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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회 맞는 순풍 산부인과 [2] - 시트콤 연출가들 인터뷰
김혜리 2000-02-29

보는 파격, 듣는 파격, 파격 산부인과

기복은 있지만 <순풍…>의 대사는 한회 평균 두세번씩 보는 이를 기막히게 한다. 그러나 그 감각은 면도날 같은 수사를 휙휙 날리며 말의 덫을 놓는 미국 시트콤 대사와는 사뭇 다르다. <순풍…> 대사의 단물은 한국말 특유의 억양과 리듬, 캐릭터의 성품에서 솟아난다. “니뿡!” 같은 유아어나 “이거 병원 문 닫아야 돼! 다 필요없어!”, “영규야, 너 양복 한벌 있는 게 좋겠냐, 없는 게 좋겠냐?”(지명) 같은 대사는 누가 어떻게 말하느냐를 떼어놓고는 진수를 알 수 없다. 대졸 이상 학력자들이 자주 쓰는, 그럴 듯하지만 알맹이는 별로 없는 단어들- ‘은폐’, ‘지양’ 등등- 도 순풍식 유머의 주재료. 천의 얼굴을 가진 단골 조연 윤기원의 기관총 대사는 이 부류의 하이라이트다. <순풍…>은 신참 시청자들은 놓치기 쉽상인 끼리끼리 통하는 조크와 “형, 우리 스타(크래프트)나 한번 할까?” 같은 생략법을 과감히 도입하는 한편, 흔히 느슨히 처리되는 지나가는 대사에 공을 들인다. <순풍…>의 자투리 장면에는 “고등어, 맛있긴 한데 한번 튀기면 집안에 냄새가 배” 같은 구체적인 대사가 오간다.

그러나 <순풍·…>이 젊은 숭배자를 불러모은 힘은, 무엇보다 시트콤은 모름지기 이렇게 생겨야 한다는 통념을 걷어찬 형식의 자유로움에 있다. 화면 분할, 자막 같은 액세서리는 애교고, 인물의 심리가 실린 시점숏, 튀는 편집, 카메라워크를 총망라한 <순풍…>의 천변만화한 얼굴은, 영화를 벗삼아 자란 세대의 시청자에게 식상할 틈을 허락지 않는다. 시간을 콜라주하고 시점을 바꿔치는 <순풍…>의 ‘실험’은 갈수록 능란해져 요즈음엔 마치 재치를 과시하는 한편의 선댄스영화제 출품작을 보는 듯한 에피소드마저 등장하고 있다. 완전 범죄라고 자부한 미선의 ‘비행’을 숱한 목격자들의 시점으로 재구성한 ‘아빠 차 무단운행 사건’, 맞물려 돌아간 자잘한 사고들을 되짚은 ‘망년회에서 생긴 일’ 등이 그 예다.

반복, 대조, 대구를 두루 동원해 30분 남짓한 시간을 주무르는 <순풍>의 솜씨는 윤기없이 남용돼온 패러디 기법의 원숙한 소화로 이어진다. <순풍…>이라고 아이디어 도용 혐의에서 결백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오중이 왕종기 때문에 구경거리가 된 일이나 영란과의 설악산행을 비밀에 부치려는 몸부림은 <프렌즈>의 로스가 겪은 수난과 비슷하다. 이웃여자 엉덩이에 붙은 스티커 사진을 떼려다 발생한 영규의 성희롱 스캔들은 <심슨>의 일화를 연상시키며 ‘망년회 후유증’편은 시트콤 <스핀 시티>의 한 에피소드와 착상이 닮았다. 그럼에도 <순풍…>의 패러디는 영화나 외국 시트콤에서 모티브만 오려오는 여타 시트콤의 패러디와 달리 스스로 완결된 구조를 갖는다. 비밀요원을 사칭하는 중국집 배달원이 나오는 <트루라이즈> 패러디, 장모에게 구박받는 영규의 처지를 그린 <인생은 아름다워> 패러디 등은 은근하고 세련된 나머지 원본을 알아채기까지 한참 걸린다. 펄떡펄떡 뛰는 대사를 정성껏 짠 틀에 담아 차려낸 <순풍…>은, 한 차례 폭소를 위해 지루하게 기다려야 하거나 휘발성 농담을 남발하는 시트콤들 곁에서 지성과 미모를 뽐낸다.

페이소스, 그리고 유쾌한 전복

완숙기에 접어든 <순풍…>은 최근 들어 아예 코미디라는 간판에도 연연하지 않는 기색이다. 막내딸 혜교가 짝사랑을 시작하면서 코끝 찡한 날이 부쩍 늘었다 싶더니, 낡은 장롱에 얽힌 오 박사네 여자들의 추억을 더듬은 일화에 이르면 그저 잔잔할 뿐 울리겠다는 욕심도 웃기겠다는 욕심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코미디의 심장, 페이소스로 진입하는 걸음이기도 하다. 졸지에 처가살이를 하게 된 실업자 영규를 앞세운 초창기부터 페이소스는 언제나 <순풍…>의 한켠을 채워온 ‘세간살이’였다. <순풍…>의 페이소스는 주로 사람들의 치졸함과 좀스러움에서 스며나오는데, 그들은 자신의 좀스러움에 대해 대단히 진지하다. 이 비소한 진지함을 표현하는 주된 장치는 독백. 지난 2월9일 방영분은 ‘밥과 술을 공짜로 즐기는 101가지 방법’에 대한 영규의 ‘논문’을 보이스 오버로 들려준다. 서두는 이렇다. “술과 밥은 우리 일상 생활의 필수 요소이자 사교의 중요한 매개체다.… 그러나 술과 밥의 대가를 누가 지불하는가에 대해서는 그동안 진지한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순풍…>은 외로움과 기억에 관해 뭘 좀 아는 시트콤이다. 어느 날 영란과 혜교는 짝사랑의 서러움에 겨워 술김에 오중과 창훈의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도망친다. 잔디밭에 누워 깔깔대던 두 처녀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웃음을 멈추고, 혜교 뺨에 흐르는 한 줄기 눈물을 비추던 카메라가 상승하면 피날레 음악이 울린다. 슬랩스틱의 속도로 달리던 코미디가 돌연 마음을 저미는 것이다. 또한 <순풍…>은 각 캐릭터의 개인사를 즐겨 복기한다. 용녀와 지명, 표 간호사와 김 간호사, 미선과 영규, 오중과 영란의 사랑이 왜 운명적인지 일러주는 <아메리칸 퀼트> 패러디나 <박하사탕> 패러디편이 이 갈래의 명작으로 기억된다. 고정 시청자라면 이제 순풍 사람들의 창피한 기억과 그들이 지닌 콤플렉스의 유래에 관해 알 만큼 안다. 추억을 엿본 상대에게 정을 느끼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그래서 순풍 마니아들은 영규 부부가 당한 전세 사기에 분개하고 혜교의 애틋한 구애에 마음 졸인다.

<순풍…>에는 예기치 못한 시각의 참신함도 있다. 순풍의 거의 모든 연분은 용녀부터 미달이까지 여자쪽의 돌진으로 맺어진다. 후배인 남편을 “인봉이!”라고 부르는 김 간호사와 그녀에게 반말과 존대를 섞어쓰는 표 간호사 부부의 대화는 일부 시청자의 불평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다. 자기가 원하는 게 뭔지 똑똑히 아는 아가씨 영란은 뜨개질과 기계수리에 다같이 능하다. 지난해 말에는 오 박사네 세 자매가 귀여운 피자 배달 소년을 장난삼아 희롱하는 우리 TV에서 좀체로 보이지 않던 광경이 전파를 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집안에서 일하며 의찬 부자와 창훈을 살뜰히 돌보는 방송작가 오중의 캐릭터에는 <남자 셋 여자 셋>의 ‘쁘와송’이 보여준 ‘퍼포먼스’와는 차원이 다른 여성성이 깃들어 있다. <프렌즈>의 조이와 챈들러에 흔히 비교되는 ‘커플’인 찬우와 오중, 그리고 의찬은 건강하고 온전한 대체 가족의 풍경을 연출한다. 미달이는 밉살맞은 꼬마지만 전례를 찾기 힘든 능동적인 여자어린이 캐릭터이며 의찬은 나이와 무관하게 <순풍…>에서 가장 이성적인 인물로서 어른과 동등한 관계를 유지한다. 강인한 여성과 섬세한 남성, 나름의 지성을 지닌 어린이. 바로 스테레오 타입을 불신하는 모든 창작물이 공유하는 덕목이다.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있을까. 아무것도 아닌 일에 벌떼같이 싸우다 사진을 찍자니까 금세 모여 활짝 웃으며 포즈를 취했다.” 언젠가 순풍 산부인과에 파견 근무를 나온 다른 병원 의사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적은 일기의 내용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순풍…>이 그리는 가정과 직장도 그렇다. 그곳은 낙원도 아니지만 지옥도 아니다. 고용주와 직원, 동료와 친구, 부모와 자녀는 다툼과 화해를 반복할 뿐 최종적인 해결은 없다. 자주 잊는 사실이지만 우리는 갈등을 끌어안은 채로도 멀쩡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은 멎는가

방송 매체의 듬성한 그물코 사이로 새어나간 일상 속의 무수한 유머와 해학, 페이소스를 <순풍…>은 여태 부지런히 건져 올려왔다. 그래서 우리는 <순풍…>을 보며 비공식적인 것이 공식적인 세계로 나아가는 쾌거를 구경하는 즐거움에 젖는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낙이 그렇듯 <순풍…>에도 끝은 있다. SBS 외주 제작팀은 현재 결정된 사항은 없다고 밝혔지만, 작가팀과 일주일에 나흘밤을 새우며 2년간 <순풍…>을 만들어 온 김병욱 PD는 10월 말 종영을 이야기하고 있다. 지친 몸과 정신을 혹시 매너리즘의 품 안에 던지게 될까봐 두려워서다. 그러면 <순풍…> 다음은? 웃음의 진정성을 믿고 우리 문화에서 아직 드라마보다 열등한 장르로 취급받는 시트콤의 불운을 속상해하는 김병욱 PD는 <순풍…>이 멈춘 그 자리에서 다시 시트콤과 연애에 빠져볼 계획이라고 한다. 기다려볼 일이다. 대대로 구박덩이 장르들은 그들의 사소함과 가벼움을 사랑하고 그 안에 잠든 위대함을 발견한 이들에 의해 화사하게 피어나지 않았던가.

지피지기? 백전백승!

오래된 <순풍…>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트콤 연출가들 인터뷰

2000년 방송가의 트렌드라면 뭐니뭐니해도 ‘시트콤 열풍’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노장 <LA 아리랑>이 여전히 질긴 생명력으로 버티고 있는 중에 재치있는 젊은 장수 <순풍 산부인과>가 나타나 이때까지 보지 못한 전략으로 승전고를 울리고, <오! 해피데이>와 <점프>가 전장의 이슬로 사라진 시트콤 전투에 새 장수들이 나타났다. 한때 명장 <남자 셋 여자 셋>을 배출한 가문 MBC에서는 일일 청춘 시트콤 <가문의 영광>과 월요 시트콤 <세친구>를 내놓았다. KBS는 이미 만화 전투에서 소문난 장수 <반쪽이네 가족일기>를 전격 스카우트해서 전복을 꿈꾸고 있다.

물론 각기 다른 시간, 다른 요일에 방송돼 정면대결은 아니지만 힘이 아닌 전략으로 승부하겠다는 각개 장수를 만나 <순풍…>에 대해 물어 보았다.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백승(百戰百勝)이라 했던가! 부디 시트콤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길…

송창의 PD/ MBC <세친구> 연출

관심을 가지고 본 것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내가 직접 본 횟수보다 작가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 들으면서 <순풍…>을 더 많이 접한 것 같다. <전원일기> 같은 편암함으로 부담없이 볼 수 있어서 좋다. 연출가의 입장이라기보다는 시청자의 입장에서…, 대단한 소재도 아닌 것을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걸 보면 캐릭터의 힘이 가장 큰 성공 요인 같다.

이재영 PD/ KBS <반쪽이네 가족일기> 연출

권위적이면서 ‘쪼잔한’ 남자들,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고 똑똑한 아이들. <순풍 산부인과>의 가장 큰 성공 요인은 캐릭터의 리버스에서 오는 쾌감이 아닌가 싶다. 한국적 시트콤의 전형을 보여준 듯싶고 무엇보다 ‘재미있다’. 하지만 언제가 ‘막가파’식의 극단적인 상황이나 캐릭터 등, 극약 처방에 중독된 시청자들에게는 더 강한 임팩트가 필요하게 될 것이다. 항생제가 없어질까 두렵다.

최영근 PD/ MBC <가문의 영광> 기획

<순풍 산부인과>는 기본에 충실한 시트콤이다. 작위적이지 않은 소재를 ‘벌여놓기’보다는 ‘파고들기’를 통해 이야기한다. 집중해서 들어가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굉장히 충실한 제작이 이루어지는 것 같다. 일주일에 5개 그것도 2개 이야기가 함께 가는 복합 구성으로 치자면 거의 10개인데 이런 것을 500회나 끌고 왔다는 것이 놀랍다. 연출과 작가진의 팀워크가 큰 성공 요인인 듯싶고 오지명씨 등 연기자의 열정이 상당히 큰 것 같다. 오지명씨는 그야말로 시트콤 연기자 아닌가. 박영규씨를 무덤에서 끌어낸 안목도 놀랍다. 미국의 경우엔 시트콤 연기자들이 따로 있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연기자들이 시트콤 연기하기를 꺼린다. 이미지를 고려한 거부반응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제작하기에 상당한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어쟀든 <순풍…>의 새로운 바람이 전체적인 시트콤 제작에 활기를 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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