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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충무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5]
이영진 2004-06-16

# 아교로 수염 붙이는 액션배우의 한말씀

오후 촬영은 3시가 넘어서야 느지막이 시작됐다. 액션배우 H의 턱은 살점이 여러 군데 떨어져 나가 더욱 험상궂었다. 그는 사극에도 겹치기 출연을 하고 있었는데, 아교(주21)로 수염을 붙였다 뗐다 하다 보니 상처가 생긴 것 같았다. 유니폼이랄 수 있는 흰색 양복 차림에 백구두를 신고 나타난 그는 피곤에 지쳐 보였다. 게다가 한쪽 팔은 기브스를 한 상태였다. 사정을 들어보니 액션영화를 찍는 도중 뒤로 돈 상태에서 담장에서 뛰어내리는 갸꾸라팅(주22)을 하다 그런 것이라 했다.이번 영화에서 “남편의 불륜 사실을 회사에 퍼트리겠다”고 N을 협박하는 건달 역으로 출연하는 H는 20년 넘게 악역만 맡다보니 인상을 쓰지 않아도 얼굴에 골이 패 있다.

“조감독 하기 힘들지?” 잠깐씩 보는 것이지만, 지난 세월이 10년이요 같이 찍은 영화만 해도 수십편은 될 터. K는 H에게 호감을 느껴왔다. 입이 심심할라치면 그동안 자신이 출연한 영화 목록을 일러주며 죽을 뻔했던 위기의 순간들을 박진감 있게 묘사하는 H. 그가 남 같지 않았다. 항상 몸을 아끼지 않는 대배우 H의 인생역정이라는 주제로 귀결되는 뻔한 스토리였지만, K는 맞장구쳐가며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게 언제서부터인지는 모르겠다. 타향생활에서 느끼는 외로움 때문일까. K는 H에게서 밭 갈아 모은 꼬깃꼬깃한 돈을 얼마쯤 떼내 뒷주머니에 꼽아주곤 했던 큰형의 손길을 느낀 적이 여러번이었으니까.

“자. 마지막 찍고 오늘은 쫑 하자고.” 몽타주컷을 몰아 찍은 감독은 H에게 ‘형님’하더니 전화를 거는 장면을 찍으면서 몇가지 표정 연기를 요구한다. 그런 것 쯤은 식은 죽 먹기라는 듯 건성으로 듣는 H. 보조출연 중 누군가가 실수로 H의 팔을 건드리고 뺨이라도 맞을 것 같아 어쩔줄 몰라하자 한번 주위를 쓰윽 하고 둘러보더니 “괜찮아, 괜찮아. 뭐 이 정도 가지고”하고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정말 괜찮은 것일까. 그건 알 수 없다. # ‘실탄’ 떨어지고, 제작부장 볼모로 남겨두고

역시 지방흥행사 R은 짠돌이였다. 그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잠깐 현장을 둘러보고는 곧장 광주로 내려갔다고 했다. 어음 몇장과 현금을 내놓긴 했지만, 그건 K나 그 밖의 스탭들에게 돌아올 돈은 아니었다. 제작부장의 시무룩한 낮빛을 보니 R이 꺼내놓은 제작비 또한 넉넉한 액수는 아니었던 것 같다. 내일부터 당장 전남 순천으로 지방 로케를 가야 하는데 실탄이 부족하니 그럴 수밖에.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내일 촬영일정을 일러주고 들어선 어제의 대폿집에서 제작부장은 “이번에도 또 똘똘이(주23) 신세가 되겠네”라고 한숨지었다.

식당과 여관의 밀린 외상값을 갚지 못하면 누군가는 남아서 이제나저제나 전주를 기다려야 할 일. 그 몫은 언제나 제작부장의 것이었고, 일본에 볼모로 잡힌 백제의 왕자 노릇를 그는 연기해야 했다.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어버린 여인의 꼴이 되면 안 될 터인데. K는 제작부장의 넋두리를 들어주다가 그날도 정신을 잃었다. 통금이 다 된 시각, K는 만취해 제작부장의 등에 업혀 또다시 대신여관 신세를 졌다. 다음날 아침. K는 그나마 202호가 아닌 방이라는 사실에 적이 만족해야 했다.

주21 I 아교흉터 분장은 껌이나 돼지고기(여름에는 일찍 상하다보니 냄새가 지독했다) 등을 이용했다. 흑백영화에서 먹물을 썼던 피는 컬러영화가 일반화되자 토마토케첩에 물엿과 빨간색 물감을 섞어 만들었다고 한다. 사진은 <지옥은 만원이다>의 이예춘과 김희갑(왼쪽), <몽녀>의 김지미(오른쪽). 이 장면은 검열로 인해 잘려나갔다.

주22 I 갸꾸라팅역촬영. 뒤돌아 담장을 뛰어내리는 것을 역촬영해 담장을 뛰어오르는 효과를 냈다. CG라곤 없었으니 줄을 지우지도 못하고, 와이어라는 것도 한줄인데다 고작해야 건너뛰거나 위아래로 왔다갔다 하는 정도였다. 지금처럼 장비를 갖춘 것이 아니라 나일론 갓바에 외줄을 매단 것이라 액션을 취하기 힘들어 갸꾸라팅이 많이 이용됐다. 뛰어내릴때 옷자락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막기 위해 의상은 바느질을 했다. 촬영을 위해 실탄을 쏘던 시절의 풍경이다.

주23 I 똘똘이제작비가 넉넉지 못해 밀린 숙박료를 주지 못할 경우 제작진은 누군가를 볼모로 남겨놓고 지방 로케를 떠나곤 했는데 남은 이들을 부르는 말. 돈이 올라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이들은 외상으로 군것질을 했는데, 나중에 외상값을 받지 못하고 장사치들 또한 스탭으로 결합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를 인어꼬리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