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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충무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
이영진 2004-06-16

‘돌격건설’이라는 표현만큼 적절한 것은 없었다. 1966년부터 남한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고가도로를 세우고, 아파트를 짓고, 대규모 상가를 마련했다. 한강의 기적은 ‘자식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야 한다’는 옛말을 굳이 부모가 일러주지 않더라도, 알아서 지방의 아들과 딸이 서울을 찾는 기이한 풍경을 만들어낼 정도로 파급이 컸다. 가난을 입에 물고 살던 시절. 스크린의 환영이 던져주는 낭만만큼 현실의 배고픔을 망각하게 하는 최면제가 있었을까. 충무로가 동경의 공간으로 여겨졌고,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충무로에 걸었다. 그러나 정작 충무로로 뛰어든 이들의 삶은 각오로 버텨내기에, 열정으로 지탱하기에는 지나치게 가혹했다. “그거 쓰면 누가 보려고나 하겠어.” 30년 전 충무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라는 호기심에 당시 활동했던 영화인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과거가 조롱의 대상이 될까봐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이내 추악한 시대를 버텨낸 자신들의 삶을 긍정했다. 1970년대 그들의 삶을 재구성하면서 무척 조심스러웠던 것은 잊고 있었던 그들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한다는 뒤늦은 의무감 때문이었으리라.

편집자

도움주신분(가나다 순) l 김수용(감독·영상물등급위원회 위원장), 김영인(배우), 김철석(특수효과), 백영호(스틸), 양춘(부산극장 영업전무), 이장호(감독·전주영상위원회 운영위원장), 이태원(태흥영화 대표), 이해윤(의상), 장미희(배우), 정일성(촬영감독), 정종화(영화연구가)

자료협조 l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진흥위원회 서울종합촬영소, 김태우(신영필름 대표), 이태우(소품), 권순일(의상), 장성린(의상)

참고자료 l <영화잡지> <근대의 풍경-소품으로 본 한국영화사> <서울, 20세기-100년의 사진기록> <한국영화 기술사 연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