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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 청춘 스케치 [9] - 영사기사 최영옥

하루에 33번 필름 갈아 끼워요 영사기사 최영옥

CGV강변11의 영사실로 들어선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엔지니어다. 짧은 스포츠 머리에 군복 재킷. 최영옥(28)씨가 그 숫자가 미미한 여성 영사기사로 일하기 시작한 지 9개월. 고교 졸업 뒤 9년 동안 은행, 지하철 택배, 컴퓨터 등 온갖 직업을 거쳐 이제야 “너무 맘에 드는 일”을 찾았다며 행복에 겨운 표정이다. 필기와 실기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국가고시’를 거쳐 대기업에 취직했기 때문이 아닌 건 그의 얼굴이 증명한다. 유니섹스 스타일을 좋아하는 그는 무심한 표정이다가도 영사 일에 대해 묻기만 하면 얼굴빛이 환해지며 마구 ‘떠든다’. 3교대 근무로 낮이든 밤이든 자기 순서가 되면 한명의 보조 스탭과 함께 11개 스크린을 9시간 동안 돌봐야 한다. 적어도 한 스크린에 필름을 세 차례는 걸어야 하니 33번 동안 광고, 예고편, 본편의 상영을 차질없이 진행해야 한다.

-01 어쩌다가 이 일을 시작하게 됐나.

=어렸을 때부터 극장에 가면 꼭 해보고 싶은 일이 있었다. 아줌마들이 영화 끝나고 휴지 줍고 뒷정리하는 것!(웃음) 백수로 지내다가 개관 준비 중인 명동CGV에서 아르바이트 스탭을 모집하기에 플로어 근무를 지원했다. 그러다가 영사기사 보조스탭으로 일하면서 이 일이 매력적이라는 걸 알게 됐다. 바로 직전의 일인 컴퓨터 작업과 달리 몸을 계속 움직이는 활동적인 일이라는 게 좋았다. 기계도 직접 손봐야 하고, 화면과 사운드도 끊임없이 체크해야 하고, 특히 내가 즐거웠던 장면에서 관객이 반응을 보일 때는 감동스럽기까지 하다.

-02 일을 시작하고 예상했던 것과 너무 달랐던 점은.

=하나로 된 필름을 통째로 돌리면 되는 줄 알았는데, 보통 6권의 필름을 붙여서 상영하더라. 더 중요한 건 전기, 기계, 물리 등에도 두루 통달해야 한다는 것. 혼자 근무할 때 어떤 사고가 일어날지 모르는데 영사기계만 마스터해 갖고는 대처가 안 된다. 실제로 영사기사가 해주길 바라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03 일하면서 욕먹었던 일이나 칭찬받았던 일은.

=원인 규명이 안 되는 사고가 가끔 일어나는데 위에서는 왜 원인을 밝힐 수 없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칭찬? 수도 없이 많은데. (웃음) 필름은 물론이고 기계 속으로 먼지가 들어가면 안 되는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한달 스케줄을 짜서 미리미리 점검하고, 개봉 때 영화마다 다른 크기로 녹음된 사운드를 장내에서 들어본 뒤 손보고, 관객 안내도 하고…. 내가 좋아해서 이 일 저 일 자꾸 하니까.

-04 친구들이 내가 하는 일을 부러워할 때.

=대기업에 취직해서 안정적이라고…. 그보다는 내가 신나고 즐겁게 일하는 걸 보면서 부러워한다.

-05 친구들이나 가족이 쯔쯔 혀를 찰 때.

=무리하게 일을 하니까. CGV가 여러 곳에 있는데 다른 곳으로 내 시간을 쪼개서 근무 외 시간에 배우러 가는 경우가 많다. 대전에 계시는 어머니를 뵈러가는 게 뜸해졌다.

-06 그때 엎어버리고 싶었다.

=이 일 시작하고는 없다. 절대.

-07 힘들 때 위로하는 방법은.

=우선 내가 나를 위로한다. 그 다음 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동료들.

-08 혹시 벌써 직업병이.

=잠꼬대. 어느 날 일어나면 동생이 그런다. ‘베어링이 뭐 어쨌다고?’ 이 일과 관련해 뭔가를 막 지시한다고 한다.

-09 로또에 당첨돼도 계속 이 일을 할 생각인가.

=생각해본 적 없는데…. 계속 일할 거다. 일 없으면 심심해서 죽을걸.

-10 당신이 지금 갖고 있는 이상은.

=예전부터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서 최고의 지위가 아니라 최고의 능력을 갖고 싶었다. 나이가 들면, 오지에서 우체부 일을 하고 싶다. 서울 같은 빡빡한 도시에서 사는 건 나와 잘 안 맞는다. 한적한 전원생활이 좋다(그는 충남 서산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녔다).

글 이성욱 lewook@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