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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세대 영화광 시대가 왔다 [6] - 영화 다운로드 마니아
김도훈 2004-05-11

검열도, 개봉시기도 뛰어넘는다

영화 다운로드 마니아 Sez씨

Sez(가명·18)는 학생이다. 이 지면에서 그의 신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밝힐 수 없음은 애석한 일이지만, 한명의 학생에게 가혹한 법률상의 주홍글씨를 붙이는 것은 피하도록 하자. Sez가 디빅(Divx)이라는 손쉬운 영화보기를 선택하게 된 것은 아파트촌으로 그 엄청난 초고속 인터넷 케이블이 침범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아파트는 거의 모두 광통신이 가능하다. 인구밀도도 높으니 한곳에만 설치해도 잠재수요가 엄청나지 않나”라고 설명하는 그는 이름만 대면 모두가 알 P2P(개인과 개인의 하드를 연결해서 서로 다운로드하는 것을 가능케해주는 프로그램) 중 하나를 이용하고 있다. 그가 영화를 다운받아 보는 이유에도 나름의 사정은 있다. “검열제도는 여전해서 제대로 검열되지 않은 영화를 보는 것도 여전히 힘들다. 멀티플렉스로 관은 늘어났지만 언제나 한 영화만 다수의 상영관을 차지하고 있고. 프랑수아 오종의 〈8명의 여인들>은 2002년 개봉이 2004년으로 연기되면서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많은 사람들이 다운로드해서 보았다. 지금도 개봉대기 중을 달고 있는 영화가 한두편이 아니고. 장사가 안 되는 외화는 수입조차 되기 힘들다. 재미있는 외국의 TV시리즈를 한국에서 보기란 불가능한 일인데다 수입 DVD는 지나치게 비싸다. 기다려달라, 검열한 거 이해해달라, 극장사정 봐달라. 이런 식으로 나오면 관객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그의 외침.

하지만 영화사들이 불법으로 영화를 인터넷에 올리는 사람들을 고소하는 움직임에 대해서 “마구 남들에게 퍼뜨리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다. 그런 것은 전문 장사꾼들이 하는 일이니까”라고 조심스럽게 항변한다. 과연 마구잡이 불법 다운로드를 막을 길이 있을까? Sez의 의견은 회의적이다. “이미 영화파일을 만들어 올리고 받을 수 있는 기술이 나왔으니 막으려 해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비디오의 복사기능이 처음 등장했을 때 영화사들이 엄청 반발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지금은 비디오라는 매체를 그들이 상업적으로 이용하면서 더 큰 수익원이 되었다. 디빅이라는 것이 태생적으로는 불법이지만 영화사들이 유료화해서 잘 관리하면 수익이 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라는 것이 그의 아슬아슬한 전망. 그러니까 Sez는 일종의 소극적 다운로드 중독자 정도로 자신을 규정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를 보고 영화에 빠지게 되었다는 이 조숙한 영화광 청년의 모습에서 불법 다운로드의 주홍글씨를 겹쳐보게 되는 것은 기술의 발전이 낳은 이 시대의 아이러니 같다. 글 김도훈 closer21@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

베스트 10(물론 디빅으로 다운로드한 리스트 중)

1, 2 <심슨가족>/ 시즌마다 할로윈 에피소드, <사우스 파크>/ 한국의 TV로는 절대 보지 못했을 에피소드들. 유쾌하고 무정부주의적인 유머로 넘친다.

3. 〈D.E.B.S.>/ 가상의 TV시리즈를 토대로 만들어진 단편영화로 선댄스 상영작이다. <미녀 삼총사>를 레즈비언 코드로 패러디한 발칙한 코미디영화.

4. <텍사스 전기톱 대학살>/ 개봉이 한없이 늦어지는 영화. 컴퓨터의 팬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어두운 밤에 혼자서 보는 그 공포도 좋았다.

5, 6 <살로, 소돔에서의 120일> <칼리굴라>(노 컷)/ 이 영화들을 보는 것에 의미를 두자면 일종의 ‘검열과 사회적 편견’에 대한 조용한 저항 정도가 아닐까.

7. 〈8명의 여인들>/ 2년의 개봉 연기를 기다리지 못해 결국 다운로드했던 영화. 남성들의 자리가 없는 여성들만의 유쾌한 뮤지컬.

8. <판타스틱 소녀백서>/ 국내 개봉시 삭제된 마지막 이야기를 디빅이 아니었다면 못본 채 지나칠 뻔 했다.

9. <싸이퍼>/ 복고적인 SF영화가 지금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화. 잠깐 개봉한 이후 DVD 출시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작품.

10. <화씨 451도>/ 레이 브래드버리의 동명 원작을, 프랑수아 트뤼포가 연출한 그의 유일한 영어영화. 이런 영화를 볼 수 있는 통로가 더 많지 않은 것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