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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회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 발표 [3] - 금상 <complex> 작가 류훈
오계옥 이영진 2004-05-11

악(惡)의 정체성을 찾아서

금상 <Complex> 작가 류훈

류훈(32)씨는 미대 출신이다. 서양화를 전공했다. 하지만 2학년 이후론 붓을 잡아본 적이 없다. “고작해야 가족이나 친구들만이 찾는 전시회가 싫었고, 소통 불가능한 순수의 세계가 갑갑해졌다.” 그리곤 비디오 아트로 전향했다. 외국에서 유학한 젊은 교수들의 강의를 듣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다. 영화에 대한 관심이 일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그러다 한편의 영화를 만났다. . 만삭의 아내와 함께 추운 겨울밤 덜덜 떨면서 극장을 찾았고, 나오는 길에 가슴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얼마 지나 아내는 예쁜 딸을 낳았고, 그는 영화에의 꿈을 얻었다. 1년 뒤. 그는 가족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의 아트 칼리지로 유학을 떠났고, 3년 동안 영화연출 공부를 마치고 2002년에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급한 마음에 영화사를 전전하며 시나리오를 내밀었지만 매번 가능성만을 확인받는 것으로 끝이 났다. <Complex>는 “먹고살기 위해” 영화과 3∼4군데를 돌며 강의를 하는 동안 틈틈이 쓴 시나리오. 본인은 멜로가 전공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공교롭게도 가학과 피학의 80년대를 그린 미스터리 스릴러물이 막동이 시나리오 공모전에 뽑혀 당황했다고. 현재 동국대 영화영상제작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그는 남는 시간은 “주인공 안 죽이고도 가슴을 저미게 만드는” 멜로 시나리오 창작에 모조리 쏟아붓고 있다.

-소재를 어떻게 얻었나.

=지난해 아는 사람이 연쇄살인사건에 관한 시놉시스를 말해준 적이 있다. 듣고보니 피해자로 알려졌던 사람이 가해자로 드러나고, 가해자인 것으로 지목됐던 사람이 사실은 피해자였다는 설정이 매력적이었다. 평소 정체성에 대한 관심이 많았는데, 그 이야길 듣고서 남 주지 마라, 내가 써보겠다고 했다.

-1987년 6월항쟁에서 2002년 월드컵 당시의 상황으로 디졸브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광화문이 빨간색 옷을 입은 이들로 가득 찼을 때 레드 콤플렉스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광경만으로 어떤 살의를 느끼지 않았을까. 빨갱이라고 낙인찍고 고문했던 당사자라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연쇄살인사건에 대한 암시의 의미였다.

-연쇄살인범으로 나오는 고문형사 조갑영은 고문기술자 이근안을 염두에 두고 쓴 것인가.

=이근안을 모델로 해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는데 실제 그 사람의 비행과는 많이 다르다. 다만 어떤 행위 자체가 악인가 아니면 그 행위를 유발시킨 환경이나 조건이 악인가 뭐 이런 자문을 가졌었는데, 이번 시나리오에선 그런 고민을 푸는 방식으로 시대적 상황들을 끌어왔다.

-시대를 불러들이는 방식도 그렇고, 농촌의 경찰서가 주무대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살인의 추억>이 연상되더라.

=사실 이쪽 장르의 컨벤션이나 이야기 전개방식을 잘 몰랐다. 그래서 <쎄븐>이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을 보면서 참조하고 공부했다. <살인의 추억>은 어떤 설정을 따온 것은 아니고 그 정도의 톤이면 상업영화로 적당하겠다고 생각했다. 진범이 과연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지나치게 무거워지면 곤란하다고 봤는데 그런 점에서 <살인의 추억>은 좋은 텍스트였다.

-사건을 풀어가는 인물이 아줌마 검사다.

=처음부터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생각이었다. 남자 검사라면 지나치게 진부할 것 같아서. 평소 <파고>에서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연기한 여자 경찰의 캐릭터가 너무 좋았고, 그게 이번 시나리오에서 아줌마 검사라는 캐릭터로 나왔다. 이 시나리오의 메리트라고 생각한다. 캐릭터를 좀더 잘 살리는 방향으로 수정을 하고 싶다.

-배우를 염두에 두고 썼나.

=캐릭터의 톤을 유지하기 위해서 매번 그런다. 이번에도 류옥임 검사는 문소리를, 노형사는 변희봉 선생님이나 박인환 선생님, 이모술은 안성기, 조갑영은 장두이라는 배우를 떠올리며 썼다. 문소리는 <오아시스>의 문소리는 아니고. (웃음) <바람난 가족>에서 문소리가 보여줬던 이미지다.

-아이디어는 주로 어디에서 얻나.

=목욕탕에 주로 간다. 따뜻한 물속에서 중얼거리다 보면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앞으로 계획은.

=멜로영화를 준비 중인데 좋은 시나리오 만들어서 연출까지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내년에 우리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는데 아버지 직업란에 강사라고 안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Complex>

● 시놉시스

2002년 봄 월드컵 열기로 한창이던 어느 날. 충남 괴산의 작은 양어장에서 이가 빠진 한구의 시체가 발견된다. 단순히 월드컵 경기의 승리 때문에 생긴 음주 실족사로 결론내린 경찰은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하지만 유가족들의 항의에 부딪혀 사건은 아줌마 검사 류옥임에게 넘어간다. 검사라기보다 가정주부로 더 바쁜 일과를 보내는 ‘사건 마무리 전담 검사’ 류옥임. 그러나 비슷한 종류의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고 시체들이 모두 치아를 잃은 채 발견되자 류옥임은 단순 실족사가 아닌 연쇄살인이라고 추정한다. 한편, 괴산에서 조그만 세탁소를 운영하는 이모술은 집으로 돌아가다 납치당한다. 간신히 살아남은 이모술은 사건의 범인이 과거 자신을 고문했던 형사 조갑영이라고 진술한다. 광주항쟁 당시 파출소에 던져진 화염병으로 인해 파출소장이던 아버지를 잃은 조갑영은 “빨갱이는 모두 죽여야 한다”는 신념의 소유자. 이모술의 진술을 통해 고문한 사람들의 정수리에 빨간 인두자국을 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는 조갑영의 실체가 드러나고 류옥임은 조갑영을 잡기 위해 잠복근무에 들어간다. 조갑영의 다음 목표가 십여년 만에 입국하는 교수 문지용임을 알게 된 류옥임은 결국 조갑영과 맞닥뜨린 끝에 사살하게 되지만, 그의 머리에 남아 있는 인두자국을 확인하고 혼란에 빠진다.

●● 발췌

#1 INT. 취조, 고문실-낮-1987년 6월

누군가의 시점숏. 라디오에서는 6·29 선언을 발표하는 노태우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린다. 물고문 중인 취조실. 고통스러운 듯 좌우로 저항하는 머리가 물에 잠길 때 노태우 대통령의 목소리가 웅웅거리며 들리고 물에서 나올 때 목소리는 정상이 된다. 반복되는 물고문.

목소리(O.S) 좆까는 소리하지 마! 빨갱이 새끼들은 다 죽여버려야 돼!

누군가의 손이 낡은 작은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면 백영규의 <잊지는 말아야지>가 흘러나온다. ‘잊지는 말아야지∼만날 수 없어도∼.’

#7 INT. 부장검사실-낮

창 밖에 쏟아지는 비로 어두컴컴한 부장 검사실. 부장과 류옥임 검사가 마주 앉아 있다. 한심한 표정의 부장검사, 턱으로 류옥임 검사의 가슴 부위를 가리킨다.

부장검사: 오늘 도시락은 양이 좀 많군.

류옥임, 부장검사의 시선을 따라 자신의 가슴 부위를 쳐다본다. 정장 단추 위에 말라붙어 있는 밥풀덩어리. 흠칫 놀란 류옥임, 얼른 떼어내려는데 이미 말라붙어 잘 떨어지지 않는다. 겨우 떼어낸 마른 밥풀을 어찌할까 허둥대다가 입으로 넣는 류옥임.

부장검사: 어제 괴산 근처 양어장에서 실족사가 있었어. 자네가 좀 처리해야겠는데….

류옥임: (실망한 얼굴로) 실족사라면 결과 다 나온 거 아닙니까? 왜 항상 저한텐 이런 사건만 주시는 거예요? 저도….

부장검사: (말을 가로채며) 사건다운 걸 맡고 싶으면 가정부 일을 때려치던가! 그 일 때려치우면 원하는 사건을 주지.

류옥임: 가정부 일이라뇨? 이제 제 아이도 다 커서….

#57 INT. 고문실-밤-1987년 당시

비명을 지르는 30대 초반의 남자를 의자에 앉히고 강제로 이를 뽑는 조갑영. 공포에 질린 남자. 크게 떠진 눈이 새빨갛게 출혈되어 있다.

이모술(현재로부터 V.O): 고문이 끝나면 조갑영은 두 가지 일을 했죠. 마치 큰일을 끝내고 하는 의식 같은 거였는데… 하나는 이를 뽑는 일이고 하나는 정수리에 인두자국을 내는 일이었어요.

류옥임(현재로부터 V.O): 인두자국이요?

인두를 불에 달구는 조갑영의 손. 30대 초반의 남자, 공포에 질린 표정이다.

이모술(현재로부터 V.O): 조갑영은 철저한 놈이죠. 세월이 지난 후에도 빨갱이와 빨갱이가 아닌 사람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믿었어요. 자기가 고문한 사람들의 정수리에 인두로 표시를 해두어 그들을 구분할 수 있다고 믿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