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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대 영화광 시대가 왔다 [3] - 영화제 싹쓸이파
오계옥 오정연 2004-05-11

필름으로 만나는 다양한 영화의 희열

영화제 싹쓸이파 박지만씨

1992년 4월. 국내 최초로 고다르 영화 10여편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상영됐을 때, <네멋대로 해라>를 본 박지만(33)씨는 어떤 영화도 보여주지 못했던 자유로움을 느꼈다. ‘개안의 순간’ 이후, 그는 시네마테크 ‘씨앙씨에’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김태일 감독을 따라 ‘푸른영상’에 들어가서 촬영을 하거나, 독립단편영화 스탭을 하면서 픽션과 논픽션, 영화제작과 감상의 경계에 있었다. 그런 그의 정체성을 가장 잘 소개할 수 있는 명칭은 ‘영화제 싹쓸이파’. “영화제를 한번 가면 처음부터 끝까지 있는다. 광주영화제에서는 주간 4, 5편. 심야까지 이어서 보기를 3박4일 동안 했었다.” 하루에 8, 9편의 영화를 본 셈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잠은 언제? 라는 질문이 이어진다. “매표 시작하기 전 줄을 서면서 좀 잔다.” 이쯤되면 인간의 경지가 아니다. 여기에 지난해 한해 그가 극장에서 본 영화가 1천여편에 달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그에게 영화보기는 중독의 수준으로 느껴진다.

시네마테크에서 복제한 비디오가 유일한 영화감상 통로였던 박지만씨에게 90년대 후반 생겨난 각종 국제영화제들은 엄청난 희열을 안겨줬다. “1회 부산영화제 때의 흥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다양한 영화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게 될 줄이야…. 광주는 프로그램들이 너무 좋았고, 전주는 한적해서 좋고….” 각각의 영화제들을 회상하는 그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그리고 2000년 이후, 서울아트시네마, 하이퍼텍 나다 등에서 영화책에서나 볼 수 있었던 감독들의 영화를 필름 상영하는 빈도가 높아진 것은 그에게 있어 ‘일대 사건’이었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하는 영화제는 빠짐없이 갔다. 감독별로 영화를 보면 일종의 연대기와 맥락이 그려지더라. 그중에는 비디오로 본 것도 있지만, 필름으로 보는 것은 또 다른 느낌이었다. 에릭 로메르 영화는 일종의 지적 코미디이기 때문에 제대로 된 자막이 중요하고, 필름으로 본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에서는 넘쳐 흐르는 감정이 느껴진다.” 영화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못하는 그가, 좀더 많은 정보를 제공하는 DVD 등의 매체보다도 발품을 팔아야 하는 영화제를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를 너무 쉽게 접할 수 있는 현재의 시네필들은 과거에 어렵게 영화를 찾아보면서 느꼈던 성취감을 모르는 것 같다”고 말하는 그는, 잘 차려진 잔칫상 같지만 노력하는 만큼 얻어갈 수 있는 ‘영화제’의 매력에 흠뻑 빠져 있었다.

과거 씨앙씨에의 현판을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는 박지만씨. 현재 그가 누리고 있는 ‘행복한 영화관람’은, 그를 영화의 세계로 이끌었던 전 세대 시네필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가능해진 셈이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씨네21 영화제’가 없어진 이유를 묻는 그는 더 많은 영화를 생생한 필름으로 접할 수 있는 좀더 다양한 영화제들을 바라고 있었다.

베스트10 (순위없음)

<네 멋대로 해라>(장 뤽 고다르)/ 영화보기의 새로운 시작이 됐던 영화.

<안개>(김수용), <원점>(이만희)/ 최근 한국영화 회고전에서 발견한 최고의 한국영화들. 한 인간의 내재된 이중성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장면(<안개>), 빈틈없는 스토리와 깔끔한 흑백영상(<원점>)이 훌륭하다.

<인간의 외로운 목소리>(알렉산더 소쿠로프)/ 1회 전주영화제에서 만난 영화. 러시아 문학의 ‘영상버전’이다.

<꿈의 미로>(이시이 소고)/ 1회 부산영화제에서 처음 봤는데, 보고 난 뒤 정말 행복했던 영화. 광택이 흐르는 흑백화면이 잊혀지지 않는다.

<제리>(구스 반 산트)/ 3회 광주영화제의 발견. 사막의 길을 따라가는 카메라가 인상적인 두 남자의 로드무비.

<열쇠>(이치가와 곤)/ 일본영화의 황금기 1950년대 거장 15인전을 통해 봤다. 컬러영화지만 흑백 같은 느낌의 화면이, 보는 이로 하여금 영화에 집중하게 만든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스탠리 큐브릭)/ 우주와 인간, 인류의 역사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는 영원한 걸작.

<제7의 봉인>(잉마르 베리만)/ 신의 존재와 인간의 운명, 구원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한 ‘죽음’과의 체스 한판.

<400번의 구타>(프랑수아 트뤼포)/ 감독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영화광으로서의 추억을, 소년의 좌절과 희망으로 그려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