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3세대 영화광 시대가 왔다 [2]
박은영 2004-05-11

‘권위’가 아닌 자유로운 소통을 추구한다

이처럼 이전 세대 영화광들이 닦아놓은 터전 위에서, ‘이C’ 같은 신세대 영화광들은 누릴 것이 많아졌다. 특히 개인의 취향과 기호가 중요해지면서, 이에 따라 영화를 보는 방식도 다양해지고 있다. DVD와 인터넷, 개봉관과 시네마테크, 영화제 등 영화를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지면서, 영화광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에 가장 적합한 포맷을 찾아 이를 고집하고 있다. “영화는 필름으로 봐야 한다”는 믿음과 ‘고전영화’에 대한 갈망이 깊은 이들은 이즈음 한달에 한번꼴로 열리는 명감독 회고전을 문지방 닳도록 드나든다. “자주 보이는 얼굴들이 있는 걸 보면, 안정적인 관객층이 형성된 것 같다”는 것이 문화학교 서울 사무국장 김노경씨의 조심스러운 분석. 그러나 ‘네임 밸류’가 높은 감독의 회고전에도 ‘대표작’이랄 만한 특정 작품에 관객이 폭주하는 현상에 대해선 “몇몇 대표작만 보고 그 감독을 다 알았다고 믿고 싶어하는 건 아닐까” 하는 우려를 비치기도 한다.

반면, 동시대의 화제작을 남보다 ‘먼저’ 보고 싶어하는 이들은 자기만의 공간에서 DVD와 디빅에 탐닉한다. 90년대 중반, 국내 개봉이 불가능해 보였던 왕가위의 <해피 투게더>와 이와이 순지의 <러브레터>의 상영회가 매번 인산인해를 이뤘던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예술영화전용관의 관객이 “영화적으로 우월하다는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아서” 이질적으로 느껴진다는 ‘나 홀로 감상파’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라이브러리를 만드는 데 공을 들인다. 고전영화, 드라마, 액션, 애니메이션 등 좋아하는 장르를 무한정 파고드는 경향들이 이들 ‘소장파’ 사이에 두드러진다. 젊은 세대가 DVD에 열광하는 또 다른 이유를, DVD 칼럼니스트 모은영씨는 “음질과 화질이 뛰어나다는 것은 물론, 챕터별 장면별 감상이 용이하다는 점에서 MTV의 짧은 클립에 익숙한 요즘 세대 감성에 잘 맞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취향과 기호의 차이가 중요해진 것은 물론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1995년 타르코프스키의 <희생>을 계기로 불어닥친 예술영화 붐이 사그라질 무렵, PC통신에는 다양한 동호회가 생겨났고, 고전영화는 물론 장르영화 애호가들도 활약하기 시작했다. “문화원 세대가 영화를 숭배했다면, 통신세대는 영화를 유희했다. 또한 비평의 사각지대에 있는 영화들을 발견하고 재조명해 스펙트럼을 넓혔다고나 할까. 작가주의에 대한 강박없이 잡탕으로 영화를 봤고, 모든 영화를 똑같이 여겼다.” 평론가로 등단하기 전, 유니텔에서 ‘씨네키드’라는 아이디로 활약했던 심영섭씨의 회고다.

그런데 이즈음엔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영화동호회도 해체 국면을 맞았다. 고전영화 동호회, 호러영화 동호회, 이와이 순지 동호회, 한국영화 동호회 등 ‘소문난’ 모임들이 더러 있지만, 이즈음의 추세는 “1인 미디어”라 일컬어지는 블로그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이다. 블로그의 특징은 블로그의 주인 혼자만이 글을 쓸 수 있고, 원하는 경우 트랙백을 걸어 비슷한 주제로 타인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는, 이런 커뮤니케이션에서 사라져가는 문화는 영화광들 사이의 ‘진검승부’다. 백과사전식 영화 교양에 집착하던 1세대, ‘영퀴방’에서 잡학다식을 겨루던 2세대와 달리, 이들은 영화에 대한 지식이나 교양을 남과 겨룰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못 본 영화에 대한 콤플렉스 같은 것도 없다. 한 대학생 영화광의 말마따나, 그들의 눈에는 “작가주의라는 정통적 흐름에 집착”하는 전 세대 영화광들의 잣대가 “권위적”으로 비칠 뿐이다.

1세대 영화광들이 평단은 물론 영화제와 영화정책 분야에 포진해 있고, 비디오로 영화를 섭렵한 영화광 출신 감독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는 이즈음, 새로운 시대의 영화광들은 그들이 소모한 영화들을 어떤 생산 활동으로 치환해낼까. 하나의 ‘문화’로 묶어내기엔 너무나 개인적이고 다양한 3세대 영화광들의 모습을 관찰하는 일은 미래의 한국영화를 전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영화주의자’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화광 1세대 정성일이 미지의 신세대 영화광에게 부치는 편지

영화를 사랑하는 당신에게 이 글을 드립니다. 우리들은 영화를 사랑하면서, 서로 알지 못하면서도, 그 상상의 우정으로 서로를 (애타게) 그리워하면서 영화관의 옆자리에 앉아 같은 순간 마치 텔레파시가 통한다는 듯이 눈물을 흘리거나 큰소리로 함께 응원하면서 웃었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언제나 마치 숨이 멎을 듯이, ‘죽여주는’ 장면을 만날 때, 바로 그 순간 누군가 아, 하는 탄성을 내지르면 정말 행복해집니다. 혹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새로운 이름 앞에서 열렬히 환호를 보내며 그가 미래의 거장임을 확신하는 그 열정 앞에서 언제나 마음속의 사랑을 봅니다. 그렇습니다. 그건 사랑없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 결심은 아무것도 바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진정 한자리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사랑하는 건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랑이 그런 것처럼 이 마음을 다한 행위는 그 어떤 이해관계를 노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일을 뒤로 미루고 채플린을 보기 위해, 드레이어를 보기 위해, 스트로하임을 보기 위해, 에이젠슈테인을 보기 위해, 존 포드를 보기 위해, 오즈를 보기 위해, 장 르누아르를 보기 위해, 히치콕을 보기 위해, 프리츠 랑을 보기 위해, 브뉘엘을 보기 위해, 에른스트 루비치를 보기 위해, 요리스 이벤스를 보기 위해, 자크 타티를 보기 위해, 라울 월시를 보기 위해, 막스 오퓔스를 보기 위해, 하워드 혹스를 보기 위해, 브레송을 보기 위해, 보리스 바르네트를 보기 위해, 로셀리니를 보기 위해, 고다르를 보기 위해, 케네스 앵거를 보기 위해, 타르코프스키를 보기 위해, 장 외스타슈를 보기 위해, 파스빈더를 보기 위해, 올리베이라를 보기 위해, 허우샤오시엔을 보기 위해(거기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이름을 얼마든지 더 열거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명단은 끝나서는 안 되는 목록입니다). 헐레벌떡 숨이 턱에 차도록 달려왔을 때 거기에는 오직 그 영화를 보고 싶다는 사랑의 감정 이외의 다른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혹은 낮에 흘린 노동의 소금에 옷이 절어 지친 몸을 이끌고 기어이 마지막 회에 도착해서 안도의 한숨을 조심스러이 내쉬면서 안락한 의자에 앉을 때 아, 참으로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친구인 것입니다. 거기에서 이데올로기를 말해야 한다면 저는 기꺼이 네 그렇습니다, 저는 영화주의자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건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한마디입니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면서 그렇게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친구이며, 동지이며, 연인인 것입니다. 혹은 거기서 함께 그 어떤 장면의 순간 환희를 느낄 때 그것이야말로 그 자리에서 함께 나누는 키스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는 오늘도 당신을 영화관에서 만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같은 순간 당신과 함께 감탄의 탄성과 행복한 한숨을 내쉬고 싶습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천사년 사월 정성일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