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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충무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3]
이영진 2004-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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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탭, 단역배우에 카메라, 소품까지 한차로

오늘 촬영은 창동 근처다. 지금쯤 제작부장은 여배우 N 양의 안국동 자택에서 불침번을 서고 있을 것이다. 10편이나 가께모찌(주10)하는 N 양은 지난번엔 심지어 다른 영화 제작부장에게 납치까지 당했다. 그 일로 사장에게 밥값 못한다고 핀잔을 먹은 제작부장은 공주를 호위하는 무사마냥 눈에 쌍심지를 켜고 있을 게 뻔하다. 한때는 주먹으로 먹고살던 제작부장이었지만 눈에 잔주름이 생긴 뒤로는 위세가 예전 같지 않다.

“다 탔는감? 그럼 일터로 가보자고.” 인원을 눈으로 체크하고서 K는 ‘오라이’하고 생기없는 목소리를 낸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것을 기다렸던 버스에 시동이 걸린다. 변비 걸려 헛방귀 뀌는 것마냥 버스는 털털거리며 매연을 내뿜는다. 스탭과 단역배우들은 물론이고 카메라부터 소품까지 모조리 집어삼킨 버스는 터지기 직전 김밥 같다. 뒤에서 보면 영락없이 뒤뚱거리는 오리 모양일 것이다. 그래선지 가다가 곧잘 고장이 난다. 그럴 때면 이동하다 말고 소변을 일부러 짜내야 하고 청자 담배 한대를 축내야 하지만 오스틴(주11)을 타던 시절보다 먼지는 덜 먹어서 좋다. 오늘 같으면 오전 9시가 되기 전에 도착할 것 같다. 배우에게 프롬프터(주12)할 대사를 한번 읽어본 다음 K는 지난번 영화에서 만났던 허리가 잘록해 옷 매무새가 예쁜 신인여배우 J를 떠올리며 새우잠을 청한다. # 제작부장, 여배우 낚아채오기

“N은 어떻게 된 거야. 아직 코빼기도 안 보이고.” 성난 황소처럼 감독이 씩씩거린다. 그래도 분이 안 차는지 급기야 연출부 막내 손에 들린 지랄통(주13)을 빼앗아 ‘뻥’ 하고 차버린다. “사다 미용실(주14)에서 늦어지나봅니다.” K가 나서보지만 감독의 안면근육은 진동을 멈추지 않는다. 저러다가 안 그래도 면상에 꽉 끼는 선글라스가 박살이 날 것만 같다. 아무것도 모르는 열여섯 막내는 비탈 아래로 굴러떨어진 지랄통을 주워오느라 얼굴이 새빨갛다. 그걸 보면서 K는 N양이 어젯밤 정가의 누군가에게 불려갔을지도 모른다는 추측까지 해본다.

감독이 저러는 데는 본인의 캐릭터도 그러하지만, S군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남자배우로는 최고 인기를 구가하고 있지만 요즘 그의 주가는 트로이카 여배우에 비해 상대적으로 떨어져 있다. 대부분의 영화들이 여배우를 위한 영화이고 보니 그에게는 보조 역할만 돌아오는 것이다. S군. 그가 누군가. 웬만한 스타급 여배우들의 데뷔 시절부터 자신이 리드하며 짝을 이뤄왔다. 그렇다보니 충무로를 호령하는 여배우들의 안하무인이 눈에 거슬리기도 할 것이다. 200만원이 넘는다는 N양의 외제승용차(주15)가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촬영장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여배우가 보는 앞에서 마가진(주16) 열어서 필름 다 버리라고 할 것 같았던 감독은 언제 그랬냐는 듯 소품, 의상을 맡은 이들을 채근하며 촬영을 재촉한다.

주10 l 가께모찌

연간 출연 작품이 50편을 넘는 스타들이 적지 않았다. 그랬으니 1970년대 말까지 스타급 배우(사진은 <속 별들의 고향> 출연당시 장미희)들은 주로 차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1960년대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라기보다 건달 출신 제작부장들의 출연 협박에 못이겨 겹치기 출연이 성행했다는 말도 있다. 제작부장들끼리 결투를 벌이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는데, 한때 제작부장들은 합의에 따라 오전, 오후, 밤으로 배우의 스케줄을 쪼개 나눠 쓰기도(?) 했다. 그러나 유효기간이 지난 필름을 쓰던 때였으므로 구름이 조금이라도 끼면 촬영이 지연됐고 배우를 데려가려는 쪽과 배우를 붙잡아두려는 쪽의 몸싸움은 계속됐다. 피곤에 지쳐 배우가 꿈쩍하지 않자 추운 겨울 배우의 집 앞에 놓여 있는 얼음이 둥둥 뜬 방화수에 들어가 침묵 시위를 벌인 제작부장도 있었다고.

주11 l 오스틴(Austin)2차 세계대전 당시 쓰였던 영국 오스틴사의 군용트럭. 1970년대 버스와 삼륜차가 등장하기 전까지 충무로 스탭 및 영화기자재의 주된 운송수단이었다. 짐칸은 포장을 쳤는데, 덜컹거리는 그 안에서 스탭들은 잠을 청하거나, 한술 더 떠 화투를 치는 이들도 있었다 한다. 겨울에는 난로를 피우다가 화재가 난 것도 여러 번. 오스틴은 운송 외에도 영화 촬영을 위한 대도구(大道具)로도 사용됐다. 사진은 정창화 감독의 <지평선>(1961)에 등장한 오스틴.

주12 l 프롬프터(prompter)배우가 볼 수 있도록 실런더 모양의 기구에 각종 대사를 부착해놓은 것을 부르는 말이지만, 충무로는 그 역할을 대개 조감독이 대신했다. 물론 감독이 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만추> <돌아오지 않는 해병>의 이만희 감독은 대사를 부르는 타이밍이 신의 경지였다고 한다. 이규웅 감독은 감정몰입을 해서 대사를 불러주는 스타일이라 몸이 덜 풀린 배우들로선 적잖이 당황하곤 했다. 사진은 김지미, 김혜정이 출연한 유현목 감독의 1964년작 <아내는 고백한다>의 촬영현장. 사진 가운데 앉아서 시나리오를 읽는 사람이 프롬프터 역할을 맡고 있다.

주13 l 지랄통쪼다통이라 불리기도 했다. 달군 숯 위에 연막탄을 넣은 깡통. 이를 돌리면 안개가 피어오르는 효과가 난다. 바람 부는 날엔 엉뚱한 방향으로 연기가 올라 지랄통, 지랄통을 돌리는 이는 현장에서 웃음거리가 된다 해서 쪼다통이라 했다.

주14 l 사다 미용실충무로 2가에 위치했으며, 이곳을 들락거려야 스타급 여배우로 인정받았다. 당시 한 연예잡지는 여배우들이 머리를 매만질 때 뭘 하는지에서 캐릭터를 엿볼 수 있다며, 윤정희는 독서를, 남정임은 수다를, 문희는 사색을, 김지미는 흡연을 한다고 썼다. 사진은 사다미용실에서 머리를 다듬고 있는 여배우 유미. 선배 스타들의 단골집이어서가 아니라 앞선 미용기술과 서비스가 맘에 들어서 자주 찾는다고 한마디.

주15 l 외제 승용차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스타들은 군용지프를 개조해서 만든 최초의 국산승용차 시발택시를 타고 다녔다. 1970년대 들어서 코티나, 크라운, 포드, 무스탕 등의 외제승용차를 구입했던 이들은 1970년대 중후반 국산 포니가 출시되자 너도나도 애마를 바꾸었다.

주16 l 마가진(Magasin)촬영시 필름을 장전시킬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암실상자. 정진우 감독은 <초연> 촬영 당시 가께모찌로 인해 피곤한 여배우가 약속시간에 늦은 데다 촬영 도중 잠에 곯아떨어지자 화가 나 실제로 마가진 속 필름을 모두 꺼내 강물에 버리기도 했다. 1975년에 개봉한 <초연>은 이 사건 이후 주연 여배우를 교체한 다음 재촬영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