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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미래, 미래의 영화 [4] - 디지털과 필름
이영진 2000-01-04

디지털과 필름, 적과의 동침

한국 - 인터넷영화 사이버극장 우후죽순, 충무로와 따로 또 같이

<밀레니엄 살인 행진곡>

12월26일 두대의 카메라가 서울 명동의 한 백화점 입구를 봉쇄했다. 입구 측면은 소니 VX9000이, 정면은 VX1000이 맡았다. 행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과 엉거주춤한 동선을 피한 끝에 감독의 OK사인이 떨어지자, 무리들은 여느 촬영현장과 달리 다음 신을 촬영할 장소로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날 보충 촬영을 끝낸 <밀레니엄 살인 행진곡>은 2000년 1월1일 인터넷으로 네티즌들에게 선보였다. 촬영현장에서 2대의 DV(디지털 비디오)가 유감없이 보여준 기동성은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영화제작에서 기동성, 작동용이성, 경제성 등 디지털 작업의 매력은 그간 충무로와 독립영화계에서 이미 확인된 바 있고, 2000년 열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디지털 삼인삼색’이라는 특별기획 프로그램을 진행중인 박광수 감독과 김용태 감독, 신작 <눈물>을 준비중인 임상수 감독처럼 전면에 디지털 카메라를 배치하는 적극적인 모색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영화의 제작과정을 고려할 때 디지털 작업은 특수효과라는 후반작업에 한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컴퓨터 그래픽을 통한 그동안의 성과를 근거로 ‘디지털 작업이 기존의 필름을 대체할 것’이라고 판단하는 이는 어느 누구도 없다. 오히려 충무로에서는 ‘35mm 필름이 아니면 영화라 할 수 없다’며 디지털의 가능성보다 기존 방식을 선호하는 경향이다. 외곽에서 디지털 작업을 하는 이들에게 충무로의 이런 분위기가 ‘예술을 핑계로 답보 상태를 즐기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디지털과 관련된 인프라 환경이 제대로 구축되지 않았다는 현실 앞에서 이는 공허한 논쟁 이상은 아니다.

애초 의도한 효과를 내기 위해 디지털 카메라를 부분적으로 사용한 경우를 제외하면,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제작해놓고 영화로 ‘공인’받기 위해선 상당한 자본을 다시 키네코 작업에 투여해야 한다. 자본이 충분하다면 여러 가지 버전을 확보하는 것도 좋겠지만, 전 제작 과정에 걸쳐 시간적, 비용을 절감하는 경제적 효과를 위해 디지털 작업을 택한 저예산영화의 경우 극장 상영을 위해선 디지털 작업의 유전적 장점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디지털, 사이버 극장을 두드리다

물론 디지털 기술을 곧바로 구현할 수 있는 하드웨어가 없는 것은 아니다. HDTV, DVD 플레이어 등이 있긴 하다. 그러나 국내에서 상용화 단계에 들어선 것은 없다. 지금 이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인터넷이다. 네티즌들의 즉각적인 반응을 얻을 수 있고 서로 소통이 가능하며 회원들의 정보까지 파악해 마케팅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을 끌어들이기도 용이한 편이다. 시스템 작동은 재생산 구조의 유지가 핵심인 만큼 국내에서 인터넷은 디지털이라고 하는 신무기의 화력이 발휘될 수 있는 최상의 전장인 셈이다.

국내 인터넷 사이버 극장은 지난 99년 8월 씨네파크를 필두로 해서 앞다퉈 문을 열었다. 주문형 극장인 온디지털의 씨네파크(www. cinepark.com), 아이링크의 아이씨네(www.icine.com), 무료 사이트인 (주)네오무비의 네오무비(www.neomovie.com), IMP의 마구리(www.maguri.net)를 비롯해서 1월쯤에 문을 열 예정인 것까지 포함하면 10여개에 이른다. 여기서는 <카라>처럼 인터넷에서 극장과 동시 개봉하는 영화들과 비디오 출시 후 일정 기간이 지난 개봉작들, 그리고 상영기회를 원천봉쇄당한 단편·독립영화들을 만날 수 있다. 최근 아이링크는 내년 개봉작품까지 포함해서 시네마서비스와 판권계약을 맺었다. 계약내용은 개봉관 종영과 비디오 출시 사이 3개월 동안 계약대상인 작품을 인터넷에 올린다는 것. 결과는 아직 미지수지만 극장 다음의 윈도가 일반적으로 비디오 시장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유통구조의 틈새를 활용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물론 인터넷 영화관이 극장, 비디오, TV에 이어 충무로 영화산업이 맞아들인 제4의 매체인 것만은 아니다. 사이버극장의 등장은 ‘인터넷 전용 영화’의 출현과 함께 진행되고 있다. 필름 작업을 디지털 신호로 변환시켜 상영하는 형식이 아니라 처음부터 인터넷 상영을 목적으로 디지털로 제작한 ‘인터넷영화’는 99년 6월에 선보였다. 첫 테이프를 끊은 작품은 조영호 감독의 <Young-Hope의 하루>. 오픈한 지 보름 동안 약 30만건의 접속횟수를 기록한 이 영화는 각 상황에서 네티즌들이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클릭함으로써 서로 다른 8가지의 결론에 다다르는 인터넷 인터렉티브 무비를 내세워 언론의 관심을 끌었다. 두 번째 프로젝트인 <밀레니엄 살인 행진곡>도 어느 한 별장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둘러싼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를 네티즌들이 퍼즐을 맞히듯 추적하는 인터렉티브 무비다.

12월21일에는 인터넷영화에 꾸준히 투자를 해 온 한글과컴퓨터가 기획을 맡고 한길미디어가 제작한 <예카>(www.haansoft.com)도 인터넷 사이트에 올랐다. 총 80분 분량에 8부작으로 구성된 <예카>는 현재 3부까지 볼 수 있으며, 일주일에 2편씩 추가될 예정이다. 제작사쪽은 일주일 동안 6만여건의 접속횟수와 매일 3천여명의 신규회원 가입자수를 확보하고 있다고 밝혔다.

전송속도, 갈 길이 멀다

<예카> 촬영 현장

그러나 ‘인터넷영화’의 갈길은 멀다. 최초의 인터렉티브 인터넷영화인 <Young-Hope의 하루>는 리얼 플레이어 압축 파일 문제 때문에 현재 콘텐츠 전부를 볼 수 없는 상태다. 대용량의 인터넷영화를 보기 위해선 전용회선이나 초고속 통신망과 같은 LAN 환경 구축이 필수. 기존의 모뎀 사용자들은 불편함을 넘어 영화를 즐기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요구 사양이 보통 56k라 하더라도 실제로 그 속도를 완전히 실현하지 못하는 모뎀 때문이다. “움직이는 장면의 경우 픽셀 단위가 전체적으로 변화하며, 그러한 데이터 변환값을 처리하기 위한 전송속도는 적어도 초당 300kps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예카>를 기획한 한글과컴퓨터의 이윤영 감독은 말한다. 뚝뚝 끊기는 화면, 인물과 배경의 경계가 뭉그러짐, 사운드의 이지러짐 등은 모두 느린 전송속도에 의한 것이다. 여기에 방송용 모니터의 주사선 방식과 달리 점을 메워나가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인터넷 화면이라면 이미지와 사운드의 왜곡은 더욱 심해진다. <예카>에서 볼 수 있듯이 되도록 카메라의 이동을 자제하고 롱테이크로 상황을 포착하는 것이나 인물들을 잡을 때 주로 클로즈업을 사용하는 것도 촬영시에 기술적인 한계들을 미리 고려한 결과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가 위성을 이용하는 것이다. 아이링크는 내년에 무궁화 위성을 이용한 수신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물론 위성 안테나와 수신카드를 개인이 구입하는 것은 무리다. 그렇다고 외국의 사례처럼 극장에서 디지털 비디오 프로젝터를 가동해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아이링크쪽은 먼저 2000년 1월을 시험 운용 기간으로 삼고서 1천여개의 인터넷 영화방을 연결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디지털 작업이나 인터넷영화 작업에 직접 참여한 이들은 축적된 노하우나 메뉴얼이 없어 시행착오를 겪거나 때론 주저앉기도 했던 경험들이 있다. 그래서인지 기술적인 한계나 값비싼 기자재 확충 문제 못지 않게 전문인력이 없다는 우려도 만만찮다. 또한 상업성을 강조한 나머지 일련의 복제품 진열장이 되어버리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19세기에서 21세기로, 다시 혁명은 시작된다

19세기 말에 태어난 영화는 20세기 중반에 개발된 컴퓨터를 만나면서 표현방식에 일대 변화를 겪었다. 그리고 21세기로 넘어가는 즈음, 그것은 컴퓨터 그래픽 특수효과뿐 아니라 제작시스템과 유통구조 등 영화산업 전 분야에 걸친 ‘디지털 혁명’의 양상을 띠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혁명은 아직 그 초입에 있다. 디지털 기술은 두 번째 백년을 맞는 영화에 어떤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을까. 영화의 도래가 사진의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가능케 했던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