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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와 <화씨 9/11> [1]
김도훈 2004-07-06

납치된 김선일씨는 결국 피살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파병원칙에는 변화가 없음을 재확인했고, 조지 부시는 “한국의 파병원칙에 변함이 없기를 바란다”고 전해왔다. 조지 부시가 만들어놓은 야만의 시대 속으로 휩쓸려가고 있는 것은 미국인과 이라크인만은 아니다. 한 사람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더 많은 피를 흘려야만 멈출 것처럼 보인다. 이라크 현지 미군이 김선일씨 피랍을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의혹마저 제기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화씨 9/11>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영화다. 의아하게도 <화씨 9/11>은 우리의 미성년자 관람불가 등급과도 같은 ‘R등급’을 받았는데, 폭력과 거북한 이미지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미국영화협회(MPAA)의 궁색한 설명이다. 무어는 “안타깝지만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몇년 안으로 15∼16살의 청소년들이 이라크에 파병될 것이다. 목숨을 담보로 한 전쟁에 나갈 당사자들이 내 영화를 보고, 지금 이라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 하는 건 당연하다”라고 항의하고 있다. 그리고 그 항의는 우리에게도 역시 유효하다. <화씨 9/11>의 미국 개봉일은 6월25일이지만 23일 현재 뉴욕의 극장들에서 부분적으로 상영이 시작됐고 극장마다 최고의 예매 기록을 세우고 있는 중이다. 4주가 지난 7월16일이면, 이 모든 논쟁과 기록의 중심에 서 있는 <화씨 9/11>의 실체를 우리도 확인할 수 있다. 편집자

황금종려상, ‘진실’의 개봉을 보장하다

“화씨 451이 책이 불타는 온도라면 화씨 9/11은 진실이 불타는 온도다.” 마이클 무어는 <화씨 9/11>이라는 제목이 SF작가 래이 브래드버리의 53년작 <화씨 451>의 오마주라 했다. <화씨 451>의 세계에서 책은 금지되어 있고, ‘소방수’라는 직업은 책을 불태우는 일이다. 주인공인 ‘소방수’ 몬탁은 이에 대항해 책을 숨겨두고 읽어가기 시작한다. <화씨 9/11>은 조지 부시와 공화당 정부가 어떻게 미국인을 속여서 전쟁터로 몰고 나갔으며, 그 뒤에 숨어 있는 부시 일가와 오사마 빈 라덴 일가의 은밀한 관계가 무엇이었고, 이 모든 것을 미디어가 얼마나 감추고 있는지 폭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다큐멘터리영화다. <화씨 451>과 <화씨 9/11>은 지성과 진실의 역사를 감추는, 폭력적인 권위에 대항하는 한 용감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다. 물론 순탄하게 극장에 걸릴 리 없을 터. 영화를 재정지원했던 멜 깁슨의 아이콘필름은 이미 완성된 영화를 팽개치고 달아났고, 디즈니는 배급을 비밀리에 막으려 했다. 그러나 칸영화제에서 뜻밖의 황금종려상을 받으면서 영화는 미래를 보장받았다. 파리에서 만난 전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이자 시네마테크 디렉터 세르쥐 투비아나는 “<화씨 9/11>에 황금종려상을 주다니” 하며 한숨을 쉬었지만,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절박한 심정들 앞에서는 예술의 목적의식도 가끔은 유연해지는 법일 테다.

의문이 남긴 공백을 메꾸는건 풍자정신

<화씨 9/11>이 못 말리는 프로파간다처럼 보인다면 그것은 이 영화가 노리는 대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조지 부시는 참으로 근사한 피사체다. 마이클 무어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첫 8개월 동안 42%의 기간을 휴가로 사용한 텍사스 카우보이’를 희화화하는 데 별로 노력을 들일 필요도 없었다. 칸 심사위원이었던 여배우 틸다 스윈튼이 “부시에게 최우수 코미디배우상을 주고 싶다”라고 말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다. 부시라는 피사체는 혼자서 포복절도의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두대의 여객기가 쌍둥이빌딩을 들이받고 있던 순간, 부시는 플로리다의 한 초등학교에서 <내 친구 염소>라는 책을 아이들과 읽고 있었다. 교실로 황급히 들어온 보좌관, 이를 부시의 귓속에 비밀스레 보고하자 부시는 얼어붙는다. 자막으로는 시간이 무거운 속도로 째깍째깍 흘러간다. 7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그저 <내 친구 염소>를 손에 얌전히 쥐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못한 채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 장소에 있었던 사람들에 따르면 보좌관 중 한 사람이 지금 자리를 옮겨야 한다고 급하게 조언할 때까지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한다. 무어는 묻는다. 대체 이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며 그리도 멍하니 오랫동안 앉아 있었던 것일까. <뉴욕 타임스>는 이 장면 하나만으로도 부시에게는 커다란 타격이 될 거라고 전망했다.

기실 <화씨 9/11>에서 가장 사람들이 기대했던 것은, 부시 일가와 오사마 빈 라덴 일가의 은밀한 유착관계가 얼마나 깊이있게 폭로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무어의 질문은 이렇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던 많은 수의 빈 라덴 일족이 9·11 직후 미국 밖으로 비행하도록 허락받았다. 어떻게? 당시 모든 비행기들은 비행허가를 받지 못하고 땅에 묶여 있었는데….” 무어는 빈 라덴 일가와 부시 일가 사이의 보이지 않는 끈을 잡아당기고 싶어했다. 부시의 젊은 시절 군사기록을 삭제한 인물이 현재 빈 라덴 일가의 텍사스 재정 매니저 제임스 R. 배스이며, 테러리스트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정부가 사우디 정부를 고소했을 때, 사우디 정부의 수석 변호사로 고용되었던 사람이 부시 전 대통령의 국무장관 제임스 베이커였다는 놀라운 사실들이 줄을 잇는다. 문제는 무어가 딱 거기서 멈추어 선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사우디나 빈 라덴 일족의 배경에 대해 깊숙이 들어가다가 돌연 멈추어 선다. 스스로 던진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하는 대신 구렁이 담 넘듯이 넘어가고 마는 것이다. <화씨 9/11>이 안고 시작한 중요한 과제들은 이처럼 의문을 던지며 관객의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남은 공백을 채우는 것은 그의 위트 넘치는 풍자정신이다. 부시만이 그 대상은 아니다. 존 애시크로프트 법무부 장관은 <독수리가 높이 날게 하라>(Let the Eagle Soar)를 우스꽝스럽게 부르고, 폴 울포위츠 국방부 부장관은 TV 생방송에 들어가기 전에 손에 침을 탁! 뱉어서 머리를 빗어넘긴다.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는 마릴린 맨슨의 인터뷰가 아티스트의 지성을 이용해 우둔한 미디어를 비판하는 데 쓰였다면, 여기에는 반대의 역할을 브리트니 스피어스가 한다. 그는 “대통령이 잘 헤쳐나갈 것으로 믿는다”라고 생각없이 중얼거린다. 그런데 즐겁게 웃으면서도 왠지 개운치가 않다. 영화의 전반부로만 보자면, 무어는 전쟁의 합법성에 대한 의문들을 깊이있게 캐내는 것보다는 여전히 싫어하는 대상을 우스갯거리로 만드는 데 장기가 있어 보인다. <사이트 앤 사운드>는 “그들의 멍청함이 문제가 아니야 마이클! 문제는 그들의 거짓말이라고!”라며 답답함을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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