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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이 몸부림칠 때> 촬영일지 [2]
2004-03-12

7월4일_ “역시… 고사부터 지낼걸 그랬지?”

첫 촬영날이다. 아침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다. 일기예보에 따르면 비 올 확률이 오전에는 40%, 오후에는 60%란다. 이게 무슨 뜻일까. 최기섭 제작부장의 해석에 따르면 비가 올 수도 있고 안 올 수도 있단 말이란다. 음… 그렇군. “비가 온다면 얼마나 온다는 얘기지?” 최 부장이 얼른 기상청에 전화를 걸어보더니 진지하게 대답한다. “그게… 아주 많이 올 수도 있고 전혀 안 올 수도 있다는데요.” “음… 그렇군.” 마치 부조리극의 대사 같다.

어쨌건 촬영은 시작되었다. 찬경(양택조)의 구멍가게에서 찬경 처(이주실)와 철수 엄마(홍정혜)가 썰렁한 수다를 떠는 장면이다. 첫 테이크에 NG가 난다. 이주실 선생의 사투리 억양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컷 소리가 나자마자 호호호 겸연쩍은 웃음을 날리더니 얼른 감춰둔 노트를 꺼내본다. 가만보니 낱낱이 억양과 강세를 표시해놓은 연습대본이다. 아하, 문제는 거기 있었다. 감각적으로 체화해야 할 걸 주입식으로 암기한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긴장하면 이도저도 아닌 이상한 억양이 나오곤 하는 것이다. 완벽한 사투리의 부담감 때문에 자신있고 자연스러운 연기가 방해받는다면 그건 치명적이다. “선생님, 사투리 그거 너무 잘하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그냥 편하게 해보세요. 오늘 첫날이니까 연습하듯이, 필름 팍팍 써가면서 찍어보죠 뭐. 잘하시잖아요, 헤헤헤….” 저쪽 구석에서 지켜보던 오기민 대표가 실실 웃는다. 오래지 않아 이 선생의 연기도 점점 편해지고, 촬영은 제법 속도가 붙는다. 와! 이수인, 이거 첫날부터 너무 잘하고 있는 거 아냐? 스스로 뿌듯해하면서 한껏 교만한 포즈로 담배 한 모금을 쪼옥 빤다.

그 순간, 후두두 빗방울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장대 같은 폭우가 쏟아진다. 사방이 온통 검뿌옇다. 장비에 비닐을 씌우고 조명기 전원을 뽑고 소품을 옮기고 한바탕 난리가 난다. 아, 이게 아닌데… 첫날부터 이러면 안 되는데… 망연자실, 내리는 비만 쳐다본다. 어느새 옆에 와 선 오 대표에게 넌지시 한마디 한다.

“역시… 고사부터 지낼걸 그랬지?” “… 그러게….”

8월5일_ “양택조 선생님, 그냥 밟으세요!”

촬영 시작 뒤 최고로 화창한 날이다. 오 마이 선샤인, 렛 더 선 샤인! 찬경이 오토바이 무면허 운전을 하다 교통경찰한테 붙잡히는 장면. 한창 휴가철인데다 모처럼 맑은 날씨. 아름다운 해변이 즐비한 남해는 온통 외지에서 들어온 차들로 북새통이다. 경찰의 협조 약속을 얻어놓긴 했지만 왠지 수월할 것 같지 않다. 일찌감치 도착한 양 선생은 운전연습에 여념이 없다. 그동안 연습을 많이 했다고 큰소리를 치시지만 왠지 불안해 보인다. 평소에 넉살 좋고 여유롭기만 한 양 선생, 진땀을 뻘뻘 흘리며 애써 태연한 척해보지만 속으로는 엄청 겁먹고 있는 게 틀림없다.

예정한 시간이 지났는데도 오기로 한 경찰 오토바이가 도착하지 않고 있다. 연락해본즉, 오는 도중에 오토바이가 고장났단다. 찍어야 할 분량은 만만치 않고, 양 선생은 오늘 찍고 올라가면 한동안 스케줄이 나오지 않는다. 버럭 조바심이 난다. 한 시간쯤 지나서야 수리를 마친 오토바이가 도착한다. 다행히 경찰 역을 맡은 친구는 오토바이를 탄 지 며칠이 안 됐는데도 금방 능숙하게 기계를 다룬다. 고마워서 안아주고 싶다. 동시녹음 팀의 애마인 낡은 에스페로의 옆 문짝을 뜯어서 카메라를 장착한다. 드디어 촬영이 시작된다. 옆에서는 카메라를 실은 차가 바짝 붙어 달리고, 뒤쪽에서는 경찰 오토바이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추격해오는 상황, 그런데 갑자기 맞은편에서 차 몇대가 나타난다. 제대로 통제가 안 되고 있는 모양이다. 느닷없이 나타난 차에 화들짝 놀란 양 선생이 비틀비틀 오토바이를 멈춘다. 또다시 NG. 오랜만에 나타난 태양은 왜 그리도 뜨거운지, 반나절도 안 돼 그 지겹던 비가 그리워진다. 언제 준비했는지 얼음물에 담근 녹색 수건이 일제히 지급된다. 머리에 얼음 수건을 두르고 그 위에 챙모자를 쓴 스탭들의 모습이 꼭 모로코 독립 전사 같다.

8월9일_ 주현 vs 박영규, 제2라운드!

촬영이 끝나고 저녁 겸 소주를 한잔 마신다. 송재호 장로님은 술을 멀리 하시고 양택조 선생은 간이 안 좋아 술을 끊었다. 술자리의 헤게모니는 자연히 주 선생과 박 선배가 장악한다. 목소리 큰 두 사람은 사사건건 의견이 맞지 않는다. 나는 때로 모른 체하거나 양다리 걸치는 박쥐 노릇을 한다. 중달, 중범 두 형제 각각의 캐릭터와 둘의 관계에 대해 논쟁이 시작된다. 주 선생은 자기가 명실상부한 주인공이며, 조연인 박영규는 너무 튀는 연기를 함으로써 주인공의 카리스마를 희석시키는 일을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 박 선배의 주장은, 이 영화는 주인공이 따로 있는 게 아니며 각자가 최대한 자기 역할을 돋보이기 위해 모든 재주를 동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간단하게 요약하면 ‘너 임마, 너무 튀지 마!’ vs ‘형, 나 너무 견제하지 마!’의 싸움이다. 좀 유치한 감이 없지 않지만 어쨌건 넘치는 의욕에서 비롯된 것이다. 원래 배우들은 노소를 막론하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은 어린애 같은 욕심이 있다. 그게 그들의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어쨌건 이런 논쟁조차도 고맙고 바람직한 현상이다. 나는 얍삽하게, 하지만 정당하게도 이렇게 말하면서 분위기 전환을 시도한다.

“두분 다 원하는 대로, 보여주고 싶은 거 다 펼쳐 보여주세요. 단, 조절은 제가 합지요. 헤헤… 원샷!” 박영규 선배, 얼른 술잔을 든다. “그래그래, 원샷!” 그리곤 한입에 소주를 털어넣는 주 선생한테 또 한마디 한다.

“형, 근데 술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냐? 배우가 말이야….”

8월14일_ “8초만 버텨주면 되는데!”

야간 촬영이다. 선보러 나갔다가 선은 안 보고 술에 잔뜩 취해 들어온 중범(박영규)이, 형 중달(주현)한테 맞장뜨다가 피터지게 얻어맞는 장면이다. 비 뿌리는 장비(강우기)를 설치하고, 몇 차례 강우 테스트를 해본다. 간단한 리허설이 뒤따른다. 분위기와 감정, 대략의 연기 구역과 동선만 설명하고 액션의 디테일은 연기자에게 맡기기로 한다. 우리 연기자들은 이런 스타일을 좋아한다. 감독이 시시콜콜 동작을 지시하고 챙기는 걸 썩 달가워하지 않는다. 오랜 경험과 감각을 믿는 것이다. 나도 그게 좋다. 다분히 즉흥적이고 돌발적인 상황에서 맞닥뜨려지는 생생하고 힘있는 감정의 충돌, 그게 근사한 거다. 드디어 슛. 촤아아 내리 퍼붓는 빗발이 짱이다.

순아(희경)의 부축을 받으며 문을 박차고 들어온 중범이 고래고래 소리치며 다가오자 마루에 앉았던 중달이 벌떡 내달려 중범의 뺨을 주먹으로 퍽 갈긴다. 중범이 그 자리에서 바로 고꾸라진다. 이거 장난이 아니다. 못 본 사람은 모르겠지만 주현 선생의 주먹은 무지하게 크다. 팔뚝은 꼭 참나무 등걸같이 굵고 단단하다. 그 팔뚝, 그 주먹으로 제대로 갈겼으니 박영규 선배의 아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첫 리딩 때부터 계속 티격거려온 두 사람이 아니던가. 누가 봐도 주 선생의 주먹에는 감정이 섞여 있다. 작정하고 팬 셈이다. 대충 때리는 폼만 잡겠거니 방심했던 박 선배로서는 통한의 일격을 당한 셈이다. 저러다 두 사람이 진짜로 싸우는 게 아닐까? 그러나 두 사람은 역시 프로다. 박 선배는 그 충격과 당혹감을 곧바로 캐릭터의 감정으로 만들어버린다. 주 선생 역시 팽팽한 리액션으로 맞받아친다. 빗속에서도 두 사람의 연기는 불꽃을 튕긴다. 모두들 입을 헤벌린 채 두 사람한테 완전히 빠져든다. 됐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때다. 일순 빗방울이 약해지는 느낌이 들더니 비가 뚝 그친다. 모두들 믿기지 않는다는 듯 강우기를 올려다본다. 한참 연기에 몰입해 있던 연기자들은 그러고도 몇초가 지나서야 사태를 파악한다. 물이 바닥난 것이다. 8초, 딱 8초만 더 버텨주면 되는데. 테스트에 너무 많은 물을 소비했다고 한다. 그럼 다시 채웠어야지. 분통이 터졌지만 싸늘한 침묵으로 카리스마를 유지하기로 한다. 사람 좋게 생긴 특효팀장의 얼굴이 새파래진다. 그리곤 비명에 가까운 괴성을 지르더니 총알 같이 물탱크쪽으로 달려간다. 특효팀원 누군가가 허발나게 깨지는 소리가 들린다. 피식 웃음이 나왔지만 애써 ‘상처받은’ 표정을 유지한다. 그리곤 허탈해 하는 배우들에게 가서 가장 연약한 표정으로, 최고로 미안해 하는 미소를 지어본다. 기대했던 반응이 돌아온다. “괜찮아 괜찮아, 다시 가면 되지 뭐, 신경 쓰지 마.” 다시 물을 채우고 두 번째 테이크를 찍는다. 이번엔 주 선생이 달려와 팔을 쳐들자마자 박 선배가 먼저 바닥에 쓰러진다. 학습의 효과다. 아까 하고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장면의 에너지가 떨어진다. 어떻해야 하나… 산등성이 너머로 까맣던 하늘이 파르스름해지기 시작한다. 한여름 밤은 너무 짧다.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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