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아직 선댄스를 믿는다”
2001-02-15

파이퍼히직상 수상한 줄리언 무어 인터뷰

제10회 선댄스영화제에서 파이퍼-히직상을 수상한 여배우 줄리언 무어(41)를 파크시티에서 만났다. 파이퍼-히직상은 독립영화 정신을 기리는 상으로서 인디영화에 공헌한 영화인에게 헌정되는 상이다. 선댄스영화제의 프로그램 디렉터인 제프리 길모어는 “그녀의 커리어는 창의력의 성장과 예술적 성취에 대한 평생의 헌신을 반영하고 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줄리안 무어는 이런 시나리오가 완벽하게 들어맞는 경우, 토드 헤인즈의 <세이프>, 폴 토머스 앤더슨의 <부기나이트>, 로버트 알트먼의 <숏컷>등 많은 크고 작은 독립영화들 속에서 유난히 존재감 있는 여배우로 자리매김하다 <매그놀리아><애수>를 거쳐 리들리 스콧 감독의 <한니발>의 주인공으로 전격발탁됐고, 스필버그 사단의 차기작에서도 주연을 거머쥐는 등 연기경력의 전기를 맞고 있다. 본격 할리우드 입성을 앞둔 배우답게 외모에선 다소 세공된 이미지를 풍기긴 했지만 5년 전 선댄스에서 처음 인터뷰를 했을 때의 수더분한 자태나 부드러운 말투는 독립영화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 별명을 붙여본다면 아마도 '미국 독립영화계의 믿음직한 큰누이' 정도가 딱 맞을 듯하다.

-공교롭게도 그동안 이 상을 수상한 거의 모든 배우들이 아카데미 주연상의 영예를 거머쥐었다. 이제 당신 인생지도에도 아카데미 주연상이라는 포석을 놓을 때가 된 것 같은데.

=상처럼 사람을 신나게 하는 건 없겠지. 선댄스에서 이 상을 준다는 팩스가 날아왔을 때도 얼마나 좋았는지 펄쩍펄쩍 뛰어다녔다. “어떻게들 알았지? 나는 요즘 상 같은 것이 필요했는데…”라며 말이다. 오스카상은 재미있는 파티 때문에라도 항상 가고 싶은 곳이다. 난 아직 그런 곳이 익숙지 않아서 “어머, 나 TV에 나온다!” “지금 아카데미 시상식장에 와 있다구”라고 소녀처럼 외치며 두근댈 정도다.

-여기는 선댄스지만 <한니발>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정말 대단한 여름이었다. 기막힌 시나리오, 그리고 리들리 스콧 감독. 의심의 여지가 있었을까? 나의 연기생활에 있어 다소 위험할 수 있지만 의미있는 도전이 될 거라 생각했고 감독을 만나고 확신을 굳혔다.

-걸작의 속편인데다가 조디 포스터의 그늘이 부담이었을 텐데.

=당연한 일이다. 조디 포스터가 전편에서 보여준 완벽에 가까운 연기 때문에 잠을 못 잘 정도였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을 좀더 열어놓고 연기하려 애썼고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면서도 동시에 에너지를 충전하는 그런 경험을 했다. 기대에 못 미칠지 또다른 캐릭터가 나올지는 뚜껑 열어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신인, 거장 할 것없이 어느 감독들과도 호흡이 잘맞는 배우로 정평이 나 있는데 비결이라도 있나.

=감독들과 일을 할 때는 일단 오빠 내지 동생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영화 현장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이런 편안함을 갖는 것이다. 자기 스스로를 편하게 만들고 스탭과 배우들을 몰입할 수 있게 만드는 편안함. 물론 그러기까지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긴 하다. 이번에도 처음 리들리 스콧 감독을 만나자마자 그 역시 나처럼 빨간머리라는 걸 알고 콤플렉스부터 제법 통하는 게 있겠구나 생각한 것이 일을 순탄하게 마치는 데 도움이 됐다.

-작품 선정 기준은.

=나는 시나리오를 꼼꼼하게 다 읽는 편은 아니다. 출연 결정에 이르기까지 사실 첫 10페이지에서 판가름이 나는데, <지문의 신화>라는 작품이 특히 그랬다. 1996년 선댄스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했을 때였다. 2주간 20편 남짓 영화만 줄창 보느라 너무 피곤한 상태여서 출연 섭외차 밀려드는 시나리오들을 거들떠볼 수도 없었는데 하루는 매니저가 와서 꼭 한번 읽어보라고 하더라. 못 이기는 척 읽기 시작했는데 금방 해야겠다는 느낌이 왔다. 내 경우엔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도대체 감독이 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하게 다가올 때면 출연해야 할 이유도 명확해지는 것 같다.

-연기관이나 연기철학은.

=배우는 영화 속에서 감정적 화학작용을 통해 역할에 몰입하게 된다. 나는 토드 헤인즈의 <세이프>를 찍으면서 이런 연기의 맛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떤 극단적인 캐릭터라도 바로 나 자신 혹은 바로 옆사람의 이야기를 한다고 마음먹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직접 연출할 계획은.

=글쎄? 관심은 많지만 촬영 끝내면 아이들 유치원 보내고 전화로 수다떠는 보통 아줌마 생활을 또 쪼개서 뭔가 한다는 건 쉽지 않다. 요즘은 남편과 바트 프룬드리히의 <월드 트래블러>라는 작품에서 제작도 겸하고 있는데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

-늘 나오는 이야기지만 독립영화제의 기수로 할리우드로 입성한 입장에서 선댄스의 할리우드화에 대한 의견은.

=이곳에서처럼 영화제에 와서 영화를 즐기는 이들이 진정한 영화팬이라는 사실에는 반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내가 독립영화를 사랑하는 것이고. 사실, 요즘 할리우드는 모든 곳에 존재하는 것 아닌가? 영화라는 것이 어차피 생산물의 속성을 갖고 있고 생산물은 사고팔 수 있을 때 생명력을 유지하며 그러려면 시장이 존재해야 한다. 여러 우려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직 선댄스를 믿는 건 독립영화를 지지하고 젊은 재능들을 발견하는 그 정신 자체는 아직 할리우드식으로 오염되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파크시티=채희승/ 미로비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