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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로 간 송일곤과 <거미숲> 스토리 - 장르로 가기까지

꽃섬에서 거미숲으로 거처를 옮기다

유령이 나온다는 숲에 관한 제보를 받고 떠난 <미스터리 극장>의 강민 PD가 치명상을 입은 채 발견된다. 혼수상태에서 2주 만에 깨어난 그는 거미숲에 두 남녀의 시체가 있다며 경찰을 찾는다. 달려온 강 PD의 친구 최 형사는 그의 진술을 따라 사건을 추적하고, 강 PD는 그 나름대로 숲에 잠겨 있는 수수께끼를 풀려고 나선다.

미스터리스릴러 <거미숲>(9월3일 개봉예정)은 15억원의 순제작비가 들어간 영화답지 않게 세련되고 깔끔한 매무새를 지녔다. 배우의 연기나 섬세하게 조형된 미술과 공간의 미감,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부럽지 않게 새롭게 만들어진 선율, 제때에 멈추거나 달리는 카메라의 빼어난 질감까지 제작비 30억원대를 넘보는 영화의 ‘때깔’을 폼낸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건 이 영화가 <꽃섬>의 송일곤 감독의 작품이라는 점이다. <꽃섬>에 비하면 <거미숲>은 장르의 관습을 지나치게 노출한다(물론 장르의 클리셰를 동시에 지워가기도 한다). 도대체 그는 어느 순간 장르로 넘어간 걸까. 그건 장르에의 투항일까, 장르의 포획일까.

장르로 들어가기까지

“미스터리는 진실이나 비밀에 다가가는 가장 좋은 장치다. 영화적으로 가장 재미있을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100분이면 100분 동안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점을 잘 요리할 수 있는 장르다.”

“잘할 수 있고 재미있을 것 같은 것이 미스터리였다”는 감독의 말처럼 그의 단편들은 다 미스터리다. <간과 감자>에선 동생의 간을 팔 것이냐 말 것이냐라는 데서, <소풍>은 소풍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게 실은 치밀한 살인계획이라는 점에서 미스터리의 틀을 갖고 있다. “미스터리는 진실이나 비밀에 다가가는 가장 좋은 장치다. 영화적으로 가장 재미있을 수 있는 장르이기도 하다. 클라이맥스에 이르기까지 100분이면 100분 동안 영화의 가장 재미있는 점을 잘 요리할 수 있는 장르다.” 어쨌든 그는 이를 <꽃섬> 때부터 염두에 두지는 않았다. <꽃섬>의 좌절이 미스터리스릴러를 낳았다.

“<꽃섬>을 작품 내적으로 봤을 때 최선을 다했고 일정한 성과가 있었다고 보지만 관객과 만나는 과정이 너무 힘들었다. 개봉관 잡기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간신히 서울 6개관을 잡았는데 그나마 관객이 별로 선호하지 않는 극장이었다. 상실감이 컸다. 결국, 하고 싶은 얘기를 영화적으로 다루되 장르와 스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나온 <거미숲>은 처음에 장르영화라고 보기 힘든 것이었다. 송 감독은 친구의 악몽과 오르페우스 신화를 유기적으로 엮었지만 아주 대중적이진 않았다. 지금의 <거미숲>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수정이 필요했다.

“시나리오 쓰기 전에 좋은 참고가 됐던 게 A4 한장 정도로 기록해두었던 친구의 기괴한 꿈 이야기다. 주인공이었던 친구가 굉장히 크고 어두운 숲에서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나무마다 사자들이 매달려서 이상한 괴성을 지르고 있는데 가만히 보니 사자의 발이 모두 잘려 있다. 수천 마리의 사자가 발이 잘린 채 숲을 뒤덮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그 친구가 헤매다가 어떤 할머니를 만나서 길을 물으니 숲 반대편으로 가야 목적지가 있다고 하는 게 아닌가. 간신히 그 숲을 다시 한번 거쳐 버스 정류장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이 앉아 있어 같이 기다리고 있는데 멀리서 버스가 오더니 유턴해서 섰고, 같이 타야 할 옆사람을 보려고 돌아보는 순간 그 사람의 얼굴이 없더라. 친구는 그 순간, 꿈에서 깼다. 초고가 나오고 나서부터 모니터를 많이 했는데 <키노>의 기자였던 친구는 2고가 가장 좋다고 했다. 무의식의 악몽 같다고. 지금이야 많이 대중적인 이야기가 됐지만 그때의 <거미숲>은 이랬다. 죽은 아내가 거미숲에 잡혀 있고 주인공인 남자가 악마로부터 아내를 찾아오려고 하는. 그 악마가 바뀌고 바뀌어서 주인공의 친구인 형사(장현성)가 됐다.”

장르로 들어가서

“처음 15분 안에 관객을 잡아놔야 따라갈 수 있다. 2시간이라는 절대시간 안으로 관객이 들어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초반에 강렬한 이미지를 넣으려 했다. 특히 가장 충격적인 게 한컷 안에서 이뤄지길 바랐고, 초반에 세게 뻥 떨어지게 만든 게 터널장면이다.”

장르의 외피를 덮어쓰기로 했지만 제작사가 일찌감치 붙어서 함께 프리프로덕션을 진행하는 ‘행복한’ 과정을 거친 건 아니다. 송 감독은 ‘무턱대고’ 시나리오부터 썼다. 1년 넘게 쓰고 마무리에 이를 무렵, 친분있는 사람이 프로듀서로 있는 마이필름에 들어가 일을 시작했으나 <거미숲> 시나리오에는 난색을 표했다. 송 감독은 자신이 직접 만들 요량으로 회사를 나왔다. 마침 프랑스의 영화사가 관심을 보이며 4억원 정도의 제작비를 대겠다는 의사를 전해왔고, 영화진흥위원회에 시놉시스를 내서 4억원의 제작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됐다. 4억원 정도를 더 구하면 12억원 선에서 영화를 만들 수 있겠다는 계산이 섰다. 연출부를 꾸린 뒤 송 감독은 머리를 밀었다. 머리에 신경 안 써도 되고, 시원한 것도 있어서 그랬다지만 ‘삭발투혼’의 의미가 더 깊었다. 강요한 게 전혀 아닌데 연출부가 일제히 머리를 따라 밀었다. 송 감독 이하 연출부가 떼지어 움직이면 주위에서 조폭을 보는 듯한 공포의 눈길을 받기도 했다. 어쨌든 난항은 계속됐다. 결과적으로 프랑스에선 돈이 들어오지 않았고, 영진위의 지원금은 한번에 이뤄지는 게 아니라 제작이 진행되면서 띄엄띄엄 ‘공급’되는 것이라서 당장 쓸 제작비가 궁한 송 감독 처지에선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구원투수로 나선 오크필름 덕분에 촬영이 시작됐다.

장르와 스타를 염두에 둔 감독의 생각을 가장 먼저 충족시켜준 건 감우성이었다. 감우성은 감독의 캐스팅 1순위였고, 그는 화답하듯 시나리오를 받은 다음날 곧바로 출연 의사를 밝혀왔다. 촬영 때에는 굉장한 집중력으로 감독을 만족시켰는데, 아닌 게 아니라 <거미숲>은 감우성의 가치를 새삼 증명하는 작품으로 남을 게 틀림없다.

<거미숲>에는 ‘<꽃섬>의 감독이 만든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장르적 세공력을 발휘하는 장면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그 디테일의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게 강민(감우성)의 친구인 최 형사(장현성)가 등장하는 장면이다. 형사들이 모처를 급습해 혈투를 벌인 끝에 수갑을 채우기까지의 과정을 한 호흡으로 끌고 가는데 긴박감 속에 유머까지 삽입했고 이를 놓치지 않는 카메라 움직임이 돋보인다. “강민은 생각하고 떠도는 열병에 걸린 자다. 강민이 고뇌하는 자라면 형사는 좀더 인간적이고 어리숙하지만 정확하게 (사건의) 단서를 보는 인물이다. 첫 등장에 그걸 알려주려 했다. 사실 그 장면은 관객이 재미있어할 거라는 걸 염두에 두고 찍었다. 너무 튀는 게 아닐까 고심했지만. 현성이가(감독과 장현성은 친한 친구 사이다) 강력계 형사로 있는 친구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장면이다.”

두 번째 디테일은 터널 속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이다. 끔찍한 살인 현장을 뒤늦게 발견하고 살인자를 추격하다 역습을 당한 강민이 비틀거리며 터널 속을 지나다가 끔찍한 사고를 당한다. 갑자기 벌어지는 충격적인 장면이 놀랍기도 하거니와 영화 끝무렵에 마련된 반전도 이 터널 속에서 벌어진다. “처음 15분 안에 관객을 잡아놔야 따라갈 수 있다. 2시간이라는 절대시간 안으로 관객이 들어와야 한다는 것 때문에 초반에 강렬한 이미지를 넣으려 했다. 특히 가장 충격적인 게 한컷 안에서 이뤄지길 바랐고, 초반에 세게 뻥 떨어지게 만든 게 터널장면이다. 그렇지만 CG 효과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최종 편집에서 두 가지 버전을 놓고 고민했다. 처음에는 한 남자가 숲에서 깨어난다로 평범하게 시작했지만 이 터널장면을 앞으로 빼서 넣었다.”

세 번째 디테일은 세번에 걸쳐 등장하는 섹스신이다. 노출 때문이 아니라 세번의 섹스신은 자극적이고 관능적일 뿐 아니라 각기 다른 이유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강민과 방송국 아나운서 황수영(강경헌)의 섹스는 따뜻하며 안정된 분위기 속에서 상처입은 남자의 수동성과 먼저 다가선 여자의 적극성이 묻어난다. 방송국 국장(조성하)과 황수영의 섹스는 먹고 먹히는 약육강식의 냄새가 보는 이의 몸을 움찔거리게 만드는데, 국장이 사과를 씹어 뱉으며 여자를 정복하는 ‘그로테스크 섹스’가 꽤나 공격적이다. 그리고 소년, 소녀가 훔쳐보게 되는 어머니의 섹스는 잠깐 스쳐지나가는 장면이지만 대단히 과감하다. “황수영과 강민의 섹스는 위무하듯이 아름답게 조금 슬로모션으로 갔지만, 국장하고의 장면에선 체위도 다르고 굉장히 자극적으로 배치했다. 국장이 등장하는 장면은 일본의 기생관광에서 실제로 있었던 일을 반영했고, 아이들 장면은 정신과 의사로 있는 친구에게 자문을 구해가며 찍었다. 유년기에 섹스 행위를 처음 보는 걸 초경이라고 하는데 그게 정상적이냐 비정상적이냐에 따라 한 사람의 삶을 바꿀 정도라고 한다. 아이들이 한번 쓱 보지만 살인과 연관된 것이기 때문에 의식에 충격적인 영향을 준다는 설정이다.”

섹스신에 이어 바로 등장하는 살인장면은 웬만한 고어영화 뺨친다. 살인자가 스스로 잔인해지며 점점 이성의 제어를 잃어가는 과정은 영화 <거미숲>을 출발시킨 몇 가지 동기 혹은 의도가 담긴 중요한 장면이다. “충격을 줘야 했던 장면이었고 실제 촬영 때는 시나리오보다 더 세게 갔다. 배우의 집중력이 중요한 동력이 됐는데, 편집에서 많은 장면을 덜어내야 했을 정도다. 뇌를 씹는 등의 장면까지 찍었지만 더 나아가는 것보다 경계가 좋아서 지금의 것을 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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