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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4] - 심영섭
심영섭(평론가) 2004-02-20

낮은 목소리로 울리는 남성들의 나르시시즘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들의 강박관념을 보다

심영섭/ 영화평론가 chinablue9@hanmail.net

상담을 하다보면 가끔 내담자의 목소리가 아주 졸아붙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큰 목소리로 상담자에게 대들고, 화를 내다가도 대개는 자신의 맨 밑바닥에 숨겨진 뜨거운 용암 한줌을 맨손으로 꺼내는 순간 발생하는 불가해한 고해성사의 저음현상. 이때 내뱉은 몇 마디에는 자신의 문제에 대한 통찰을 담은 짧은 이해나 진정성을 곁들인 자기 고백이 불쑥 손을 내밀게 마련이다.

1970년대 후반기부터 80년대 초반기의 학생 문화를 담은 <친구>와 <말죽거리 잔혹사>를 다시 보면서 나는 어떤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그런 순간을 맞닥뜨릴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건 권상우가 쌍절곤으로 ‘대한민국 학교 다 X까라 그래’라고 일갈한 사자후라든가 <친구>에서 장동건이 권상우와 똑같이 곤봉으로 학교 창문을 다 깨버린 뒤 ‘길거리에서 나 만나도 다시는 아는 척 하지 마쇼’라며 도끼눈을 뜰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학교 짱이라던 <친구>의 유오성이 <말죽거리 잔혹사>의 이정진이 아주 조그맣게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한마디 말, ‘쪽팔려서 그래’란 그 말이 내 귀에는 더 크게 들렸다.

‘쪽팔리지 않는 수컷’을 향한 열망

‘쪽팔려서 그래.’ 그 순간 나는, <친구>부터 <품행제로>와 <클래식>을 거쳐 <말죽거리 잔혹사>에 이르기까지 80년대 학교 문화를 다룬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들이 한결같이 사실은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그 어두운 시절을 절절한 그리움으로 반추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386 남자들이 원죄처럼 짊어진 ‘집단적 수치감’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누구나 권상우처럼 ‘대한민국 학교 다 X까라 그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어쩌면 그건 ‘대한민국 있는 놈들 다 X까라 그래’라는 일성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남성 판타지 안의 메아리이고 공상 수준의 판타지이다. 수치감은 대한민국 사회가 70년대, 80년대 남성들에게 부여한 자기 생존과 자기 기만의 대표적인 게릴라 전법이기도 했다. <친구>와 <말죽거리 잔혹사> <품행제로>에는 유난히 구타장면 그것도 주인공들이 학교 선생에게서 뺨을 맞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그들은 계속 얼굴을 훼손당하고 수난당하는데, 선생들은 숨기고 싶은 아버지의 직업을 들추어내거나 너희들은 학생이 아니라 깡패새끼라며, 상대방의 약점을 들추어내 아이들을 복종시키려 한다. 강제적으로 수치감을 갖게 함으로써 전체를 복종시키는 이 70년대 군사문화의 잔재는 영화 <실미도>에서 비단 얼굴뿐 아니라 남성들 몸 전체에 대한 가학적인 고문으로 극대화되면서 남성 관객의 심장도 함께 지진다. 그들 386들은 아직도 그 상처를 몸으로 기억하고, 몸으로 돌파하려들고, 몸에 매어 달리는 것이다. 70년대 나온 <바보들의 행진>부터 70년대를 다룬 <친구>까지 청춘영화에 반드시 질주하는 아이들의 이미지가 경쾌하게 끼어들지만 그들의 질주도 잠시, 이어지는 것은 ‘얼굴의 수난사’를 ‘몸의 단련사’로 돌파하려는 남성들의 땀에 젖은 맨몸들이다.

그것은 왜곡된 응시의 욕망이다. 분명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투명하게 그 시절을 본다고 주장하는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는 그러나 비슷한 경로로 자기 모순으로 가득 찬 오욕의 세계에서 남성 영웅의 안전한 세계로 안간힘을 쓰며 닻을 내린다. 그때 이소룡은 신이요 그들 욕망의 아이콘이요 70년대의 입구로 통하는 은밀한 모스 부호 같은 것이다. <품행제로>의 중삘이 류승범이도, <친구>의 유오성도 <말죽거리 잔혹사>의 권상우나 이정진도 모두 완전한 남성 신화의 신기루 속에서 ‘쪽팔리지 않는 수컷’, 무패 신화의 짱이 되고 싶어하지만, 막상 그들은 자신의 선생들처럼 자신의 하수에게 먼저 반칙의 게임을 훈수하는 도덕적 오점을 남긴다. ‘용서하거나 반쯤은 죽여서 병신으로 만들라는 둥’, ‘먼저 선팅을 날리라는 둥’. 동료의 훈수꾼이자 가해자가 된 그들은 한결같이 비슷한 강박관념에 빠진다. 완벽한 수컷이 되기 위해 맨주먹을 휘둘러야 한다고. 하나도 아닌 두개의 남근, 쌍절곤이 필요하다고.

<말죽거리 잔혹사>

그래서 <친구>와 <말죽거리 잔혹사>는 끝끝내 1인칭 내레이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스스로가 판 시대의 함정에 기꺼이 뛰어들면서 정서적으로 기진맥진한 뒤에야 영화를 끝낼 수 있게 된다. 감독인지 주인공인지 모를 이들 모범생 화자들은 한결같이 스스로에 대한 나르시시즘과 연민을 가지고 자신이 진심으로 비판하는 이데올로기를 70년대의 폭압적인 마초 문화를 또한 가슴 깊이 사랑하고 있는 듯한 모순의 지점으로 돌진한다. 그것이 바로 나르시시즘의 본질이 아니겠는가. 자신에 대한 매혹의 뒷면에 숨은 자학과 우울이 동시에 공존하는 검은 늪이. 그런 점은 비단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뿐 아니라 <실미도>와 <태극기 휘날리며> 같은 근대사를 다룬 남성 감독의 영화들이 한결같이 빠져드는 블랙홀의 입구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슬픈 것이다. 한결같이 슬픈 것이다. <실미도>의 훈련병들과 기간병들이 서로에게 총을 겨눈 것이, <친구>에서 유오성이 장동건을 죽인 것이,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형과 아우가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자신들 안에 있었던 피끓는 정의감이 그저 내파한 상태로 어제의 동지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상황이. 한국형 남성 멜로라 불러도 좋을 이러한 현상의 단초 안에는 죄 많은 군사 문화의 뿌리를 치받지 못했던 남성들의 울분이 수치감이 서로에게 겨누어졌던 애상함의 기억으로 치환되어 남성 영웅의 몸을 빌려 재현된다. 마지막 결투의 비장함으로 포장된 채.

치환된 기억, 고정된 여성

다시 한번 기억은 치환되고 여자들은 고정된다.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에서 여자란 그저 여자이다. 누구나 가지고 싶어하는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정복욕과 순정어린 헌신 사이의 갈등은 남성들의 쪽팔림을 녹여낼 수 있는 또 하나의 면죄부가 된다. 그것은 자신의 동료가 아닌 자기 안에 내재해 있는 싸움처럼 보인다. 남자들은 이제 생애 처음 암컷이라는 매혹적인 타자를 만나 서로 다른 액션을 선택해야 한다. 기타 즉 커다란 자궁을 옆에 낀 채 좀더 여성화된 혹은 거세된 남성으로 여학생들의 좋은 친구로 남거나, 여학생들의 치맛자락을 떨치고 더 센 척하면서 남성 영웅의 길로 들어서야 하는 것이다. 남성 감독들은 한목소리로 속삭인다. 그 길이 더 쉽게 여자를 얻는 길이라고. 어찌어찌해도 여자 아이들은 결국 마초들이 풍기는 테스토스테론(남성 호르몬)의 냄새를 쫓아오게 되어 있다고. 아주 재미없게도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는 여자 이야기만 나오면, 똑같은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똑같은 여자아이들과 똑같은 스케이트장을 빙빙 돌아다니는 풍경을 연출한다. 그것은 무수한 도식의 그물망이다. 한 예로 <품행제로>와 <말죽거리 잔혹사>의 남자아이들은 똑같이 털털거리는 고물 버스에서 여학생들에게 반하고, 그들에게 반한 남자아이들은 똑같이 기타를 치며 음악으로 구애한다. 이들은 어디 갈 곳이 없으므로 꼭 빵집에서 고고장에서 데이트를 하고 여학생들은 마초에 목을 맨 지지리도 생각없는 애들인지 꼭 주먹 쓰고 욕을 해대는 학교 짱한테 넘어간다.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에서 기실 연애와 성은 엄격히 분리되어 서로를 넘보지 못한다. 거의 모든 영화에서 남학생들은 빨간 잡지를 팔거나 사보며 성적 호기심을 불태우지만, 이 단 한명의 얼굴 짱인 여자 계집애에게는 모든 것이 예외이다. 성적 구애와 결합의 과정은 고의적으로 생략되어 있거나 누락되어 있다. 환난으로 가득한 남성 세계에서 한줌 남아 있는 순결성을 기꺼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여자에게 바치고 싶어하는 주인공의 판타지 역시 <진짜 진짜 잊지마> 같은 하이틴영화 이후 유구한 청춘영화의 유산이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당시 여학생들의 우상, 들장미 소녀를 보고 자라난 소녀들의 우상인 테리우스 같은 소년들이 고작해야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에서는 주먹 짱의 똘마니로 나온다는 사실은 많은 여성 관객을 슬프게 한다. 그리하여 <말죽거리 잔혹사>는 특이하게도 그러한 문제점을, 여성 관객과 남성 관객의 동상이몽을, 권상우라는 배우로 한방에 해결하려 든다. 테리우스의 얼굴과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몸을 가진 이 이형접합의 배우는 여자의 이상과 남자의 이상을 번갈아 충족시켜주며, 청춘의 영화의 신전에 맨 처음 자신의 이름을 등록시킬 가능성을 내비치었다(연민과 보호 본능 그러면서도 강인함과 육체의 아름다움을 함께 가진 이 배우가 한국 영화계의 제임스 딘이 되는 날은 시간문제인지도 모른다).

남자들아, 뒤돌아보지 말라

<품행제로>

결국 노스탤지어란 상실이라는 감정의 먹먹함을 과거라는 그물망 속에 투사하는 행위이다. 우리는 무엇을 상실했나, 그리하여 무엇을 은폐하는가. 결국 90년대 나타난 일단의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들은 남성들의 집단적 히스테리 기제와 최면술로 남성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심지어 <친구>나 <클래식>처럼 80년 이후의 부산 혹은 베트남 전쟁을 다룰지라도 이들 영화들은 80년대의 장선우, 박광수, 이창동이 성취해놓았던 사회적 맥락과 리얼리즘을 암암리에 누락시켜나간다. 그것은 ‘빽판’과 빨간 잡지와 소독차와 서금옥과 곰보빵 같은 디테일의 그물을 통해 모래처럼 빠져나가는 시간의 역사들이다. 그것은 여학생들과의 포크 댄스와 기타 교습과 나이키 신발 사이에서 솟아나는 쾌락의 위장술인 동시에 기억의 사기술이기도 하다. 감독이 공들여 창조한 시간에 대한 디테일은 관객의 기억과 가장 쉽고 빠른 방식으로 교환되고, 그러한 디테일의 공유를 통해 디테일은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진정성과 리얼리즘을 보장하는 훈장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최근의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들이 점점 더 그들의 기억의 범위를 학교 문을 나선 ‘그날 이후’가 아니라, 학교 안에서 멈추고 있다는 점이다. 그나마 <친구>는 자멸과 공멸의 공기 안에서 계급적 상승을 꿈꾸었던 깡패 영화와 노스탤지어 영화를 서툴게 이어붙였지만, 근자의 <말죽거리 잔혹사>에 이르면 남성들의 기억의 빗장은 교실 안으로 단단히 잠겨져 있다. 그럴수록 시간과 기억은 분리되고, 남성들의 몸을 응시하는 쾌락은 커져간다(그런데도 관객은 평단은 그들이 비로소 폭압의 70년대를 제대로 뒤돌아보기 시작했다고 이야기한다). 과연 금기는 깨진 것인가? 학교 제도 교육의 폭력성과 이 사회에 만연하는 폭력성은 서로가 한몸이 되어 우리가 지나온 삶에 대한 어떤 통찰을 주는 것인가?

그러나 바로 그 남자아이들의 주먹질 사이로, 서로를 겨누는 총부리에 한없이 슬퍼하는 눈물 사이로, 우리는 전태일이 청계천에서 분신한 70년대를 까먹고 박종철이 물고문으로 죽어간 80년대를 까먹는다. 우리가 그 시절, 누군가에게 또한 가해자였으며 착취자였으며 8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사실은 아주 오랫동안 침묵했음을 잊어먹어간다. 그리하여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뒤돌아보는 ‘척의 제스처’는 명백한 퇴행이다. 그것은 청춘의 송가로 포장한 군사 문화가 우리에게 발톱 끝 하나의 세포까지 침윤시켰던 집단적 수치감에서 탈출하는 ‘집단적 엑소더스’이다.

그러니 뒤돌아보지 마라. 다시는 뒤돌아보지 마라. 인간으로 살아남으라. 그대의 욱신거리는 가슴을 단 한치도 노스탤지어라는 사이렌의 여신에게 빼내주지 말라. 다시 한번만 뒤돌아본다면 단 한번만이라도 그 사이렌의 소리를 듣는다면,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갈 수 없으리. 남성 히스테리의 신전에 바쳐진 소금기둥이 되리라. 다시는 등뒤에 달린 척추의 뼈로 우뚝 서 있는 날짐승이 될 수 없으리라.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1]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2] - 이동진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3] - 정한석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4] - 심영섭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5] - 유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