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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감독의 신작이 궁금하다] 나홍진 감독의 <살인자>(가제)
이화정 사진 최성열 2009-01-06

삶의 야생성을 추격하라

왠지 숨가쁠 것 같다. 관객 500만명을 동원한 <추격자>의 감독이 만드는 차기작은 연쇄살인범을 잡기 위해 내리 40시간 좁은 골목길을 내달리는 엄중호의 심경만큼이나 절박할 것 같다. 그러나 한창 시나리오 작업에 매진중인 나홍진 감독의 템포는 조금 다르다. ‘천천히, 아직도 구체적인 구상을 모두 마친 상태는 아니’라는 말로 한 발짝 물러선 채, 그는 자신의 차기작 <살인자>(가제)에 대해 조곤조곤 말문을 연다.

<살인자>는 옌볜에 사는 한 조선족의 이야기다. 한국에 밀입국한 부인의 실종 이후, 옌볜에 남아 있던 남자가 밀항을 하고, 굶주림에 지쳐갈 즈음 ‘어떤 사건’(이 사건이 영화를 끌어가는 동기를 제공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비밀에 붙여둔다)을 맞닥뜨리면서 이내 살인까지 저지른다는 내용.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을 모델로 했던 전작과 달리 이번 작품에는 특정 참고 모델이 없이 온전히 취재에 기인한 창작물이다. 사실 그가 자신의 사정거리에서 한참 동떨어진 조선족의 이야기에 주목한 건 어느 날 분식집에서 식사를 하던 아랍계 소년을 보면서부터다. 남루한 복장의 어린 소년은 누가 자신의 끼니를 탐하기라도 하는 듯 경계하며 서둘러 밥을 먹고 있었다. “식당 주인에게 물어보니 아이가 매일 이곳에서 한끼를 해결한다 하더라. 같은 음식이지만, 어쩌면 사치가 돼버린 요즘의 식문화와 소년이 생존을 위해 먹는 밥의 간격은 너무 컸다.” 나홍진 감독의 머릿속을 내내 맴돌던 이 고민은 <추격자>를 찍으며 만난 형사들과의 대화와 얽히며 점점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나갔다.

코리아 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밀입국하고 불법 취업하거나 범죄에 악용당하는 조선족의 이야기는 시사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다. 이런 소재라면 사회파 감독이 건드릴 만한 작업이자, 상업영화에서라면 지루한 스토리로 흥행은 바닥을 치기 십상이다. 장르영화에 적을 둔 나홍진 감독 역시 이 부분은 충분히 고민했던 지점이다. “이놈(<추격자>)이 나한테 칼 들이대는구나 싶더라. <추격자>가 내게 고마운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그렇지만 많은 관객이 선택한 만큼 차기작도 거기에 부합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추격자>의 잔영이 남은 관객을 충족시켜줄 ‘재미’는 무너뜨리지 않은 채 비정한 사회에 내동댕이쳐진 채 살려고 발버둥치는 한 남자의 모습을 가감없이 보여주어야 했다. 섣불리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아닌, 그저 알려주고 생각해보고 싶었다.

쓰다 보니 또 스릴러… 캐스팅은 제로에서 시작

얼마 전 취재차 다녀온 옌볜. 그곳에서 그는 자신이 구체화해야 할 한 남자의 모습을 보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수소문해 어떤 이들에게 쫓기는 청년을 만났다. 신기하게도 그에게 ‘야생성’이 느껴졌다.” 한국 사람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윤택한 삶을 사는 옌볜. 이곳 사람들은 몇년간의 노동으로 ‘번듯한’ 아파트 한채를 마련하기 위해 교수를, 간호사를, 또 안락한 가정을 등지고 한국에 온다. 그러나 애초 먹은 마음과 달리 한국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다. 그들을 이용하려는 브로커가 판을 치는 무법의 세상. 나홍진 감독은 지금 한국사회에 엄연히 존재하는 그 커다란 ‘구멍’을 솜씨 좋게 헤집으려 한다. <추격자>가 ‘날것’의 영화였다면, <살인자>는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야생’의 모습이다.

이 처절한 삶의 야생성을 보여주는 도구는 여전히 스릴러다. ‘쓰다 보니 어느새 스릴러가 돼 있더라’는 본인의 말처럼 장르에 대한 어쩔 수 없는 편향은 차기작을 또 한번 스릴러로 귀환시킨다. “<추격자>를 찍으면서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후반으로 갈수록 장르로서의 치밀함이 떨어졌다. 이번 영화에서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같은 꽉 들어찬 긴장감을 주고 싶다.” 혹여 염두에 두고 시작하면 ‘영화 속 캐릭터’를 ‘특정 배우’에 가둬둘까 두려워 캐스팅은 순수한 제로에서 시작한다. 나홍진 감독에게 <살인자>는 아직 취재차 옌볜을 수도 없이 가야 하고, 도대체 몇고의 시나리오를 써야 완성된 책을 보여줄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공정이 남은 숙제다. 그러나 벌써 새로운 영화의 싹은 심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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