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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청춘 스케치 [5] - 제작부 이명수
사진 정진환이영진 2004-04-13

현장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해결한다 제작부 이명수

서울 목동야구장. <슈퍼스타 감사용> 팀이 베이스 캠프를 차린 곳이다. ‘패전처리전문’이라는 달갑지 않은 칭호의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 감사용이 OB베어즈와의 야간경기에서 처음으로 선발로 마운드에 나서, 1승을 향한 의지를 불태우는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된다. 해가 지고 1억원을 들여서 갈아끼웠다는 야구장 내 조명이 밝아지는 저녁 6시 무렵. 다들 ‘슛’을 위한 촬영 준비에 여념이 없는데 제작부 막내라는 이명수(33)씨. 편한 복장 대신 유니폼을 꺼내입고, 목장갑 대신 흰장갑을 손에 끼고, 청테이프 대신 야구방망이를 휘두른다. 서른이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험난한 영화제작의 길에 나선 그는 “얼굴이 윤동균 선수와 닮은 것이 김종현 감독 눈에 띄어” 극중 배역까지 맡고 있다.

-01 어쩌다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됐나.

=공인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는데 뉴욕시립대에서 입학을 허락한다는 전갈이 왔다. 뉴욕에 있는 친구 만나러 갔다가 맨해튼 대로를 막고서 영화 촬영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서 막연하게 ‘저거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서 장난 삼아 몇 군데 대학에 원서를 냈는데 그중 한곳이 된 거다. 고시 실패해서 찌그러진 선배들을 적지 않게 봤고,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은 마음도 있고. 부모님한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한국을 떴다. 2년 정도 버텼는데 감독은 욕심만으로 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이마무라 쇼헤이나 기타노 다케시가 될 수 없을 것 같아서 전공을 바꿨다. 연출에서 촬영으로, 그리고 제작으로. 도합 6년 걸렸다. 귀국해서 한 방송사의 다큐메터리 계약 PD일을 하다 싸이더스 이정학 프로듀서의 꼬임에 입사했다.

-02 일을 시작하고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던 점은.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장준환 감독의 뮤직비디오 작업에 참여했는데 규모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준비과정을 맛봐서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다만 2년 전에 한 선배 소개로 신생 영화사를 찾아갔을 때 당황한 적이 있다. 감독하고 스탭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거의 고삐리 대화 수준이었다. 사장이라는 사람은 무슨 영화냐는 질문에는 답도 안 해주고 보수 많이 못 주지만 일은 열심히 해야 한다고만 하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오면서 충무로가 이렇게 험난한 곳이구나 싶었다.

-03 일하면서 욕먹었던 일이나 칭찬받았던 일은.

=내가 하는 일 중 하나가 필름 운반이다. 촬영 끝나면 제작사에 필름 가져다놓고, 또 아침에 그거 챙겨서 현장에 내온다. 그런데 하루는 촬영부가 필름 달라고 하는데 순간 아찔하더라. 까먹고 제작사에서 필름을 안 가져온 거다. 가져오려면 1시간30분은 걸리는데. 나 때문에 다들 대기하는 상황을 떠올리니 식은 땀이 났다. 왕복하느니 필름회사에 전화하는 게 낫겠다 싶어 연락해놓고 제작부장에게 이실직고 했다. 쉬쉬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으니까. 다행히 남은 필름 떨어지기 전에 새 필름이 와서 큰 소리는 안 났다. 제작부 일이라는 게 주는 것 없이 받아내야 할 때가 많다. 그때마다 나이 많은 게 도움이 된다. 사람 대하는 기술이 있는 편이다. KBO로부터 도움을 얻어낼 때나 실제 인물들로부터 이름을 쓰는 것에 대한 동의서를 받아낼 때 요긴했다. 야구 잘한다는 칭찬도 많이 들었다.

-04 친구들이 내가 하는 일을 부러워할 때.

=‘사’자 붙은 친구들이 좀 있는데. 다들 출근 일찍 안 해도 좋겠다, 만나고 싶은 사람만 만나서 좋겠다, 연예인 봐서 좋겠다 뭐 이런다.

-05 친구들이나 가족이 쯔쯔 혀를 찰 때.

=조카 돌잔치 때 허름한 추리닝 입고 빈손으로 갔다. 반지는 못해주더라도 봉투에 몇만원이라도 넣었어야 했는데 못했다. 나이가 많은데 막내일 어떻게 하느냐는 주위 시선들을 받아내기가 힘들긴 하다. 스스로 별거 아니라고 여기면서도 열번 중 한번은 내 모습이 초라하고 창피할 때가 있다.

-06 그때 엎어버리고 싶었다.

=단역배우들의 경우 10시간 이상씩 대기하는 거 보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주연배우에 대한 배려에 비하면 지나친 처사라고 여겨질 때가 많다. 내가 단역출연을 해서가 아니다. (웃음) 나도 나중에 어쩔 수 없이 그럴지 모르겠지만 그런 환경이 조금씩 바뀌었으면 한다.

-07 힘들 때 위로하는 방법은.

=술 먹는다. 이제 알코올 기운이 없으면 말도 잘 못한다. 소개팅 시켜줘서 나가면 커피 마시는 동안에는 꿀먹은 벙어리다.

-08 혹시 벌써 직업병이.

=잠이 부족해서 졸음 운전을 할 때가 종종 있다. 지하철에서도 졸다가 사고 낸 꿈 꾸고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난다. 쪽팔리긴 한데 그때마다 꿈이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09 로또에 당첨돼도 계속 이 일을 할 생각인가.

=탈북자에 관한 시나리오를 쓴 게 있는데 요즘 분위기에 다른 데서 투자받긴 힘들 것 같고 그 돈 갖고서 만들어야지.

-10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이상은.

=기획형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 트렌드에 감각을 잃지 않으면서 트렌드를 만들어가는 감각을 키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