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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충무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4]
이영진 2004-06-16

후시녹음, 대사 불러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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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이 있으면 무슨 말이라도 좀 해보시어요.” 불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여주인공이 앞서 걷는 남편을 붙잡고 따지다 혼자 남아 울부짖는 장면이 오늘 촬영 분량. 카메라 옆에서 K는 N에게 아무 감정을 넣지 않은 대사를 불러주지만 밤샘촬영까지 하다 차에서 잠깐 눈을 붙인 것이 전부인 N은 자꾸 “말이 있으면 무슨 입이라도 좀 해보시어요”라고 잘못 왼다. 그러나 갈 길 바쁜 감독은 개의치 않고 카메라를 돌린다. 어차피 성우가 후시녹음을 할 것이니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상대역인 S는 이미 촬영장을 빠져나가고 없다. N이 애원하는 상대의 뒷모습은 S가 아니라 S와 체구가 비슷한 보조출연의 것이다. 카메라 뒤편으로 다소 비껴 서 있는 스탭들은 킥킥대고 있다. 손 한쪽을 내준 것뿐인데 스타의 온기를 느낀 보조출연의 몸은 뒤에서 보는 K의 눈에도 뻣뻣이 굳어 있다. 양복 안에 가려진 그의 심장은 콩닥콩닥 정신없이 펌프질을 하고 있을 것이다. ‘카트!’ 감독은 주위를 둘러본다. 동의를 구하는 듯한 눈치인데 다들 꿀먹은 벙어리다. “자 그럼 점심 먹고 만리동 스튜디오(주17)로 넘어가자고.”

# 지방흥행사 꼬드기기

점심이라야 별게 없다. 단무지와 시금치를 넣은 김밥이 전부다.

“저녁에는 진고개에서 불고기 구경 좀 할 수 있으려나 몰라.”

“오늘 지방에서 그 어른이 올라오신다던데.”

“누구 말이에요?”

“지방흥행사(주18) R 말이야. 내 아까 N의 매니저한테 들었는데 제작부장이 R을 모시러 사장하고 같이 서울역에 나갔다고 하더라고.”

“지난번에도 요란하더니만 입 씼고 그냥 내려갔잖아요.”

“급료 못 받은 것이나 제대로 받을 수 있으려나.”

“그거 받아서 누구 코에 붙이려고. 제작자한테 연수표(주19) 받아서 현금으로 바꿔봤자 얼마나 된다고. 하룻밤 술값이지.”

스탭들의 대화를 듣다 말고 K는 지난번 시나리오 독회(讀會) 때를 떠올린다. 독회(주20)는 대개 시나리오 작가가 하게 마련인데, 내심 점찍어 둔 배우를 쓰지 않았다고 작가가 감독과 언쟁 끝에 틀어지는 바람에 조감독인 K가 긴급 투입됐다. 여관에 짐을 푼 지방흥행사는 담배만 뻐끔뻐끔 피우면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서라벌예술대학 출신인 그는 다른 조감독들에 비해 실감나게 대사를 읊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고 자부하고 있던 터라 적잖이 당황했다. 행동이 굼뜨다는 평을 들으면서도 지금껏 조감독 일을 하고 있는 것이 독회 실력 때문이라고 믿었는데.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까. K가 비장의 무기를 꺼내려는 찰나 R이 묵언을 깼다. “신인은 아무래도 어렵지 않겠어. 여배우를 바꾸지 그래.” R은 캐스팅이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촬영은 시작됐지만 N양으로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객기와 배포만으로 전주(錢主)한테 개겼다가는 ‘꼬르륵’ 배곯기 딱 좋으니. 원하는 대로 됐으니 R이 한턱 낼지도 모르겠다고 K 또한 은근한 기대를 품는다. 그러고보니 문제의 N양은 쌩 하고 가버려 없다.

주17 l 스튜디오1962년 영화업 등록제가 시행된 이듬해 박정희 정권은 군소 제작사를 정리할 목적으로 건평 200평 이상의 스튜디오에 35mm 카메라, 조명기 등을 갖춰야 영화제작을 허한다는 내용을 영화법에 포함시켰다. 하지만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이라 편법이 자행됐고 방앗간에 가짜 전원스위치를 만들어놓아도 제작사 허가를 받았다. 사진은 신필림의 원효로촬영소 세트장 외경.

주18 l 지방흥행사촬영 도중에도 배우가 맘에 안 들면 갈아치웠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갖고 있던 전주(錢主). 당시 영화제작은 입도선매(立稻先賣), 즉 지방에 미리 상영 판권을 넘긴 돈으로 제작이 이뤄졌는데 따라서 지방흥행사가 상경하면 서울역에선 서로 모시려는 제작자들의 다툼이 있었다.

주19 l 연수표당시 개런티는 현금 대신 연수표(약속어음이라고 보면 된다)로 지급됐다. 그러나 당장 현금이 필요한 이들로선 와리깡(할인)으로 손해를 보더라도 현금으로 바꿔 썼다. 문제는 이를 악용한 일부 제작자가 있었다는 사실. 연수표 내주고 난 다음 그 자신이 와리깡 사업을 벌이거나 일부러 부도를 내는 등의 일이 있어 현장 영화인들의 원성을 샀다.

주20 l 독회상경해서 충무로 여관에 짐을 푼 지방흥행사 앞에서 시나리오를 읽는 일. 좀처럼 눈길 주지 않는 콧대 높은 지방흥행사 앞에서 시나리오 작가, 감독, 제작자는 구성진 변사 역할을 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