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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5] - 유운성

과거와 추억에 대한 반복되는 오해

거짓 기억과 거짓 치유

유운성/ 영화평론가 akeldama@netian.com

최근의 한국영화가 역사와 기억, 혹은 노스탤지어의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하는 건 벌써부터 진부하게 들린다. 아니, 그게 얼마나 되었다고? 게다가 이를 주제로 삼은 비평적 분석들도 이미 꽤 되는 것 같다. 이런 글들은 대부분 동시대의 과거지향적 한국영화들에 나타난 미숙하고 퇴행적인 징후들을 지적한다. 동시대 한국영화들이 어떤 식으로든 과거재현의 문제에 매달리고 있으며 스크린은 점점 그 재현된 과거와 대중의 욕망이 한데 만나 얽히고 융합되고 때로는 충돌하는 경합의 장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뿐인가? 영화적으로 재현된 과거와 대중의 욕망이 뒤섞이는 저 스크린은 과거의 영화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절대적이고 숭고한 만신전이 아니다. 매끈한 육체를 지닌 스타급 남자배우들의 육체가 단련되기도 하고 상처입기도 함으로써 매혹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선사하는 이 스크린, 그곳을 지배하는 것은 오직 표면에만 천착하는 텔레비주얼한 이미지 혹은 비디오-이미지들이다. 역시 진부한 이야기다.

플래시백? 플라시보!

그러니 잠시나마 좀더 근본적인 질문으로 되돌아가보자. 영화가 과거를 재현한다고 말할 때 정확히 우리는 어떤 과거를 지칭하는 것일까? 물론 (고전적인 개념의) 영화를 통해 재현되는 것은, 실시간 스크린(real-time screen)에서 떠오르는 텔레비주얼한 이미지가 아닌 이상 모두가 과거의 이미지들이다. 우리는 지금 상대적으로 그보다는 좀더 먼 과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역사로서의 과거? 기억으로서의 과거? 공적역사와 사적기억의 대립을 설정하고 나면 논의는 쉬워진다. 영화 속에 재현된 다양한 발화주체들의 사적기억을 보듬어 안으면서 공적역사의 균열을 섬세하게 탐색하는 영화는 당연히 상찬된다. 하지만 영화 속에서 몇몇 목소리들의 억압을 감행했다는 사실이 감지되거나(<말죽거리 잔혹사>), 지나치게 사적기억에 밀착하면서 역사를 탈색시켰다는 혐의가 발견될 때(<친구>) 그것은 사유의 천박함의 증거가 된다.

여기서 문제제기하고 싶은 것은 동시대 과거지향적 한국영화들이 어떤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면, 그것은 공적역사와 사적기억의 조율의 실패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과거의 다양한 범주들을 그 고유의 자리에서 이탈시켜 어울리지 않는 문맥 속에 가져다두는 데서 그 한계의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혹은 이 영화들이 불러들이는 과거와 대중의 기억, 그리고 개개인의 추억 사이에서 벌어지는 오해가 지루하게 반복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영화적 사회’에서 영화들이 불러일으키는 플래시백 효과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할 때이다. 혹시 그것은 우리를 오도하는 환상을 구태여 추억이라고 부르면서 과거의 상처, 죄의식, 그리고 부채감을 떨쳐내기 위한 거짓된 몸짓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때 플래시백 효과란 결국 플라시보 효과(placebo effect)- 아무런 약효도 없는 가짜 약을 진짜 약인 것처럼 속여 환자에게 복용시켰을 때 환자의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을 일컬음. 위약효과라고도 한다- 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거짓 기억의 영화들

우선 과거의 다양한 범주들을 좀더 공적인 것에서부터 사적인 것의 순으로 나열해보자. 일단 단선적이고 인과관계에 따라 기술되는 공식적인 역사가 있다. 다음은 비록 공식적으로 사료화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대중의 뇌리에 잠재적으로 각인되어 있는 비인칭적(impersonal) 기억이 있다. 이 기억은 종종 불균질적이고 다수적인 것들의 공존으로 특징지어지는데- 따라서 다중(多衆·multitude)의 기억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과거지향적 한국영화들은 어떤 식으로든 대중의 이러한 비인칭적 기억을 자극하고자 한다. 이보다 더 사적인 것에 속하는 과거는 개개인들이 지니고 있는 사적인 역사들로 미시사적 연구의 대상이 될 법한 것들이다. 마지막 범주는 역사나 기억이라기보다는 추억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단편적이고 조직화되어 있지 않지만 강력한 반짝임 같은 것으로 남아 있는 극히 개인적인 과거의 이미지들 말이다. 추억 앞에서 재현은 무력해진다. 혹은 추억은 재현의 강요와는 무관하게 자신만의 과거를 불러들인다.

좀더 관심을 좁혀 <친구> <해적, 디스코왕 되다> <품행제로> 그리고 <말죽거리 잔혹사>에 이르는 이른바 ‘노스탤지어 영화’들에 관해 말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위의 목록에 과거의 범주 한 가지를 더 추가해야 한다. 사실 노스탤지어라는 말은 이 영화들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하기에는 다소간 부적절한 용어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이 과연 우리의 반짝이는 추억을 붙드는 영화들이란 말인가? 날카로운 반짝임을 무디게 하고 남은 것은 무용담이다. 날카로움이 사라진 자리가 크면 클수록 ‘사나이’들의 몸짓은 더더욱 격한 것이 되어갈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멋들어지게 춤추고, 부수고, 찢고, 베고 해봐야 사라진 추억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사실상 이런 영화들은 ‘○○○세대에 바쳐진 영화’가 아니라 추억이 없는 세대에 바쳐진 영화들이다. 개개인의 수많은 추억들은 단조로운 거짓 기억 앞에서 제물이 된다. 그런데도 그 영화들을 통해 재현된 과거는 여하간 추억이라 불린다.

차라리 우리는 이들 영화를 ‘거짓 기억(false memory)의 영화’들이라 불러야 할 것이다. 디테일은 사라진다. 더 정확하게는 이러한 재현으로부터 우리가 바르트적인 푼크툼(punctum)을 발견할 가능성은 사라진다. 대신 얼른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환유적 대상들- 교련시간, 복장검사, 폭력적인 교사들, 패싸움, 디스코 그리고 이소룡 기타 등등- 이 우리 눈으로 불쑥 침범해 들어온다. 문제는 우리가 이 환유적 대상이 범람하는 것을 흔히 디테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속임수를 알아차리기도 전에 숏은 바뀌고 인물들은 날뛴다. 인물들은 점점 멜로드라마의 세계로 진입해 들어가기 시작하고, 환유적 대상들은 과장되고 변형되어 고달프고 억압적이었던 시대를 뜻하는 거대한 상징물이 된다. 또한 실재했던 환유적 대상들을 요소로 취하는 허구적 관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이들 영화의 재현은 우리가 차마 마주하길 두려워하는 과거를 대신하는 거짓 기억으로 전환된다. 우리는 과거와 대면하는 대신 상상적으로 이 대상들만을 처리하면 된다.

트라우마 내세우기

여기까지의 논의를 통해 짐작했겠지만, 추억을 가장한 거짓 기억은 어느새 비인칭적인 대중의 기억에까지 스며들기 시작한다. 때로 그것은 실재했던 환유적 대상들을 요소로 취하는 허구적 관계들을 향한 허구적 저항을 ‘억압적이었던 과거’를 향한 발언으로 내세우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교련복은 벗어던질 수 있어도 기억에 문신처럼 새겨진, 의식의 약한 틈을 뚫고 끝없이 반복해서 빠져나오는 외상(trauma)은 결코 지워버릴 수 없는 법이다. 혹은 <해적, 디스코왕 되다>에서처럼 의도적으로 공식적 역사나 대중적 기억에 대한 거리두기의 전략이 취해지기도 하지만, 이건 자신도 모르게 그 시기를 지나쳐오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가 스스로의 당혹스러움- 그 시기를 지나쳐온 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죄의식, 부채감, 상실의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당혹감. 혹은 아무런 외상도 없다는 데서 생기는 허구적인 외상- 을 감추기 위해 휘감은 가장(假裝)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우리에게 각인된 외상의 기원이 무엇인가를 물어보기 위해 과거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 영화가 외상에 역사성을 부여하려 하면 할수록 그건 점점 더 기이한 방향으로 치닫게 된다. 이때 우리는 사실은 존재하지도 않는 기원을 어떻게든 만들어내야 하고 일부러라도 스스로에게 상처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이른바 ‘노스탤지어 영화’들이 흔히들 생각하듯 탈역사적, 반역사적, 혹은 무역사적 태도를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 어떤 영화들보다도 더더욱 외상을 내세우고 그 기원에 집착함으로써 지나치게 역사적이고자 하기 때문에 한계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 말이다. 여기서 ‘노스탤지어 영화’들은 <살인의 추억>이나 <실미도> 같은 ‘역사실화극’들과도 만난다. ‘추억으로서의 영화’는 아직껏 없었던 대신 추억과는 다른 과거의 범주들을 어떻게든 추억으로 위장해 보여주려는 영화들만이 존재한다. 참으로 이상한 플래시백이다.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1]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2] - 이동진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3] - 정한석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4] - 심영섭

▶ 남성 노스탤지어 영화의 불안과 강박 [5] - 유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