누아르가 상징으로만 두었던 향수어린 공간으로 몸소 뛰어들어간다(이 영화를 설명했던 말 중 하나는 ‘노스탤지어 누아르’이다). 그곳은 주인공들이 고통받고 배반하면서 죽어 가는 비극의 무대이자, 끊임없이 추억으로 낭만을 재조직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사진첩이다. <친구>는 저 먼 공간으로 비유되었던 향수를 시간의 축으로 새로 세우면서 집단의 기억을 환기시키고 데자뷔를 일으킨다. 내가 직접 겪지 않은, 그러나 집단의 기억으로는 가능한 가상경험의 추억이 생겨난다(여기에 대한 가장 안타까운 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성공적인 예로 오인받은 영화는 <박하사탕>이다. 대표성을 지닌 인간의 삶에 시대의 기억을 육화함으로써 그의 순수와 타락을 시대의 순수와 타락으로 고착화해버린 오류).

<친구>

어릴 적 네 친구들의 관계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위험해진다. 동수와 준석의 관계가 그렇다. 그러나 여기에는 평범한 친구 상택이 있다. 쉼없이 개입하는 상택의 보이스 오버는 갈등으로 치닫는 동수와 준석의 관계에, 그 위험한 관계를 보고 있는 우리에게 순수했던 어린 시절이 있었음을 상기시키려 한다. 어떻게 기능한다기보다 단지 깡패가 되지 않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상택은 과거의 순수를 껴안을 수 있는 캐릭터가 된다. 이 영화를 남성 멜로드라마의 틀로 엿볼 수 있는 이유는 시간성 자체를 순수에의 강박으로 꿰매놓는 고통받고 있으나 회복의지로 충만한 도덕적 가능태의 열의 때문이다. 결국 둘 중 하나가 죽고, 그 하나는 감옥에 갇혀 평생을 지내도 이상하게 <친구>는 공고한 결론을 이끈다. <친구>가 지닌 그 처연한 ‘비극성’은 시쳇말처럼 남성연대의 신화를 강화한다. 역설적으로 텍스트의 자기 선택적 파멸의 내러티브가 신화성을 공고히 하게 되는 것이다. 당연히도 이 비극성이 <친구>에서 멈추는 순간 누아르라는 수식도 사라진다.

비극성이 사라진 멜로드라마적 파토스 - <말죽거리 잔혹사>

<말죽거리 잔혹사>는 또 다른 남자친구들의 향수이지만, 그 비극성을 배제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파멸함으로써 순수해지는 것, 비극성은 거기서 온다. 그러나 <말죽거리 잔혹사>의 현수는 처음부터 순수하다. 순수에의 강박에 시달리기보다 그것을 버리라는 요구에 시달린다. 그러므로 옥상에 올라간 현수는 싸움에서는 승리한 것이 되지만, 자신이 지키고자 한 것을 잃어버림으로써 패배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영화가 주장하는 혹은 감독이 풀어주는 해석의 통로이다. 이를 그대로 따르면 옥상의 결투신은 폭력적인 남성성 속에 내재되어 있는 여성성이 그 사회의 구속 안에서 어떻게 버림받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이해될 것이다.

그러나, 현수는 처음부터 이소룡을 사랑했다. 단단한 몸과 표정에서 배어나오는 비장미를 사랑했다. 그의 멜로드라마적 파토스는 몸에 대한 순수를 폭발할 때 실현된다. 그뿐만 아니라 우식도, 햄버거도 이소룡이 되고 싶어한다. 그 무도의 길은 학교와 상관없이 처음부터 그들의 것이었으니 이제 옥상의 결투는 그 폭력에의 유혹이 드디어 실현된 것인가라고 보아야 한다. 실상 이 장면의 골자는 남성성의 판타지는 어떻게 잠시 승리로 상연되었다가 다시 실패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영화가 첫신을 이루는 것은 그런 점에서 일종의 약속이다. 쌍절곤은 언젠가는 휘두르게 되어 있었다. 영화의 갈등은 남성과 여성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의 길에 놓여 있는 이성과 본능, 꿈과 실현 사이에 있는 것이다. <말죽거리 잔혹사>의 현수는 모든 구경꾼인 ‘상택’의 판타지를 단숨에 이루어내고야 마는 것이다(옥상장면만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는 이 신이 <말죽거리 잔혹사>의 원형적인 장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폭력적인 아버지와 폭압적인 세상이 끈을 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수의 아버지가 태권도 사범이어야 하는 이유는 옥상에서 현수가 벌이는 놀라운 무술신경을 뒷받침할 수 있는 전제로서의 역할이 더 크다).

결국 <말죽거리 잔혹사>는 한국적 누아르가 역설적으로 염원했던 패배함으로써 얻어지는 순수에의 의지를 판타지의 형식을 빌려 잠시 뒤집어보는 형국이 된다. 그러나 <친구>가 갖고 있는 매혹적인 비극성과 달리 <말죽거리 잔혹사>는 치명적이지 않기 때문에 위험하지 않은 영화가 되었다. 이 영화가 유신시대를 알레고리화한다는 해석의 여지는 전이된 폭력으로 괴물이 된 현수의 모습이 연장됐을 때에만 가능하다. 아무래도 그 모습은 너무 짧다.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는 서사화를 선택함으로써 <말죽거리 잔혹사>는 오히려 소사로 만족한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어쩌다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 아주 조그맣게 묻는다. 이제는 누구도 한국적 누아르와 향수를 같은 입으로 말하지 않는다. 비극없는 소사만이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현재 우리의 비극이기도 하다.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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