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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청춘 스케치 [8] - 영상원 신입생 정지영
이혜정 오정연 2004-04-13

바닥 다지기부터 스텝 바이 스텝

영상원 신입생 정지영

긴 우회로를 거쳐 영화를 향해 첫발을 내디딘 정지영(27)씨. 이전의 짧고 다양한 경력들은 그가 쉽게 싫증을 내는 성격임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러나 정지영씨는 여러 가지 일들을 뒤로 하고, 지금의 선택을 한 것은 아마도 이전까지 했던 일들이 자신이 진짜 좋아할 만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일 거라고 덧붙인다. 4년 동안 공부를 계속해서 과연 졸업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다소 잔인한 질문에 그는 그럴 것 같다고 조심스럽게 말한다. 꼭 감독이 아니라도, 최고의 영화를 만드는 데 일조하고 싶다고 말하는 정지영씨는 천천히, 그러나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내는 사람인 듯하다.

-01 어쩌다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됐나.

=점수 맞춰서 들어간 대학을 1년 만에 중퇴하고 만화가 문하생, 사무직 직장 몇 군데, 식당 아르바이트 등을 했다. 마지막으로 했던 게 식당 일이었는데, 몸이 피곤하니까 단조로운 생활만 하게 되고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다시 하고 싶어졌고, 영화는 예전부터 좋아했기 때문에 주경야독으로 영상원 입시를 준비했다.

-02 일을 시작하고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던 점은.

=영상원에는 서울 사람들도 많고, 영화하려는 사람들이니까 다들 카리스마도 있고 고집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막상 와보니까 선배들이나 동기들이나 착하고 재능있고, 겸손한 사람들이더라.

-03 일하면서 욕먹었던 일이나 칭찬받았던 일은.

=아직 본격적인 실습을 하기 전이라 욕을 먹은 일은 없다. 정재은 감독님의 ‘영상과 음향’이라는 수업을 듣고 있는데, 두 사람이 한 장소에서 대사없이 벌어지는 5분짜리 시나리오를 쓰는 것이 숙제였다. 두 번째에 통과가 됐는데, 감독님께서 “훨씬 나아졌다”고 하셨다. 사실 그때 통과된 사람들은 다 들은 얘기긴 했지만. (웃음)

-04 친구들이 내가 하는 일을 부러워할 때.

=친한 친구 중에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은데 지금은 다른 일을 하는 친구가 있다. 내가 여기 들어왔다고 하니까 “나도 애니메이션 학과 갈까”라면서 부러워하더라. 사실 부러워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들 미쳤다고 하지. (웃음)

-05 친구들이나 가족이 쯔쯔 혀를 찰 때.

=내가 1남5녀 중에 넷째다. 언니들이 다 결혼했기 때문에 형부들까지 합쳐서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한마디씩만 해도 장난이 아니다. 학교를 8월에 합격하고 1월에 통지서 날아왔을 때, 처음 알게 된 가족들이 난리가 났었다. 가족들은 부산에 있으니까 입학 이후에는 별로 얘기 들을 일은 없었다. 가장 친한 친구는 내가 하도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돌아다니는 걸 아니까, 학교를 새로 들어간다고 하니까, 좀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 학교 다닐까 말까 물어봐도 대답도 안 해주고. 하지만 여태까지 내가 해온 게 있으니까 그런 반응도 이해할 수 있다.

-06 그때 엎어버리고 싶었다.

=엎어버리고 싶을 때보다도 선배들한테 영화 만들려면 500만원 넘게 든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만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심각하게 했다.

-07 힘들 때 위로하는 방법은.

=옛날에는 술을 마셨는데 만날 술마시고 사고를 치니까 언니들이 술 좀 그만 마시라고 그런다. 그래서 요즘엔 그냥 책읽다가 잠이 든다. (웃음)

-08 혹시 벌써 직업병이.

=영화를 보기가 싫어졌다. 싫증이 났다는 게 아니라 자꾸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되니까 영화를 보는게 겁이 나더라.

-09 로또에 당첨돼도 계속 이 일을 할 생각인가.

=그 돈으로 영화 만들어야지. 내가 못 만들면 다른 사람이 영화 만드는 데 돈을 대주든가.

-10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이상은.

=나는 그냥 멀쩡하게 길을 걷다가도 삐끗해서 넘어지고, 다리 부러지고 할 정도로 덤벙댄다. 그래서 사실 내가 감독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든다. 내가 만든 영화가 어쩌면 공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지금은 좋아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졸업 이후에는 좋은 감독이나 파트너를 만나서 좋은 작품을 만드는 데 참여할 수만 있어도 행복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