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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금>이 보여준 여성드라마의 새로운 가능성 [3]
2004-03-19

베풂과 치유로 고난을 넘어서는 여성캐릭터

<대장금>에서 전통 신화 속의 치료자 원형, 바리데기를 발견하다

크게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당대가 지난 뒤에도 호평받는 영화나 연극, TV드라마들을 잘 살펴보면 시대와 문화권을 초월하여 인간 심성 깊은 곳에 이미 내재된 보편적 주제와 감성을 다룬 서사구조를 지닌 경우가 많다. 그들 중 다수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서의 갈등과 해소 도식으로 정신분석학적 해석이 가능하다. 개인사적 경험의 더 아랫부분 심층에는 이른바 집단무의식적 경험이 존재한다. 이것은 대개 신화나 전설 또는 민담의 형태로 그 원형(原型)을 드러낸다. 그리고 역으로 이 시대의 신화, 즉 큰 대중적 영향을 끼치는 문화현상에 대해 우리 현대인들의 마음 심층에 존재하는 어떠한 주제의 투영으로서 분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드라마 <대장금>의 인기가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지속되고 있다. 우리의 주인공 장금이는 솜씨있는 궁중요리사로 성장하던 시기를 지나 이제 바야흐로 참된 치료자로 거듭나고 있다. 이전에도 훌륭한 의사, 즉 치료자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종종 있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새삼스레 <대장금>이 다시 큰 인기를 얻는 이유는 무엇일까?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가정해보자면, 장금은 우리의 전통 신화 속의 치료자 원형(healer archetype)이라고 할 수 있는 ‘바리데기’의 현신(現身)으로 볼 수 있다.

삶과 죽음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질병과 치유의 경험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 중 하나이다. 의술이 과학의 영역에 포함되기 이전의 원시사회부터, 치료자는 환자를 고통과 죽음으로부터 구해냄과 동시에 경우에 따라서는 죽음 이후의 내세로 인도해주기도 하는 샤먼의 역할을 부여받아왔다. 그러기 위해 치료자로서 갖추어야 할 조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치료자 자신이 ‘상처받은 이’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상처입은 치료자’(wounded healer)라는 조건은 치료자 자신이 삶의 과정에서 죽음 내지 그에 준하는 경험을 극복하고 회생하여 돌아온 이후에야 그로부터 얻은 지혜를 바탕으로 민중을 치료하고 인도할 수 있다는 개념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치료자 원형(healer archetype)으로 가장 잘 알려진 이는 그리스 신화 속의 의신(醫神)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s)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의사단체나 대형 병원의 문장(紋章)으로 지팡이에 두 마리의 뱀이 감긴 심벌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아스클레피오스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이다. 두번의 죽음이라는 시련을 겪은 이후에야 그는 인간의 삶과 죽음의 과정을 중재하는 치료자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게 된다.

그럼 이제 <대장금>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는 바리데기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바리공주, 일명 바리데기 설화는 우리 민족의 전통 무의(巫儀)에서 죽은 사람의 혼령을 위로하고 저승으로 인도해줄 것을 비는 지노귀굿, 씻김굿, 오구굿, 망묵이굿 등에서 불리는 서사무가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상처받은 치료자’로서의 장금이

바리데기 설화는 여타 다른 문명에서의 영웅신화 속 주인공의 성장과정과 많은 공통점, 예컨대 어린 시절에 버림받고 홀로 길을 떠나 여러 시험을 통과하면서 완벽한 인간으로 만들어진다는 유사한 성인의례의 서사구조를 공유한다. 사실 이 과정은 우리 인간 모두가 각자의 심리적 삶에서 무의식적 성장과정을 겪으며 참된 자기로 통합되어가는 도정을 전형적으로 상징하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대의 신화라고도 볼 수 있는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이 그러한 삶을 살아갈 때 그에게 공감하게 되고, 스스로 위로받으면서 의미있는 내적 성장, 즉 감동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대장금>의 인기 역시 그녀가 바리데기와 마찬가지로 ‘상처받은 치료자’로서 성장해가는 삶을 통해 우리의 집단무의식을 일깨우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데, 바리데기 설화가 다른 서구 신화와 차이점이 있고 그것이 <대장금>이라는 드라마에 투영된다는 데 각별한 의미가 있다.

우선 특징적인 점은, 대다수의 신화 속 영웅이 남성인 것과 달리 우리의 바리데기와 대장금은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바리데기가 버림받는 계기이자 장금이 조선사회에서 겪게 되는 남존여비 전통은 현대의 우리나라 여성들에게도 중요한 억압으로 작용하는 집단적 가치체계이다. 드라마 속 궁궐 여인들이 독립적인 개인으로서의 자유와 행복을 저당잡힌 채 오로지 왕, 즉 남성을 위한 존재로서 살아가도록 강요하는 이념은, 국민 대다수가 찬성함에도 불구하고 호주제 폐지 하나 성취하지 못하는 현대의 한국사회에서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렇듯 남성성을 우위에 두는 가치체계는 비단 여성들에게 현실적 장애로 작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시대의 남녀 모두에게 스스로의 내부에 지니고 있는 아니마를 의식화하는 것을 억압하여 결과적으로 개인적인 자기실현과 균형잡힌 사회가치의 성장을 방해한다.

장금이 사회적 편견으로부터 비롯된 여성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완숙한 치료자로 성장해가는 과정은, 딸이라 버림받았지만 스스로 중요한 소명을 띠고 여정을 떠나는 바리데기를 연상시킨다. 그녀는 자신의 모험을 통하여,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가치로부터 형성된 페르소나를 극복하고 참된 자기로 통합되어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무의식적 성장 과제를 대리하여 수행해주고 있다. 그리고 드라마 속 궁궐 여성들의 삶과 지극정성의 음식문화 속에 반영된 여성성을 경험하며, 우리는 가부장적 힘의 논리에 세뇌된 스스로로부터 조금 더 성숙할 수 있다. 요컨대 드라마에 몰입하고 감동받는 부지불식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이전보다 성숙한 아니마가 발휘되는, 말하자면 좀더 덜 완고하고 더 유연한 사람으로 조금씩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성적 영웅성-나눔과 베풂

‘버림’받는다는 경험은 무의식적으로 죽음을 상징하며, 또한 그 안에는 ‘구함’ 내지 ‘찾음’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심리적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버림’ 즉 ‘상실’의 경험을 겪은 이후 다음 단계의 자아를 찾아가면서 성장하도록 운명지워져 있다. 대개 그 ‘구함’의 일차적 대상은 내 안에 있는 나, 즉 부모의 모습인 경우가 일반적인데 프로이트를 위시한 대다수의 서구 정신분석학에서는 그 대상이 아버지상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어머니, 즉 모성(母性)에의 동일시는 상대적으로 간과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편파성의 일부는 서구의 영웅신화 구조에서 비롯되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바리데기가 버림받는 경험을 극복하고 부모를 구하러 가는 것처럼, 일찍이 고아가 된 장금은 참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부모가 일하고 만난 곳, 궁궐로 향하게 된다. 그녀가 찾고자 한 자신의 일부는 한편으로는 스스로를 이루는 어머니의 모습이라고 짐작할 수 있는데, 극 스토리 배후의 큰 축을 이루는 이 ‘여성성’이라는 주제에서 서구와는 대비되는 우리 신화 속 치료자 원형의 중요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그리스 신화 속의 헤라클레스나 메소포타미아 신화의 길가메시처럼 대개의 남자 영웅들이 악을 무찌르고 없애는 과정을 밟으면서 시험을 통과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여성의 영웅성은 나누어주고 베푸는 것으로써 그 위력을 발휘한다. 바리데기는 자신의 도정에서 누구도 해치지 않는다.

장금 역시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다. 많은 위기 상황에서 여러 차례 경쟁을 치르기는 하지만 그 경쟁은 항상 누군가에게 음식을 만들어주거나 질병을 치료해주는, 말하자면 돌보아줌의 틀 안에서의 경쟁이다. 그리고 그녀는 항상 정성을 기울이고 상대를 감동시킴으로써 승자가 된다. 그녀는 백성을 해치는 왜구의 우두머리를 치료하여 물러가게 하고, 질투에 마비된 대왕대비에게 모성을 일깨워줌으로써 시련을 극복한다. 우리 민족의 집단무의식 안에 자리잡은 치료자의 모습은 단순히 질병과 악을 도려내고 제거하는 싸움의 수준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모습이며, 그것을 대장금이 재현하여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장금이 상대를 돌보고 감복시켜가는 치료 행위에 감동받으면서, 경쟁과 대결구도가 지배하는 현대 자본주의 시대가 야기한 무의식 속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아픔을 덜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장금>은 사실상 새로운 형태의 복수극이다. 이 복수극이 ‘새로운’ 이유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까지도 장금이 용서의 가능성에 집착한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우리는 수많은 인기극들 속에서 상실과 그에 따른 분노, 질투와 죄책감의 주제가 반복되는 것에 공감하면서 온당한 복수 내지는 권선징악의 절차가 이어지는 것에 위안받아왔다. 이런 방식의 마무리는 좀더 심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벌어진 일을 벌어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해주는’, 이른바 ‘애도’의 과정을 통한 정신내적 치유 효과를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서구와는 달리 우리 문화에는 상실을 인정하는 애도의 경험을 넘어선, 이른바 ‘용서’라는 위력적인 치유기제가 존재하고 있으며 그 전형을 바리데기의 삶이 보여주고 있다. 애도가 개인적 차원에서의 타협인 것과 달리 용서는 대상을 포용하는 화해의 과정이다.

인기있는 대중 드라마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통을 달래주는 중요한 집단적 방어기제의 하나로 작용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 그 드라마는 우리에게 퇴행의 강박적 반복을 통하여 얕은 수준의 일상 속 불안을 감소시켜주는 저급한 방어기제로 기능할 때도 있고, 드물게 사회집단 모두에 집단적 카타르시스 내지는 살풀이를 제공함으로써 성숙의 계기를 제공할 수도 있다.

장금은 부모를 잃은 고아가 되고 궁궐에서 내쫓겨 귀양을 가게 되는 두 차례의 ‘버림받음’을 극복하며 스스로 참다워지는 과정을 밟는다. 바리데기가 강보에 싸인 채 바다에 버려지고 또 나중에 약을 구하기 위해 지옥을 통과하게 되는 이야기, 그리고 아스클레피오스가 두번의 죽음을 경험한 이후 의신이 되는 이야기가 상징하는 무의식 속 삶과 죽음의 주제를, 우리는 이 드라마를 보며 재경험하고 있다. 그 과정을 겪고 있는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 권세를 포기하고 민중 곁으로 가기를 원한 바리데기처럼 장금이 역시 그러한 선택을 해주었으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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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수/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