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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이 보여준 여성드라마의 새로운 가능성 [1]
오정연 2004-03-19

 MBC 드라마 <대장금>이 23일 마침내 종영했다. 시청률과 평판 측면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힐 이 드라마는 몇 가지 익숙한 코드와 함께 적잖은 새로움과 중요한 생각거리들을 제시해주었다. 우리는 그 모든 유의미한 지점들을 열거하는 대신 가장 주목할 만한 한 가지 측면에 간결하게 집중해보기로 했다. 그것은 여성성의 본질과 여성적 관계의 문제다. <대장금>은 그동안 여성주의와는 대척점에 있는 것으로 재현되었던 사극이라는 장르 안에서, 그리고 조선시대의 궁궐이라는 시공간 안에서 달성된 유려하고 대중적인 버전의 여성주의 드라마로 기록될 것이다.

<대장금>의 인기 비결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탄탄한 구성, 만화적 상상력, 빛나는 조연, 매력적인 악인, 색다른 형식 등 당장 생각나는 것만도 줄을 선다. 그러나 <대장금>이 <대망>이나 <다모> 등 여타의 새로운 형태의 사극으로 불렸던 작품들에 비해 <대장금>만의 미덕으로 내세울 수 있는 부분을 짚어내는 것은 의외로 쉬워진다. 사극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여성 작가가 집필하고, 한 여성의 성공을 색다른 방식으로 조망하고 있는, 악역부터 현인까지 다채로운 여성캐릭터의 경합장으로 불릴 만한 이 드라마가 부각시키고 있는 것은, 바로 새로운 여성드라마의 어떤 가능성이다.

“전 지금 이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정신을 놓게 됩니다. 나으리께서는 희망이 없어야 편하실지 몰라도 저는 안 되겠습니다. 풀 한 포기 약초 한 포기 자라는 것에라도 희망을 걸어야겠습니다.”

-장금의 대사 중

비단 풀 한 포기뿐이겠는가. 제대로 된 물 한잔을 준비하는 것, 임금의 점심을 제시간에 준비하는 것, 최고의 디저트를 내놓는 것, 용기를 내어 시침을 하는 것, 의녀 시험에서 합격하는 것 등 온갖 크고 작은 미션들이 도처에 널려 있고, 장금은 마치 시야를 한정시켜버린 경주마처럼 매 순간 집중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목표를 삶의 의미로 삼는다. 이 모든 단기 목표들은 하나의 궁극적 목표로 귀결된다. 궁에 들어가서 최고상궁이 되는 것, 그리하여 어머니의 억울함을 알리는 것. 그리고 드라마의 종영을 한달도 채 안 남겨둔 지금에 와서야 장금의 단 하나의 목표는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 목표의 일환인, 어머니를 해한 세력에 대한 복수가 예사롭지 않다. 장금은 단기 목표를 통해 성장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새 장기적인 일생의 목표에 가까워진다. 가깝게는 최 상궁 일가로부터 멀리는 조정의 보수세력까지 어지럽게 얽혀 있어 실마리를 찾기 힘든 복수가 ‘그냥 열심히’ 실력을 쌓다보니 점점 가능한 일이 되어간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장금의 복수극은 성공기로 변모한다. 계속해서 닥쳐오는 각종 위기에 맞서다보니 어느새 많은 덕목을 갖추게 되고, 성공의 와중에 복수는 자연스럽게 완성되는 식이다. 그 안에서 악인들은 스스로의 한계로 인해 자멸해간다. 악인들에게 계속해서 기회를 주고 진심으로 비는 용서만을 요구하는 장금의 방식은, 보통의 드라마에서 보이는 집요하고 유치한 여성들의 복수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인 남성들의 복수와는 분명히 다르다. 이것은 모두, 장금이 진짜 실력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진짜 실력’이라는 것은 일반적인 현대극 속의 캔디 캐릭터 여자주인공도 갖지 못한 보기 드문 설정이다.

“옥사에서 내내 괜히 그랬다, 후회했습니다. 서 나인께서 잘못되실까, 후회했습니다.… 하나 서 나인은 해내십니다. 매번 해내십니다. 그게 저를 힘들게 합니다.”

-민정호의 대사 중

<대장금> 속에서 장금과 민정호의 대사들은 일반적인 영화나 드라마에서 주고받는 남녀 대사의 역할바꾸기 버전이다. 초반 민정호의 어정쩡한 위치와 캐릭터의 주변성은 적잖은 당혹감을 불러일으켰지만, 거칠 것 없는 장금의 복수극을 완벽하게 외조하는 민정호의 역할이 이제는 제법 눈에 익었고 그 역할바꾸기는 한편으로 또 다른 재미가 되었다. 나름대로 대하사극의 남자주인공이었던 민정호가 이렇게까지 된 것은 목표로서의 복수는 주변으로 밀려나고 어느새 장인의 경지에 오른 장금에게 있어 이성에 대한 사랑은 우선 순위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몇년 동안 애틋한 마음을 품었던 민정호와 장금의 사이에는 몇번의 포옹만이 있었을 뿐이고 닭살스런 사랑의 대화 역시 드라마가 종영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무렵까지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제주도에서 의녀수련을 통해 다시 궁으로 돌아가겠다는 장금에게, 복수의 성공을 기원하면서도 차마 함께 남아 오붓한 여생을 보내자는 말은 꺼내지 못하는 민정호의 멀뚱한 미소가 답답해 보이지만 어쩌겠는가. 그의 일생을 건 애틋한 사랑이 아무쪼록 드라마의 마지막에는 결실을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볼 뿐이다. 이몽룡이 장원급제하여 돌아와주기만을 기다리는 춘향의 바람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딱 그만큼.

“나는 너처럼 완벽한 재능을 갖지도 못했고, 완벽한 열심을 갖지도 못했고, 완벽한 연정을 받지도 못했고….”

-금영의 대사 중

숙명적으로 악역이 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그 숙명을 극복하려 했으나, 결국은 평범한 악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장금의 영원한 라이벌, 금영의 대사들은 마치 살리에르의 절규처럼 일반인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대대로 이어진 최고상궁 집안의 전통을 이어받기 위해 악인을 자처하는 금영과 최 상궁은 <대장금>을 더욱 풍부한 텍스트로 만들어준다. 금영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민정호에게 음식을 올리면서 이렇게 속내를 드러낸다. “사람의 마음이란 것이 참으로 요망스런 것이라 안 된다 할수록 더욱 불덩이가 되더이다.… 그렇게 저는 오랜 번민을 끝내려 합니다. 마음 한번 주시지 않으니 미움이 커서 끝내려 합니다.” 이처럼 절절한 금영의 사후적 고백은, 어떤 면에서 장금보다도 사랑에 목을 매는 이 악역을 가장 현실적으로 다가오게 만들었고, 장금에 대한 그의 지울 수 없는 증오에 더욱 설득력을 부여했다. 그러나 금영 역시 사랑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지는 않는다. 그녀에게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어쨌든 자신의 커리어를 완성하고, 순수함을 버려가면서까지 얻었던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풍부한 배경과 이유를 지닌 금영에 비해 최판술이나 오겸호 대감, 내의정 등은 일면 평범해 보인다. 최판술이나 오겸호는 그저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에 급급한 관료에 불과하고, 내의정은 모자라는 능력으로 자신의 자리와 권위를 지키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별볼일 없는 사내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보아온 사극에서 중요시했던, 조정의 권력관계를 둘러싼 암투에 집중하는 이들 남성 악역들은 정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재미없는 사람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신의 집안을 지키기 위해 사랑을 버리는 금영과 몰락한 집안을 구하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는 열이 의녀는 그에 비해 얼마나 절실하고 현실적인가. 끝내 몰락해가는 그들의 최후가 못내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평범한 우리 모두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천재소녀 장금의 성공기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것은 결국 비범하지 못하여 슬픈 그들 여성 악역들의 인간적인 고뇌의 모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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