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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상반기 한국영화 재구성 [2]
김혜리 2004-06-01

현재의 시간과 만나지 못하는 역사영화들

정성일 | 과거의 사건을 다룬 영화들이 역사가 되기 위해서는 현재를 만나야 되는데, 끝내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온갖 꾀를 내고 있다. 이를테면, <실미도>는 전원 자폭으로 끝남으로써 영화를 누구의 사건도 아닌 과거로 만들고, 기괴하게도 <태극기…>는 현재에서 끝날 수 있었으면서도 굳이 과거로 회귀하여 끝나고, <아홉살 인생>은 70년대에 기어이 끝내야 됐다. <말죽거리…>도 주인공이 그 다음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방식으로 끝났다. 그리고 한 감독의 데뷔작과 한 감독의 아흔아홉 번째 영화도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효자동 이발사>는 머리가 다 자라면 다시 돌아오겠다며 끝나고 임권택 감독조차 “맑아지려는 조짐”을 말하며 끝난다. “거기서 멈춰야 한다”는 묵시적 동의라도 한 것 같은, 시간을 정지시키려는 과거 시간에 대한 억압은 정말 이상하다.

김소영 | 나는 그것이 세트문화 때문인 것 같다. <스캔들…> <효자동 이발사> 등 최근 성공작들은 거의 다 세트를 잘 지어서 성공한 영화들이다. 세트문화는 자본의 성숙도 대변하지만, 특정한 서사의 욕망도 말하는 중층적 의미가 있다. 영화산업이 세트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는 비정치적 욕망이 있고 그것이 대중적 욕망과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세트를 세우는 순간 그 안으로 함몰돼버린다. 어찌보면 60년대, 70년대, 80년대 세트가 지어지는 순간 그동안 말을 못했기에 그 안에서 너무 할말이 많아지는 역사적 허기가 있고, 또 하나는 정 선배가 지적한 대로 현재와의 대면 기피, 즉 과거를 참을 만한 이야기로 만들어버리는 측면이 있다.

정성일 | 무서운 지적이다. 만약 세트 공간에 영화가 함몰된다면, 세트라는 것이 영화의 욕망이 아니라 자본과 산업의 욕망이라면, 세트라는 공간 안에 들어가서 자본을 버추얼 월드로 만들어 액추얼 월드를 밀어내버린다면, 가짜 이미지가 진짜 이미지들을 밀어냄으로써 얻는 효과일 텐데, 왜 그런 버추얼 월드가 미래의 시간으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을까.

허문영 | 미래의 버추얼 월드는 돈이 많이 들기도 할 거다. 김 선생의 지적은 흥미로운데 30, 40년 전 시간을 그리는 데 지금 한국처럼 세트를 많이 쓰는 데는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우리에게 시간을 보여주는 구조물이 얼마나 있는가. 한국의 공간은 시간을 지워나가는 방식으로 재구성돼왔고 우리 생활양식도 그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1980년대 말부터 공간 이미지 변화가 가속화하면서 탈이념화 탈역사화도 가속화한 것 같다. 또 역사의 엔터테인먼트화는 이미 90년대부터 이루어져왔다. 시오노 나나미의 책들이 출간된 것도 그때다. 요컨대 영화들이 지속적으로 오늘의 시간과 연관을 짓지 못한다면 그것은 1980년대 후반 이후 사회문화적 변화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정성일 | 과거에 매몰된 영화와 현재만 있는 영화가 있을 뿐, 이 결렬을 이어주는 영화는 없다는 것이 신기하다. 세트 이야기도 했지만 정말 장소만 있는 영화들이 있다. <하류인생>도 1957년부터 1970년대를 달려가진 하지만 명동을 들락날락하고 <효자동 이발사>는 효자동, <실미도>는 실미도, <태극기…>는 한반도 안이라는 공간만 있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현재를 다루는 영화들의 관심이 시간이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나 <사마리아>도 그렇다. 과거를 다루는 영화들은 시간을 다루지 못하고 현재를 다루는 영화들은 미시적 시간의 흐름만 다룬다. 농담하자면 세트 공간에서 버추얼 월드를 액추얼 월드와 만나지 못하게 함으로써 이 영화들의 이미지는 시간의 구체화(crystallization)하는 것이 아니라 모호하게(de-crystallization) 만드는 게 아닐까. 아까 언급한 남성적 퇴행성이 사회적 퇴행이라면, 역사를 다룬 영화가 모던해지지 않는다는 점은 영화의 뒷걸음질 같다.

비평담론이 제작 시스템을 포괄해야

허문영 | 다른 영화들을 짚고 넘어가자. 김 선생은 <아라한…>에 대한 칭찬을 서슴지 않았는데.

김소영 | 류승완 감독의 전작과 비교하면 체제 순응적으로 보이지만 <범죄의 재구성> 같은 영화와 비교하면 긍정적이다. <아라한…>은 아버지 세대와는 화해할 수 없지만 어딘가 있는 무언가와 공생하려고 한다. 공생과 협상이라는 말을 쓰고 싶은데, 파편적이나마 공생 방식을 상상하고 현재 서울의 지정학적 기표를 가져오려고 애쓴다. <범죄의 재구성>은 아버지도 죽이고 형도 애도하면서 안전하게 죽이고 전혀 제도와 관계 맺지 않으면서 쿨하게 살아보자는 아주 못된 영화라고 봤다. <아라한…>에 비해 여기서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허문영 | 지정학적 흔적의 요소에 대해서는 전폭적으로 동의한다. 류 감독은 데뷔작부터 현재의 공간을 다루고 거기서 많은 것을 포착하는 점은 탁월하다. 그러나 넒은 의미의 신화를 채용하는 방식은, 상상가능한 과거와 공생한다기보다 캐릭터 강화를 위해 소재주의적으로 단순 차용한 것에 가깝다고 봤다.

정성일 | <아라한…>은 영화가 시작하기 직전 아이디어까지만 재미있었다. 잘못 생각했는지 몰라도 나는 우리가 거리에서 마주치는 “도에 관심 있냐”고 묻는 사람들을 통해 한국사람들의 복잡한 종교관과 사회적 삶 속에 도교적 세계관이 얼마만큼 들어왔을까에 대해 류 감독이 견해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또, 도교가 그 사회의 중심적 사유방식인 홍콩에 대한 감독의 직접적인 오마주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마주의 원본이 지나치게 선명했다. 마지막 전쟁기념관 싸움도 도시의 활력을 다 잃고 가짜 공간에서 벌이는 기예뿐인 액션이 흥미를 반감시켰다.

허문영 | 김 선생은 저널비평 영역에서 신선한 장르적 시도로 평가된 <범죄의 재구성>이 불쾌한 구석이 있다고 했는데.

김소영 | 그런 장르적 매력은 <오션스 일레븐>을 보면 되지 않을까. 장남 이야기도, 아버지와의 관계 이야기도 아니고 차남 이야기인 이 영화는 굉장히 신선할 수 있었다. 이른바 오이디푸스에서 벗어난 이야기로 볼 수 있는데, 그렇게 전복적으로 가기보다 ‘쿨’이라는 기표를 내세웠다. ‘쿨’을 역시 내세운 <바람난 가족>과 <범죄의 재구성>을 비교하면 이 영화는 ‘쿨’에 따르는 자기 성찰이나 상식이 전혀 없이 굉장히 안전하게 큰형, 아버지 세대를 제거하고 여자와의 착취적 관계 속에서 언더월드에서 성공한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윤리적 사고 자체가 쿨하지 못한 사고라고 생각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다. 오히려 같은 스마트 무비(디지털적으로 통제되는 육체적 불편함이 전혀 없는 집 스마트 홈에서 가져온 개념. 현실에 없을 이야기를 시나리오 아이디어, 기획력에 의존해 장르 안에서만 살아 있도록 밀고나간 영화. 영화 밖 레퍼런스가 거의 없다)인 <라이어>가 한발 더 진전했다. <라이어>의 결론은 서울에서 쿨하게 살 수 있는 건 중산층 게이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로맨틱코미디의 자기 지반을 허문다.

허문영 | 대중영화의 발전이라는 관점에서 지능적인 범죄영화가 많이 나오는 것을 많이 기다렸다. 한 장르의 발전 면에서도 그렇고 영화에 대한 엄숙주의적인 견해를 추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범죄의 재구성>이 완전히 좋지는 않았다.

정성일 | <범죄의 재구성>은 앞서 만들어진 ’차승재표 영화’와 일정 부분 연관되면서도 미묘한 단절이 보였다. 싸이더스보다 시네마서비스에서 나왔어야 맞는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싸이더스 기획실을 통과하는 데 성공한 영화들의 공통점은 주인공들의 무모함, 영웅주의적 나르시시즘, 그것이 자멸하는 것에 대한 공감대와 자멸의 즐김에 있었다. 반면 시네마서비스의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영악함, 정의와 영악함 사이에서 한 가지를 선택하는 갈등상황이었다. 이렇게 도식화하자면, 시네마서비스 영화의 주인공들은 도덕적 선택, 싸이더스 주인공은 윤리적 선택에 직면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범죄의 재구성>은 윤리적 선택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이로써 싸이더스 기획팀 전체의 변화 조짐을 감지할 수 있지 않을까?

허문영 | 차승재 대표 스스로 “내가 개별 영화에 충분한 견해를 반영하던 시기는 이미 지났기 때문에 앞으로 차승재적 영화라는 식으로 보면 잘 맞지 않는 영화들도 많이 나올 것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까 말씀하신 차승재 영화의 독특한 감수성이나 선택은 <역도산>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김소영 | 우리가 장르나 작가의 시스템으로만 영화를 말해왔는데 제작자를 강조하는 비평의 방법도 중요할 것 같다.

정성일 | 비평계가 거의 모든 텍스트를 감독으로 해석하는데 그만한 전권이 있는 감독은 한국에서 두세 명에 불과하다.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거꾸로 볼 때 완전히 다르게 설명될 수 있는 영화들이 있다. 예컨대 <아라한…>도 영화사 좋은 영화의 작품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만약, <아라한…>이 싸이더스에서 만들었다면 다른 영화가 됐을 수도 있다. 그 시스템을 비평담론이 껴안는 것이 중요하다.

허문영 | 동의한다. 차승재라는 제작자의 불가피한 선택의 폭이 가장 불안정하면서도 극적으로 드러난 것이 지난해라고 생각한다. 그 극적인 충돌이 저널리즘이나 평단에 강렬한 연대의식이나 친밀감을 불러일으킨 것이 사실이다. 엄격히 말하면 차승재표 영화의 변화 조짐은 오래전부터 있어왔다. 기본적으로 자기 영화를 만들되, 다양한 영화로 장르의 변화에는 기여한다고 방향선회를 한 지 오래다. <범죄의 재구성>으로 갑자기 일어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