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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CAF2004 경쟁부문 - 단편 + 공식개막작
김현정 2004-08-04

단편애니메이션 - 짧지만 큰 재미, 장편 부럽지 않소

머리없는 남자

올해 SICAF 경쟁부문에는 몇분밖에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짙은 잔상을 남기는 다채로운 단편애니메이션들이 초청됐다. 후안 솔라나스의 <머리없는 남자>는 지난해 칸영화제 단편부문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애니메이션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처럼 초현실적인 깊이를 가진 이 애니메이션은 머리없는 남자가 연인과 함께 무도회에 가기 위해 머리를 사러 나가는 이야기. 느리지만 섬세한 표정의 변화와 따뜻한 반전이 미소를 부르는 작품이다.

뮤지컬 샵

러시아에서 온 <뮤지컬 샵>은 어두운 녹색이 주가 되는, 마구 그어내린 듯한 거친 색감으로 서글픈 동화를 들려준다. 두 마리 귀뚜라미는 악기점을 열고 손님을 기다린다. 그들이 바이올린과 트럼펫을 연주하면 아름다운 선율을 따라 꽃이 피어날 정도지만, 손님으로 찾아온 파리 세 모자는 악기와 그 주인을 모욕할 뿐이다. 음악이 그림 위에 내려앉는 것 같은 귀뚜라미의 연주가 인상적이다.

독일 애니메이션 <비상구>도 다소 어두우면서 환상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 실사를 찍어 연결한 이 작품에서 거울 속에 비친 영상들은 무미건조한 실제 인물들의 삶이 지겨워진 나머지 그 주인을 삭제하고 자신들만 남아 있기로 한다. 섬뜩한 이야기를 자유로운 몸짓으로 끌고 가는 연출이 돋보인다. 리 호지킨슨의 <무>는 종이인형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단순하지만, 평면적인 그림이 겹겹이 쌓여 입체감을 가지는 3D 기법으로 이어질 때는 순간적으로 경이롭기도 하다. 일본 퍼펫애니메이션 <코마네코>는 처음으로 인형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보려고 고민하는 고양이 인형이 출연해, 신기한 재미를 준다. 커다랗고 동그란 얼굴 위에서 조그만 눈과 눈썹이 만들어내는 표정 변화가 깜찍하다.

헬로

<패스트 필름>은 영화를 재료로 만들어낸 애니메이션이다. 수만장에 달하는 고전영화들의 이미지를 인쇄해서 접고 자르고 재배치한 <패스트 필름>은 전혀 관계없는 이미지들을 하나의 내러티브로 연결하는, 짐작이 가지 않을 정도의 수고가 들어간 작품이다. 첫 번째 영화로 안시에 초청됐던 조너선 닉스의 <헬로>는 서로를 마음에 둔 테이프레코더 소년과 주크박스 소녀의, 항상 어긋나기만 하는 만남을 섬세하게 포착한다. 그들을 연결해주는 건 낡은 축음기. 신경질적일 수도 있을 펜선과 쉴새없는 떨림이 이 영화에서는 조심스러운 연정을 전해준다. 폴리마주가 제작한 <서킷 마린>은 그 반대로 귀엽기만 한 그림들이 잔인한 삶의 이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체크무늬 종이를 찢어붙인 것 같은 <서킷 마린>은 약육강식의 사슬 속에서 사랑하는 애완동물을 하나하나 잃어가는 마음 착한 해적 선장의 이야기다. 한국 단편들도 눈에 띈다. 전주와 부산아시아단편영화제 등에서 상영됐던 정민영의 퍼펫애니메이션 <길>은 날마다 건널목을 건너는 할머니를 지켜보는 건널목지기의 감정을 싣고 있는 작품. 디스토피아와 파멸을 다룬 SF애니메이션 〈The Cage>, 참혹한 전쟁터를 그린 〈The Eyes>, 오목한 소년과 볼록한 소녀의 사랑을 독특한 질감으로 표현한 <볼록이 이야기>, 게들이 옆으로 러닝머신을 뛰는 귀여운 애니메이션 〈Venice Beach> 등이 올해 SICAF에서 만날 수 있는 한국의 젊은 애니메이션이다.

SICAF2004 공식 개막작 <개구리의 예언>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새롭게 해석한 애니메이션이다. 릴리와 줄리엣은 연못에 놀러갔다가 말하는 개구리들로부터 40일 동안 밤낮으로 큰비가 내릴 거라는 경고를 받는다. 할아버지 페르디난드는 아내와 두 아이, 여러 동물들을 데리고 등대처럼 생긴 커다란 방주에 들어가 홍수를 이겨낸다. 문제는 감자 28t이 식량의 전부라는 것. 감자로 끼니를 때우던 육식동물들은 마침내 음흉한 거북이의 지휘 아래 반란을 일으키고, 바다 멀리서는 악어떼까지 습격해온다. 2004년 베를린영화제에서 특별언급된 <개구리의 예언>은 존재하는 모든 종(種)의 멸망을 앞두고도 이기적인 생존과 권력에 연연하는 방주 내부 사정을 들여다보는 점이 독특하다. 그림책에서 꺼내온 듯한, 크레파스의 느낌이 나는 그림은 이 진지한 우화를 모두를 위한 동화처럼 만들어주는 요소. 이 영화를 제작한 폴리마주는 독창적인 애니메이션 제작을 이끌어온 프랑스 회사로, 올해 SICAF에서 특별전을 마련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