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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충무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
이영진 2004-06-16

70년대 10년차 조감독 K씨의 하루 과거여행

대신여관에서 아침 잠을 깨다

K는 요즘 술을 먹다 말고 종종 정신을 잃는다. 간밤에도 동료 P군의 등에 업혀 이곳까지 왔던 것 같다. 보나마나 충무로(주1) 대신여관 202호일 것이다. 벌써 3일째 외박이다. 스카라극장 뒤편 대폿집에서 삿대질한 것까진 기억이 난다. 그뿐이다. 누구랑 언성 높이며 싸웠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내가 뭘 어쨌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P가 잠꼬대를 한다. 만사 무덤덤한 P인데, 꿈에서만큼은 그도 성깔을 돋우나 보다. ‘상대가 혹시 나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K는 무거운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방의 불을 켠다. P는 얼굴만 내놓은 채 때가 꼬질꼬질한 이불을 몸에 두르고 있다. 고치를 만들고 있는 누에 같기도 해서 K는 웃는다. 괘종시계가 곧 4시를 가리키기 직전이다. 거울을 보니 웃음이 가신다. 땀과 먼지로 번지르르, 누리끼끼한 머리. 까치집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다. 누가 보기라도 하듯 K는 머리 속을 헤집는다. 갑자기 두통이 밀려온다. 통금(주2)해제를 알리는 사이렌이 앵앵거린다. 전 국민의 기상소리이기도 한 사이렌에 K의 뇌수는 엇박 장단으로 요란하게 출렁인다.

“오늘은 로케가 어디여?” 어둠 속에서 누군가 K에게 아는 척한다. 공동세면장에서 푸석한 얼굴에 물을 적시다 말고 K는 고개를 든다. 가만보니 입담 좋기로 소문난 S다. 얼마 전에 조감독이 됐는데 그뒤로는 동급이라고 반말이다. ‘확 세숫물을 이 놈 면상에 끼얹어버려.’ 빈정대는 놈을 혼내주고 싶지만 시비 걸어봤자 자신에게 좋을 일 아니라고 K는 마음을 다잡는다. 충무로밥 먹은 지 10년차 조감독에게 돌아올 것이라곤 ‘못난 놈’이라는 수근거림밖에는 없을 테니. “이제는 장가들어야제.” 편지에 여염집 처자의 흑백 사진을 매번 동봉하시는 어머니 얼굴이 불현듯 떠올라 K는 수건으로 얼굴을 빡빡 문지른다.

워커(주3)로 갈아신고 여관을 빠져나오니 벌써 새벽 4시30분. 쓰린 속을 멀건 국물로 채우려고 제일옥부터 찾는다. 몇년째 내리 충무로가 불황이어선지 한눈에도 빈자리가 더 많다. 앉아 있는 이들은 얼굴을 잘 모르는 뜨내기들 투성이. 언제나 파이프 물고 중절모 쓰고 백구두 신어 눈길을 끄는 단역배우(주4)만이 아는 얼굴이다. 이 모든 것이 TV(주5) 탓이다. ‘벗기기, 눈물짜기, 베끼기 아니면 할 줄 아는 게 무어냐’고 힐난하지 않나. 충무로는 저질영화의 온상이라는 달갑지 않은 최근의 세평이지만 K는 신경쓰지 않으려 한다. 다 한때 충무로에 몸담다가 TV로 옮겨간 철새들의 험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그는 믿고 있다. # 충무로통신 청맥다방에 집결

청맥다방(주6)만큼은 그래도 북적인다. 일찌감치 아침식사를 해치운 스탭들이 삼삼오오 패를 지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XX이가 통 안 보이네.” “이 사람아. 그것도 모르나. 지난번에 잽혀서 군대 갔잖아.” 군입대 기피(주7)하다 끝내 징집된 Y 소식이다. 충무로 참새들의 방아찧기는 쉴새없이 이어진다. 주먹 좋기로 장안에 소문난 액션스타 OOO이 촬영을 펑크낸 뒤 적반하장격으로 만취한 상태에서 새벽에 감독의 집에 찾아가 “이 바닥에 발을 못 붙이게 하겠다”며 폭언을 퍼붓고 소동을 벌였다는 이야기가 그 다음이다. 어제는 청와대 앞에서 도둑촬영(주8)을 하다 경찰의 제지에 공보실에서 대한뉴스 찍으러 나왔다고 거짓말을 해 위기를 모면했다는 이야기가 그 다음. 육감적인 몸매로 유명한 OOO가 이번 영화에서 완전히 벗었네, 안 벗었네 하는 논란까지 이를라치면 심지어 멱살잡이라도 할 듯 하다. 이곳 청맥다방 구석에선 손 하나 까딱 안 해도 어젯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할 수 있다.

집합시간이 다 된 듯해서 눈을 떴더니 차가운 커피가 놓여져 있다. 시키지 않아도 언제나 놓이는 커피. 숭늉 마시듯 텁텁한 목구멍으로 후루룩 넘기고 나오는데 레지가 초면이다. 얼굴이 곱상한게 배우지망생인 듯하다. 묻지 않아도 알겠다. 그녀 또한 보따리 짐을 싸들고 혈혈단신 상경(주9)해 물어물어 이곳까지 흘러들어왔을 거다. “차값은 달아둬” 주인 아지메가 ‘밀린 외상값은 언제 줄 거냐’고 닦달할 찰나, K는 날쌘 맹수처럼 다방을 빠져나온다. 뒤통수가 따갑다.

주1 l 충무로

일제시대 명동과 함께 일본인 상권 지역으로 번성했지만,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완전히 폐허가 됐다. 1950년대 말 변순제라는 제작자가 이곳에 서라벌영화사를 차린 것이 영화사로는 처음이라 한다. 명동에 머물렀던 유명 영화제작자들도 상가가 형성되어 지가가 오르자, 1960년대부터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사진 왼쪽에 있는 명동칼국수는 김지미의 단골집. 여배우로는 드물게 김지미는 충무로 나들이를 자주 했는데 이유는 이 칼국수를 먹기 위해서라고.

주2 ㅣ 통행금지1960, 70년대 충무로에는 60개에 달하는 여관이 있었다. 이들 여관의 성업이 가능했던 건 다름 아닌 통행금지 덕. 1년364일(성탄 전야는 예외였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는 출타금지였다. 작가와 감독이 시나리오 각색을 위해 동신여관을, 스탭과 엑스트라 등은 숙소로 대신여관, 태창여관 등을 주로 이용했다 한다.

주3 ㅣ 워커

현장 스탭들의 차림은 주로 군용물자로 해결했다. 신발은 웬만해선 닳지 않는 워커. 위 아래는 1970년대까지도 변색시킨 군복을 입고 다녔다. 제대한 이들이 팔아넘긴 군복을 사들여 검은색으로 물들인 다음 다시 시장에 내다파는 이들이 청계천변에 따로 있을 정도였다.

주4 ㅣ 단역배우

단역배우로 김칠성씨는 서대문형무소 뒤 하꼬방에 살았다. 말끔한 멋쟁이 양복 차림의 그는 매일 해뜨기 전에 출근했다가 통금시간이 다 되어서야 퇴근하는 걸로 유명했는데, 누군가 이유를 물었더니 “사람들한테 꿈을 주는 직업인데 후줄근하게 사는 것을 보일 수 없어서 그랬다”고 답했다 한다.

주5 ㅣ TV1970년대에 영화는 텔레비전을 추격해야 하는 상황이 된다. 1968년 텔레비전 수상기가 불과 12만대 정도에 머물렀던 것이 1973년에는 무려 130만대로 껑충 뛰었다. <영화잡지> 등도 1970년대 들어 전과 달리 브라운관이 배출한 스타들에 주목하고, 연속극 제작 현장 탐방기사를 적극적으로 실었다.

주6 ㅣ 다방스타다방은 액션배우들이, 청맥다방은 스탭들이, 수도다방은 지방흥행사들이, 벤허다방은 감독들이 주로 드나들었다. 이중 계산대 옆에 시나리오가 수북이 쌓여 있었던 청맥다방은 충무로 인력시장이라 불렸다. 이곳의 주인 아지메는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 연락이 쉽지 않았던 그 시절 수백개의 전화번호를 외워 목구멍이 포도청인 영화인들의 길잡이 노릇을 해줬다. 사진은 1960년 충무로 스타다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배우 전택이와 노경희. 부부인 이들은 <춘향전>(1955), <애원의 고백>(1957) 등에 함께 출연했다.

주7 ㅣ 병역기피

이순신의 시호를 따왔지만, 충무로는 대표적인 군 기피자 집합이기도 했다. 로케다 뭐다 해서 팔도 유랑을 하는 데다 거처 또한 명확지 않으니 징집 대상자라 해도 좀처럼 잡을 수가 없었을 것. 촬영하러 가다 검문소에서 제지당하면 제작부장이 나서 얼마간의 돈을 쥐어주며 눈 감아달라고 통사정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주8 ㅣ 도둑촬영

카메라 들고 튀어라! 영상위원회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도둑촬영은 빈번했다. 1960, 70년대 카메라를 드리워선 안 되는 첫번째 금기 대상이 청와대. 김수용 감독은 그 앞 은행나무 길을 몰래 찍었다가 윤정희의 팬이었던 박근혜씨가 영화를 보자고 했고, 그에 앞서 영화를 본 대통령 비서실에 의해 하룻밤 철창 신세를 진 적 있다.

주9 ㅣ 상경

1960년대 서울역에는 큼지막한 트렁크에 꿈을 담아 무작정 상경하는 소녀들을 꾸짖어 돌려보내려는 경찰까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