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섹스&시티> 여자들의 욕망에 대한 재교육

“자위할 때 어떤 남자를 상상해?” “(입모아) 러셀 크로!” “아, 러셀 크로 전엔 도대체 누굴 생각하면서 자위를 했던거야?” “(다시한번 입을 모아) 조지 클루니!!”

“뭐 저런 여자들이 다 있어?” 처음 그녀들을 만났을 때를 기억해본다. 긴 얼굴에 요란한 옷차림의 캐리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고, 얌전하게 생긴 샬롯은 엉뚱하기 그지없었으며, 섹스의 화신인 사만다는 멋있다 못해 무섭게 느껴졌고, 빨강머리에 “시니컬의 터치스톤”이라 부를 만한 미란다는 지나치게 딱딱했다. 게다가 이 여자들이 나누는 노골적인 대화라니! 맨해튼과 인구밀도를 제외하고 공유할 것이라고는 고양이 오줌만큼도 없는 대한민국에 사는 여성들에겐, 알아도 말하지 말아야 할, 들어도 안 들은 척해야 하는, 그런 이야기였다. 키스할 때 얼굴 가득 침을 묻히는 남자, 오럴섹스 뒤에 키스하는 남자, 하다가 꾸벅꾸벅 조는 남자, 평소엔 얌전하다가도 침대에만 누우면 입에 담을 수 욕설을 내뿜는 남자, 트리플섹스를 강요하는 남자, 너무 작거나, 너무 큰 남자. 침대 밑에서 썩어문드러졌을 기상천외한 이야기들이 대낮의 다운타운 레스토랑에서 울려퍼진다. 이 네 여자들의 노골적인 수다는, 중·고생들이 모여 순결선언을 하고, 처녀막복원수술이 여전히 존재하는 대한민국 여성들이 받아들이기엔 뭔가 지나치게 진보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지난 2000년 유료케이블시대의 도래와 이 땅에 상륙한 <섹스&시티>는 속닥거리는 입소문을 타고 그 세를 빠르게 확장해나갔다. 커피숍에 모여 캐리의 새로운 남자 이야기나 사만다의 엽기적인 애정행각을 이야기하며 웃음을 터트리는 그룹들이 심심찮게 눈에 띄기 시작했고, 그녀들이 입고 나온 옷과 들고 나온 가방, 신고 나온 구두가 인터넷 쇼핑몰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일본 패션으로 도배되었던 여성잡지들은 앞다투어 뉴욕스타일에 안테나를 세웠고, 심지어 이 시리즈의 이름을 딴 과자도 등장했다. 이런 와중에 <싱글즈 인 서울>처럼 작위적인 설정만을 가져온, 영혼없는 프로그램이 탄생하는 비극과 함께, <결혼하고 싶은 여자>처럼 <섹스&시티>에 상당 부분 젖줄을 대고 있는 국산드라마가 기획되기도 했다.

<섹스&시티>는 여성들을 위한 ‘성교육 지침서 Vol.2’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난 몇십년간 착각과 몰이해 속에 살아왔던 남성들에게 여자들의 욕망과 본질은 “당신들이 생각하는 지점보다 정확하게 5cm 아래 있음”을 알려주는 재교육 프로그램에 가까웠다. 스스로를 “동물”이라고 칭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변명의 말로 즐겨썼던 남자들에게 여자들 역시 “섹스하고 싶어 미쳐버리는 순간”이 솔찮게 찾아오는 똑같은 동물임을, 대신 그것에 대한 이야기를 음담패설로 저하시키는 대신 위트있는 유머로 끌어올릴 수 있는 ‘지적인 동물’임을 보여주었다.

“그러니까, 가족들과 사는 남자하고 데이트를 할 방법은 전혀 없단 말이지? ” “음… 윌리엄 왕자 정도?”

또한 <섹스&시티>는 그동안 남성에 의해 대상화되었던 여성과 여성의 몸을 주체로 뒤바꾸어놓았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한 에피소드에서 일회용으로 소비되거나, 중요 캐릭터라고 할지라도 이야기를 매듭짓지 못한 채 그 시즌에서 퇴장하기 일쑤였다. 대신 그간 남성적인 시선에 포획되어 악녀 혹은 성녀로 이분화되던 여성캐릭터들은 한 에피소드 안에서도 100번도 더 돌변할 수 있는 미묘하고 예민한 존재로 그려졌다. 한편 서른을 넘긴 싱글여성에 대한 개념 역시 ‘불쌍하고 애처로운 사회의 잉여물들’이 아니라 “멋진 집, 멋진 친구, 멋진 섹스”를 즐기며 “시간을 두고 진짜 짝을 찾아가는 사람들”로 바꾸어놓았다. 이는 <섹스&시티>의 원작자인 캔디스 부시넬을 비롯해 작가군단이 모두 여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심지어 이 시리즈의 우뇌인 공동프로듀서이자 작가인 마이클 패트릭 킹이 게이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지난 6년간 셀 수 없는 많은 남자들이 이 네 여자의 침실을 오갔고, 그 안에서 사랑에 대한 새로운 질문과 해답, 끊이지 않는 유머가 탄생되었다. 1, 2시즌에서 주로 사용되었던 다큐멘터리성 인터뷰 장면들이나, 카메라를 향해 말을 거는 독백은 시즌을 더하면서 점점 사라졌다. 어느덧 주변의 누군가는 샬롯이었고, 미란다였고, 아주 소수는 사만다였으며, 자신은 캐리가 되었다. 그렇게 시청자들과 캐릭터간의 동일화가 이루어진 이후부터는 ‘너희도 그렇지 않니’하며 동의를 구하던 카메라의 눈은 각각의 캐릭터 내로 충실하게 잠입해 들어갔고 3시즌 이후부터는 보편적인 질문보다는 더 깊고 구체적인 질문들이 던져지기 시작했다.

구찌도, 오럴섹스도, 보그도 안녕

물론 6년 동안 변함없는 것은 단 한컷도 그냥 흘릴 것 없는 깔끔하고 경제적인 연출과 뛰어난 구성이다. 30분도 채 안 되는 한편의 에피소드가 소화해내는 내용은 정교한 생략 속에 매우 빠른 진행을 보인다(한 에피소드 안에서 어떤 커플은 만나고, 결혼식까지 연다!). 때론 타악기의 신명나는 리듬 속에, 때론 현악기의 서정적인 멜로디 속에 질감도 박자도 다른 이야기들이 자유자재로 교차된다. 특히 거의 매 회 등장하는 바, 레스토랑신에서 4명의 여자사이를 날아다니는 컷 편집의 속도감은 아찔할 정도다. 물론 이미 수다가 가지는 빠른 스피드에 익숙한 우리에게 그 속도는 쉽게 인식되지 못한다.

“난 빅을 길들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문제는 그가 날 길들이지 못한 것이다. 세상엔 길들일 수 없는 여자들도 있다. 그들은 자유롭게 달릴 것이다. 자신들과 미친 듯이 달려 줄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그러나 그간 <섹스&시티>에 대한 관심과 평가는 대부분 이들의 범상치 않은 패션과 독한 성적농담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천하의 사만다가 남자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캐리가 더이상 아슬아슬한 의상을 입지 않으며, 애엄마가 된 미란다가 농담을 내뱉을 정신을 똥기저귀 속에 빠트렸을 때, 많은 이들은 이 시리즈의 종말을 선언했다. 하지만 한 사람의 인생이란 결코 어떤 색깔이나 카테고리 내에서만 숨쉬지 않는다. 어쩌면 이들을 끝까지 쿨한 언니들로 내버려두었다면 <섹스&시티>는 도시의 신화로 박제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4명의 여자는 새로운 도시의 여신들이 되는 것을 포기하고, 땅 위로 발을 내디딘다. 유방암에 걸린 빡빡머리의 사만다가 가발을 벗어던지며 해방될 때, 캐리가 꿈의 도시 파리를 도망치듯 떠나올 때, 불임으로 고생하던 샬롯이 중국에서 날아온 입양허락서에 감격의 눈물을 흘릴 때, 미란다가 치매에 걸려 쓰레기통을 뒤지는 시어머니를 찾아 맨해튼 거리를 내달릴 때, 마놀로 블라닉도, 지미 츄도, 구찌도, 디오르도, 오럴섹스도, 티보도, 코스모폴리탄도, 보그도 안녕을 고한다. 이 잘난 여자들이 결국 고단한 삶과 악수하는 순간, 지난 6년간의 환상은 깨져버린다. 그것은 누군가에겐 싱글생활 방어전을 이겨내지 못한 여성들의 KO패처럼 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섹스&시티>는 ‘쿨’함을 포기하고 ‘진짜’를 선택한다. ‘섹스’와 ‘시티’ 사이에 놓인 ‘&’, 여기에 숨어 있는 여성의 삶과 선택을 경청한다. 마지막 시즌, 뉴욕을 떠나겠다고 마음먹은 캐리는 “이제 질문을 그만둬야 할 때가 아닌가”라고 자문한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자신이 결코 뉴욕의 아파트도, 가족 같은 친구들도, 낡은 노트북도, 삶에 대한 질문도 버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지난 6년 동안, 30대 초반이었던 아가씨들은 어느덧 “공포의 나이”인 마흔둘이나 마흔다섯을 걱정해야 하는 30대 후반으로 접어들었다. 그렇게 “한 시대가 끝나고”(It’s the end of an era), 시리즈도 끝났다. 하지만 <섹스&시티>와 6년을 보낸 지금, 질문은 누군가에 의해 계속 될 것이다. 그들이 싱글이건, 유부녀건, 이혼녀건, 미혼모건, 혹은 양성이건, 레즈비언이건, 죽지 않는 한. ‘여자’로 태어났고, ‘여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한.

관련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