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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 네티즌과 김기덕 감독이 나눈 10문10답
2001-06-08

“주류를 조롱하고, 간지럽히고, 찌른다”

* <씨네21>은 네티즌들에게 그동안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접하면서 감독에게 궁금했던 점들을 <씨네21> 사이트에 올려달라고 청했습니다. 게시판에

올라온 질문을 10개로 재정리하여 감독에게 물었습니다.

하나. 제가 본 영화들은

대부분 영상에서 감독들의 전력이 고스란히 드러나곤 했습니다. 문학, 연극, 음악, 드라마 등 각자의 수련과정에 따라 영상도 차이를 보이곤 했거든요.

김기덕 감독의 영상감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무엇이었나요?

두 가지인데, 먼저 하나는 농촌에서의 성장, 농촌정서다. 사람들은 내 영화에서 회화성을 말하는데, 내가 정작 구사한

건 서정성이다. 9살 때 경상도에서 일산으로 이사와 오랫동안 농사를 지었다. 그 정서는 <수취인불명>에 물씬 담겨 있다. 농사짓는 정서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뿌리깊은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한다. 모를 심고, 벼가 자라나고, 쌀알이 하나하나 부풀면서 여물어가고, 서서히 노래지면서

고개를 숙이고, 그리하여 황톳빛 가을걷이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정서가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나한테 굉장히 깊이 각인됐고,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그렸던 그림, 미술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으로 내 안에 뿌리내렸다. 두 번째는 프랑스에서의 경험이다. 그때까지 내가 알고

있던 한국적 정서의 미술 위에 서양 정서의 미술작품을 보고. 프랑스에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런저런 외국작가들의 그림을 접하고, 현대미술작품을

구경했다. 세번 정도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각 나라의 현대 미술품 갤러리를 많이 다녔다. 프랑스 남부에서 내 나름대로 명명한 ‘반추상화’,

추상과 구상의 경계를 뒤섞는 그림을 홀로 했었고, 구체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때의 경험이나 느낌들이 고스란히 영화로 옮겨졌다. 지금까지는

내가 직접 미술을 맡았다. 내가 생각한 이미지를 그대로 구현해낼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파란 대문>의 정서는 어쩌면 나만이 아는

시골 정서이고, <수취인불명>은 70년대 정서다. <악어>나 <섬>은 독특한, 내 머릿속에서 떠올린 이미지 안에 있는 풍경들이기 때문에 직접

한 것이다. 독단적인 면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진행하고 있는 <나쁜 남자>는 보편적 사고 안의 도시, 사실적인 도시 이미지기 때문에 조감독이나

연출부에게 맡기는 편이다. 캐릭터를 내가 책임지고 미장센은 연출부에게 맡길 예정이다.

둘. 잔인하거나 충격적인

묘사 때문에 영화를 보고 불쾌한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의도적인 것인가요? 세상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나요?

오히려 역설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나. 우린 직설적으로 세상을 살아갈 때가 많다. 세상에서 직설적으로 볼

수 있는 무수한 현상들을 역설적으로 해석해보자. <섬>에서 사람들이 여자가 질에 낚싯바늘을 넣고 당기는 것을 엽기적인 걸로만, 충격적인 걸로만

이해하기보다는 이 여자가 무수한 남자들을 받아들였을 그 자궁을 이제는 닫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했으면 했다. 한국사회에서, 정을 주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믿음이라고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마음대로 변화하는 남성적 요구에 실망해서 언어를 버렸던 여인이, 이제는 자궁마저 닫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이런 추상성을 품은 이미지였다. 앞의 몇 장면만 상기해도 그 장면이, 상황이 충분히 이해가 갈 텐데 ‘김기덕, 넣을 데 없으니까 저기다

넣는구나’ 이런 식으로 단순히 이해해서는 안 된다. <수취인불명>에서는 창국이 엄마가 마지막에 창국이를 먹는다. 물론 입만 오물거리고 피도

안 보여줬지만. 이 땅에 자기 자식을 내놓았는데 아버지도 거두지 않고, 이 땅도 거두지 않고, 아무도 거두지 않는 자기 아들이 죽었다면 부모로서

얼마나 책임감이 엄청났겠나. 그렇다면 아주 유치하지만 먹음으로써, 자기 속에 다시 넣는 것이야말로 구상적인 해결책은 되지 않겠느냐. 그래서

자기 자신을 다시 불태워버리면 아무것도 없는 본래로 돌아갈 수 있다는, 반쯤 미쳐버린 엄마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단순히 먹어서 엽기적이다, 넣어서 엽기적이다, 이런 생각을 선행시키지 말고, 주변만 잘 짜깁기해서 조금만 재해석해보면 피해갈 수 있는 해석들이

가능하다. 물론, 충격적이다. 누군가 뒤통수에 돌을 던지면 우리는 ‘아야!’ 하고 돌아본다. 마찬가지다. 영화는 생략과 강조다. 에피소드가,

시퀀스가 필요하다. 시퀀스를 물고 들어가는 것이 결국은 낱낱의 사건들이고 그 사건들에는 자해와 가해와 피해가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자극이다.

그런 기초적인 자극이 없다면 단순한 표현들만 이어질 것이다. 영화가 관객한테 전시하는 어떤 것이라면, 전시는 무감각하면 안 된다. 때론 그것이

극단적일지라도 감각적인 요소를 끄집어내면서 주제를 제시하는 것이다. 좀 지나치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것은 ‘김기덕’적인 것이다. 내가 정말 놀래키려고

한다면 간단하다. <섬>에서 여자가 낚싯바늘 넣을 때 치마를 걷고 보여주면 된다. 손으로 벌리고 낚싯바늘 끄집어내는 것을 클로즈업하면 된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분명히 치마를 덮었고, 그냥 넣는 뉘앙스였고 단 한점의 살점도 보여주지 않았다. 내게 중요한 건 뉘앙스였으니까.

셋. 김기덕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지만

영화에 자주 반복되는 강간 코드는 좀 의문입니다. 왜 작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건가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비일비재한 사건들이 영화에서 전시되는 것을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영화라는 포장을 쓰고, 뭔가를

표현하는 화면으로 재생되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악어>에서 세번씩이나 강간하는 인간이라는 설정은 비극적인 인간성을 극적으로

강조하는 효과다. 강간장면을 세번이나 찍는 걸 어느 감독이 즐기겠느냐. 촬영현장은 그런 걸 즐길 만한 환경도 되지 않고 에로틱하지도 않다.

그건 캐릭터들을 설정하는 데 의미가 있었다. <악어>에서 용태는 다리 밑에서 시체나 건지며 살고, 뭍에 나오면 화투나 쳐서 돈이나 잃는 부랑자다.

그런데 이 사회는 버렸지만 자기한테는 희귀한 ‘여자’, 자기 인생에서는 한번도 스쳐지나가지도 못한 아름다운 여자가 물에 빠졌다면, 그리고 그것을

자기가 건져냈다면 끊임없이 자기 속으로 집어넣고 안 뺏기려고 발버둥칠 거라는 것이다. 그것이 ‘악어’라는 인간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야생성,

그런 표현들의 기초적인 내 발상은 야생성에서 기인한 것 같다.

넷. 영화를 만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영화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나요? 아니면 ‘세상은 이렇다… 어쩔래’ 하는 태도를 보이시는 건가요?

그것이 내 영화를 본 사람들이 갖는 모순인 것 같다. 내가 역설이라는 말을 자꾸 하는 것도 그런 의미다. 내 영화를 보면 저런 영화를 보면

세상이 선해지겠느냐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학력이나 재력 등을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갖고 있는 긴장감, 억압, 가진 자가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가하는 억압,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에게 갖는 이유없는 굴종, 위기감 이런 것들이 수평적이기를 바라는 거다. <파란

대문>의 창녀와 여대생은 둘 다 똑같이 여자고, 존중되어야 할 삶의 개체다. 그렇다면 둘 사이에 필요한 것은 수평적 이해일 뿐, 창녀가 어느날

창녀를 벗어나기를 원하거나 여대생이 어느날 창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진아란 여자가 거기서 창녀를 벗어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그것이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수많은 시간이 쌓여 형성된 현실이라면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뀌어야 할 것은 서로에 대한

오해가 풀리는 것,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다. <섬>도 마찬가지다. 남자와 여자, 이성이라는 이중구조가 서로 파괴하고, 질투하고, 욕망하고,

모든 것이 엉클어지지만, 결국은 그 모든 것이 ‘무’(無)라고 말하는 것이다. 아주 들어가버리면 그것이 바로 무가치가 아닐까. 내 영화가 당장

세상을 밝고 명랑하게 하지는 않겠지만, 아주 점진적으로, 바이러스처럼 번져서 사람들이 어떻게 전염되었는지도 모르게 감염되면 좋겠다.

다섯.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소수의

마니아적 지지를 얻고 있는데 자신의 팬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지?

마니아들이 있다면 고맙다. 하지만 난 이렇게 생각한다. 어쩌면 없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조장되고 있는 건 아닐까. 또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마니아가 아닐까. 내가 겸손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의 태도가 언제든 180도 바뀔 수 있는 여지를, 내 안에 갖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마니아라 해도 내 영화를 100% 이해하고 동조하는 마니아가 아니라, 어떤 이미지, 다양한 색채, 영화를 보는 느낌으로만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김기덕적인 사고, 김기덕이 이야기하는 보편적 인간주의, 수평적 관계, 계급적 관계 등의 주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동물적 느낌일까.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건지, 위기의식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들이 어느날 본

나 김기덕은 변해 있을 거다. 앞으로의 영화 만들기도 마니아들의 기대에 부응하거나, 부응하지 않거나를 염두에 두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섯. 등장인물들 중 여성의 모습을

보면 자기파괴적인 형태로만 세상에 저항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성 캐릭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여자를 다루는 것, 강간 등 가학적이고 극단적인 것들은 어쩌면 내가 바라보는 상대편에게 아쉬움을 많이

갖고 있기 때문 아닐까 싶다.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 모성결핍은 아니다. 스스로 원인을 캐보니까 내가 여자를 못 사귀었더라. 군대가기

전 딱 1명 겨우 사귀어보고, 그것도 남한테 뺏기고, 군대가서 5년 동안 해병대 생활했으니까. 남들은 스물에서 스물다섯 시절에 여자를 사귀고

거기서 많은 것들이 각인된다. 그런데 나는 해병대 제대하고 스물일곱엔가 처음 여자를 알았다. 여자에 대한 사고가 바뀐 것은 프랑스에 가서다.

거기서 여자를 사귄 것은 아니지만, 나체촌 등에 가서 ‘성’이라는 것의 자유로움, 나체촌의 10대 아이들이 발가벗고 배구하고, 할머니 아줌마들이

다리 벌리고 누워 이잡는 모습 등을 보면서 여자에 대해 상당히 나를 가둬왔구나, 내가 너무 여자를 모르는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여자를 보는

시각이 바뀌었다. 난 여자한테 용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택한 여자에 대한 표현을 많이 후회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왜

반드시 자기파괴적인 형태로 세상에 저항하느냐? <악어>에서 ‘악어’의 자해를 떠올려보라. 여자와 남자를 바꿔서 보라는 것이다. 여성에만 집중하지

말고 남성에게도 시선을 돌려보라. 여성들은 여성의 시선으로만 그 영화를 접하기 때문에 내면의 세계는 보지 않고 ‘여성이 당한다’라고만 생각하는

것 같다. 물론 이 사회에서 여성이 그토록 당하기 때문에 영화 속 장면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게 보는 경향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본다. 하지만

경계를 뛰어넘어 이면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보는 것이 내 영화인 것 같다. 단순히 강간장면에 분노해 자리를 박차고 나간다면 그런 질문을 할

자격이 있겠지만, 내 영화를 끝까지 봤다면 그런 질문은 슬프다.

일곱. 감독으로서

생존전략에 관해 질문하고 싶습니다. 비주류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는 게 어느새 하나의 생존전략처럼 보입니다. 스타를 기용하고, 제작비도 많이

들인 본격적인 상업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는지. 단지 기회가 안 돼서 그런 영화를 안 만드는 건지?

이번에 어느 주간지에서 ‘김기덕론’을 공모했다. 당선자는 나르시시즘에 대해 언급하면서 김기덕은 주류에 흡수될 수 없는,

주변부에도 흡수될 수 없는 비주류다, 그런데 은근히 주류사회에 편승하고 싶어하고 기웃거리고 있다, 기웃거리면서도 얄팍한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를 동경하고 있는 것 같다라는 기조로 글을 썼더라.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나는 당당하게 이쪽편에서 저항하는 것이지 그쪽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다. 곁눈질로 주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주류를 조롱하는 거다. 주류가 나에게 열등감을 느낄 때까지 주류를 간지럽히고 찌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비평을 뽑은 사람들이나 글쓴이는 나를 그렇게 본다.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갖는, 김기덕에 대한 경계심이다.

김기덕이 느닷없이 96년에 나와서 <악어>부터 5년에 6편을 내리 해댔는데, 그들은 그동안 거기에 대해 어떤 비평론도 내놓지 않았다. 홍상수론이나

이창동론은 나왔다. 그런데 김기덕론은 내놓지 못했다. 그들에게 있어 김기덕은 생전 잡아보는, 이름도 모르는 ‘생선’이다. 그래도 그들은 연구하고

해석했어야 했다, 끊임없이. 그런데 오히려 딴 사람들이 써온 나르시시즘 이론을 들이댈 때 동조하고 그런 생각을 편들 때, 나는 그들이 역설적

열등감이 있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왜 내가 그런 말을 하느냐. 물론 유명해지는 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다. 김기덕이 주류 감독이 되든, 비주류로서

한국의 대표적인 저예산 감독이 되든. 그것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고. 요즘 이제 김기덕은 이야기해야 한다고 떠들고 있다.

나는 3년 전에 이미 생각했다. 예측했다기보다 그 사람들이 당황하는 시기가 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나름대로 정립된 사고체계를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것을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수취인불명>에서 비로소 변했다고 그 사람들은 믿고 있겠지만, <악어>에서

이미 나의 고유체계는 성립됐다. 다만 그것이 낯설어서, 생소해서 그들이 해석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모든 상황이 나에게는 전혀 변화가

아니다. 조금 대외적 인물이 되고, 여러 사람이 김기덕에게 제작비를 좀더 대주려 한다는 것, 이런 것들은 <악어> 때나 지금이나 나한테는 별로

큰 변화가 아니다. 사실 <악어>나 <야생동물 보호구역> 만들 때 돈없어서 못 만든 것이 아니었듯이, 지금 <수취인불명>이나 다른 신작들을

만드는 것도 돈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내 의지, 그 영화를 할 의지가 있느냐의 문제다. 내 근본적 태도가 바뀌면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상황>만큼 용기있게 영화를 만든 적이 없다. 한국에서 <실제상황> 같은 영화 만든 감독 있었나? 없었다. 그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누군가 3억을 대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3시간20분 안에 찍겠다는 것, 제작자와 투자자를 용감하게 무시하겠다는 것. 난 아무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제작자나 투자자가 어떤 신인감독이 그걸 하겠다고 했으면 동의했을까. 나는 내 나름의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생각한다. 김기덕이 유명해지는 것은 저절로, 내 의지와 상관없이, 시간과 이해에 의해 나에게 누명처럼 씌워지는 것일 뿐이고.

여덟. 감독님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꿈꾸는 세계는 어떤 곳인가요? 이는 곧 감독님이 꿈꾸는 세계이기도 할 텐데…. <파란 대문>처럼 창녀와 대학생이 어깨동무하는

곳인가요?

세상엔 마이너스와 플러스, 낮과 밤, 남과 여 등 어떤 대립적인 체계가 있다. 그 체계 속에서 대립적인 두 가지가 충돌하며

트러블을 일으키면서 역사가 흘러간다. 그런 범주 안에서 인간과 인간이 치열하게 부딪치며 살아가지만 그것이 수평적인 트러블로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것, 그걸 말하고 싶은 거다. 김기덕 영화가 있다면 홍상수 영화가 있는 것이고, 곽경택 영화가 있는 것이고, 박찬욱 영화가 있는 것이고 이것들이

상대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이창동, 홍상수 감독이 인간의 극지점이라고 생각하나. 인간체계의 최고점이라고 생각하나.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보기에 김기덕적인 것이 또다른 매력이 있을 것이고, 내가 보기엔 이창동, 홍상수가 상대적으로 부러운 점이 있다. 그것들이 사실은

에너지다. 난 그런 것들이 공유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개개인은 진동처럼 치열한 오르내림, 높낮이가 있지만, 멀리서 부감으로 보면 수평적으로

진행되는, 그런 것을 원하는 거다. 어느 한순간 한 가지 에너지, 즉 낮이 밤을 지배하거나,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거나 한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

아홉. 감독님의 영화를

조금씩 좋아하게 됐지만 왜 표현방식이 그렇게 거칠고 잔인하고 섬뜩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꼭 그렇게 해야만 감독님의 의도가 살아나는 것인가요?

그렇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단순히 그렇게만 봤다면 영화를 잘못 본 것이다. 그렇게만 해석한다면. 내 영화를 본 뒤 그것만 마음속에 남아

있다면. 내 영화를 다시 한번 본다면 그런 생각이 바뀔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꼭 나의 사고체계처럼 이해할 필요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다. 그건 단지 느낌으로만 전달되는 것이다. 영화가 그 사람에게 엽기적으로 느껴졌다면 그건 내 표현의 문제라기보다 그 사람의 성향이 개입된

것이다. 그 사람이 그런 것으로만 세상에 대해 가치판단을 해왔다면, 어떤 현상에 대해 판단한다면, 김기덕을 좋아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의 속성의 문제일 것이다.

열. <수취인불명>에서 창국이 거꾸로

처박혀 죽어 있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감독님께선 그 장면에서 관객이 어떤 반응을 보일 거라 생각하셨는지. 그런 죽음을 통해 의도한 바가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그 장면에서 많이들 웃더라. ‘역시 김기덕이 또 한건 하려고 하는구나’ 생각하는 것 같더라. 창국 어머니가 기름 뿌리고

땅 파내고 할 땐 조금 숙연해졌지만. 그건 창국의 정체성에 관한 장면이다. 그는 이 땅에 묻힐 수 없다는 걸 말하고 싶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나도 반쪽은 이 땅의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묻었지만, 엄마는 그가 이 땅에 묻히면 안 된다며 먹어버린다. 창국은 어쩌면 간절하게 이 땅에

묻히고 싶었을 거다. 그것이 더욱 비극적으로 보이는 것은 겨울에서야 발견되어 얼음을 녹이고 끄집어내서 리어카에 싣는 상황이다. 가을에 추수를

하고 난 물렁물렁한 논바닥에 빠졌는데, 냉정하고 차가운 겨울에 발견되는 아이러니 말이다. 게다가 그대로 깊이 파묻을 수도 있는 것을, 기어이

불을 피워 땅을 녹여서 빼낼 수밖에 없는 그 절박함. 이 땅에 결코 묻히게 할 수 없다는 처절한 어떤 것, 그리고 어머니의 고통을 말하고 싶었다.

위정훈 기자

▶ 김기덕,

한국영화의 낯선 ‘섬’

▶ 상처와

고름의 미학

▶ 네티즌과

김기덕 감독이 나눈 10문10답

▶ 김기덕이

말하는 `영화만들기 1996~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