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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신흥 영화강국, 타이 영화산업 현지취재 [3]

풍선이 터진 후를 주목하라

1997~2004 태국의 작가와 장르영화 개괄

퀘논지 니미부트르 감독의 <낭낙>과 지리 말리굴 감독의 <메콩강의 보름달 파티>(위부터).

1997년, 타이영화는 갑자기 부활하였다. 80년대 초반까지 한때 200여편에 달했던 연간 제작편수가 경제침체와 맞물려 10여편 내외로 추락한 것이 90년대 중반까지의 타이영화의 상황이었다. 말하자면, 90년대 중반 타이의 영화산업은 거의 붕괴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1997년 논지 니미부트르, 펜엑 라타나루앙, 옥사이드 팡이 한꺼번에 데뷔하면서 타이영화는 기적처럼 부활하기 시작하였다(놀랍게도 당시는 타이의 바트화가 폭락하여 외환위기가 절정으로 치닫던 시점이었다). 2001년, 논지 니미부트르의 <낭낙>은 이러한 부활의 조짐에 불을 질렀다. <낭낙>이 역대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우자 그동안 영화제작을 등한시했던 메이저 제작사들도 제작을 늘리기 시작하였고, 타 분야에서 제작자본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왔다. 펜엑 라타나루앙, 위시트 사사나티앙, 아핏차퐁 위라세타쿤은 해외의 주요 영화제에서 각광을 받았고, 옥사이드 팡은 해외세일즈 분야에서 성가를 떨쳤다. 그래서 타이영화의 활황세는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이 타이 영화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데, 불과 몇년이 지난 2004년 지금은 타이 영화인들 모두가 우려섞인 전망을 하고 있다. 80년대처럼 몰락하지는 않겠지만, 지금 타이영화는 거품이 가라앉으면서 구조조정 중이다. 지난해 개봉된 48편의 타이영화 중 5편만이 수익을 남겼고, 나머지는 대부분 참담한 실패를 맛보았다. 게다가 30편의 영화가 개봉을 못하고 올해로 개봉을 미뤘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과연 타이영화는 이대로 주저앉고 말 것인가? 지난 한해 동안 개봉된 타이영화와 올해 발표될 작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 대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장르영화의 나태한 자기복제

지난 몇년간 타이 장르영화는 끊임없는 자기복제와 잡종적 혼합화를 진행시켜왔다. 그리고, 이제 그 무국적화의 폐해가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최근 타이 장르영화는 공포영화와 시대극, 그리고 트랜스젠더영화에 집중되어 있다. 특히, 공포영화가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야말로 방콕은 피수스 프레셍·옥사이드 팡의 작품제목(<귀신들린 방콕>)처럼 온통 ‘귀신이 들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타이에서 개봉되는 한국영화조차도 <하얀 방> <폰> <장화, 홍련> 등과 같은 공포영화가 빠지지 않는다. 문제는 일정한 공식을 갖춘 이러한 공포영화들이 점차 관습화되고 나태해져가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타 장르영화와의 혼성변종화를 꾀하기도 하는데, 지난해 흥행작인 유틀럿 시파팍의 <부파라트리>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가 그로부터 버림받고 죽은 여인의 원한을 다룬 이 작품은 장르영화의 혼성뿐 아니라 수많은 다른 영화 속의 이미지를 차용하고 있다. 대학생인 부파는 부잣집 아들인 아케와 사랑에 빠진다. 장난처럼 시작했던 아케는 죄책감에 빠져 부파와 결혼하기로 하지만, 부모의 강권으로 런던으로 유학을 떠난다. 임신한 부파는 아케를 기다리다가 혼자 죽음을 맞는다. 여기까지는 전형적인 멜러드라마의 공식 그대로이다. 다음부터는 ‘공포’로 이어진다. 그녀가 세들어 있던 아파트의 주인과 이웃사람들이 원귀가 된 그녀를 보고 놀라고, 원귀를 퇴치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진다. 이 대목에서 장르공식의 혼성과 이미지 차용이 시도된다. 코미디와 할리우드 공포영화의 혼성모방이 그것이다. 그중에는 <엑소시스트>도 있다. 신부 역할은 타이의 최고 인기 코미디언이 맡고 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은 아케의 다리를 잘라 곁에 두는 부파의 모습으로 끝난다(제니퍼 린치의 1993년작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를 기억하시는가?). ‘원귀’는 타이의 공포영화가 가장 즐겨 다루는 소재이기는 하지만, 논지 니미부트르의 <낭낙>이 보여주었던 ‘진중함’은 이제 찾기가 힘들어진 것이다. 반디트 통디의 <태어나지 못한 아이>(2003), 피수스 프레셍·옥사이드 팡의 <귀신 들린 방콕>(2003), 체앙 소이의 <호러 핫라인-빅 헤드 몬스터>(2003) 등이 모두 그러했다. ‘영화공장’ 옥사이드 팡이 시나리오를 맡은 탐마락 카무타마노크의 <오멘>(2003) 역시 반전을 거듭하는 비교적 탄탄한 내러티브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팡의 영화가 늘 그랬듯이 여전히 홍콩영화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티순토른 비차이락의 <전주곡>포스터(왼쪽)과 현재 타이의 최고 흥행작 <보디가드>포스터(오른쪽).

타이의 공포영화가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타이사회를 반영하고 있다면, 그 반대의 경우가 시대극이다. 타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일깨우고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열망이 주로 시대극에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그 붐을 유발시킨 작품이 바로 타니트 지트나쿤의 <방라잔>(2001)과 차트리 찰레름 유콘의 <수리요타이>(2001)이다. 당시, 타이는 경제난으로 시민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그 와중에 외세의 침략을 물리친 역사적 사건과 영웅의 이야기를 담은 시대극이 나왔고, 관객은 곧바로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들 작품들은 경제난에 지친 타이인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위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2004년 지금에 이르기까지 시대극은 주요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타니트 지트나쿤은 시대극 전문 감독으로 입지를 굳혔다. <쿤판>(2002)에 이어 <세마, 아요다야의 전사>(2003)를 잇따라 발표한 것이다. 하지만, 희대의 살인마였다가 깨달음을 얻어 스님이 된 아힘사카의 일대기를 그린 수타페 툰니룻의 <앙굴리말라>(2003)가 지난해 검열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채 개봉돼 흥행에 실패하는 바람에 시대극 붐은 현재 주춤한 상태이다. 지금 한창 개봉 중인 이티순토른 비차이락의 <전주곡>(2004)은 음악을 통해 타이인의 정체성을 묻는 새로운 스타일의 작품이다. 19세기 말부터 태평양 전쟁 말기에 이르기까지 타이의 전통 실로폰 악기인 ‘라나드-엑’ 연주자 쏜의 일대기를 그린 이 작품은 쏜이 당대의 고수와 겨루면서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구축해가는 과정을 드라마틱하게 그려내고 있어 관객을 끌어들이는 힘이 강렬하다. 올해 가장 주목할 만한 타이영화로 손꼽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