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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 우수 비디오숍 콘테스트 [7]
2000-01-18

그곳엔 없는 테이프가 없다

우수 비디오숍 5 - 으뜸과 버금 신길점, 신원철씨

비디오에 문화라는 단어를 굳이 접목해 쓰거나 대여점을 영화수용 문화의 중심이라고 추어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도 대부분의 대여점은 포스터를 덕지덕지 붙인 침침한 실내에 먼지 뒤집어쓴 색바랜 테이프가 꽂혀 있고, 콩나물 다듬다 나온 부스스한 주인 아줌마가 지진 나는 액션물 내주면 동전 몇개 건네고 슬리퍼 끌고 돌아오는 것이 현실이다.

대단위 아파트를 낀 시흥 대로변 33평 점포에, 없는 테이프 없이 갖추어 놓고, 넥타이까지 단정하게 맨 양복 차림의 주인이 ‘경영의 노하우를 함께 나누어 한국형 대여점의 모델을 만들 때가 되었다’, ‘고객 감동을 어떻게 이끌어내느냐가 화두다’, 라는 말을 하면 이거 진짜인가 싶다. ‘으뜸과 버금 신길점’(02-847-6312, 02-847-7050∼1) 신원철(46) 사장은 도덕 교과서 같은 말만 한다. ‘으뜸과 버금’ 회장직을 맡았을 때, 그가 말을 꺼내려하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잠잘 태세를 갖추었다. 그 꼿꼿한 자세와 대사는 더해졌으면 더해졌지 헐거워지지 않았다. 대를 물리겠다고 매달렸는데 왜 철학이 없겠냐고 한다.

회사 생활 10년을 접고 개인사업을 시작했는데 신통치 않았다. 부인이 친구네 약국에서 파트 타임으로 일을 했는데, 마침 옆집이 비디오 대여점이었고 그걸 눈여겨보다 인수했다. 91년 11월의 일이다. 하려면 제대로 하자 싶어 이웃 가게까지 얻었고,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의뢰해 당시로서는 최첨단으로 꾸며 대여점주들이 견학을 올 정도였다. 대여점에 대한 인식이 낮아 서울 YMCA의 ‘건전 비디오 문화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에 나가 대여점주 교육을 받은 뒤 ‘으뜸과 버금’ 단체를 결성하는 데 힘을 보태 오늘에 이르렀다.

‘으뜸과 버금 신길점’의 자랑은 3만여편의 테이프, 그것도 알짜배기 테이프들이지만 고객의 높은 수준을 먼저 거론한다. 액션 영화라 해도 감독이나 배우의 지명도가 떨어지면 대여가 안 될 정도로 영화를 가려보는 고객이 많다. 따라서 이런 고객 수준에 맞추려 노력하다보니 저절로 테이프 보유가 실해졌다.

여의도가 가까워 3개 방송사 PD, 아나운서들이 자료 찾아 많이 오고, 이 집 때문에 이사를 못 간다거나 멀리서 소문듣고 왔는데 정말 없는 게 없이 다 있네요 하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 본인도 사고로 여러 번 입원했을 정도지만 배달, 회수를 꾸준히 하고 있고, 근처 가게들을 모아 카드 가맹점을 만들어 깎아주는 등 고객과 이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이벤트, 아이디어 창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대여업계 문제로는 숍의 영세성과 전문성 결여, 숍주의 의식수준 미비를 꼽는다. 즐길 수 있는 문화채널이 늘어났고, 사람들 성향도 놀랍게 바뀌어 가는데 찾아가고 싶은 공간 꾸미기, 고객 감동 서비스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대여료 인하경쟁이나 하면서 공멸의 길로 가는 것이 안타깝다. 편하고 친숙한 문화상품이면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대여료는 1500원으로 본다. 또한 X등급 정도 영화를 제외하고는 숍주가 고객 취향, 편의를 위한 동선 설계를 할 수 있도록 테이프 진열 권한을 주었으면 한다.

앞으로의 환경 변화 대처를 위해 오전에는 컴퓨터, 인터넷을 배우고 있고, 수지 맞추기에 연연하지 않도록 다른 사업도 병행하고 있어서 예술성 영화는 무조건 구입할 수 있다. 성장기 아이들의 비디오 보기, 비디오의 순기능 살리기도 숍주의 주요한 책무다. 주인은 큰 결정만 하고 객관적으로 숍을 관찰해야 하므로 숍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다. 따라서 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아르바이트생 고용에 신경을 많이 쓴다. 현재 아르바이트생은 영화와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이라고 자랑한다.

“경영에 관한 강의와 조언을 많이 들어봤지만 결국 내 점포 위치 특성, 고객 특성은 주인이 가장 잘 아는 것이지요. 우리 숍에 꼭 있어야 할 테이프와 수량은 숍주의 부단한 관심과 노력에 의해 경제적으로 책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부분은 특히 게을리할 수 없는 즐거운 일이자 보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언론에서 교통질서 지키기, 에티켓 지키기 캠페인을 하는데 한국의 대여점 문화도 외국에 자랑할 정도가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 일본 숍을 방문했을 때, 반납 기일을 어기고 연체료 시비를 한다거나, 분실하거나 테이프를 망가뜨려 와 거짓말하는 사례가 없냐고 묻자, 운영자들은 한결같이 이 말 뜻을 몰랐다. 그런 일이 아예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좋은 숍은 좋은 고객이 함께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옥선희/ 비디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