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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t see] <노잉> 무섭다, 정말 경이롭다
김도훈 2009-04-14

속는 셈치고 온몸을 던져볼 만한 알렉스 프로야스 감독의 <노잉>

알렉스 프로야스의 <노잉>은 압도적인 재난영화다. 나이트 샤말란적인 음모론 영화다. 요한계시록적인 지구 종말 영화다. 그리고 안드로메다로 뻗어가는 우주적 SF영화다. 그러니까 대체 이게 무슨 영화냐고?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중요한 건 알렉스 프로야스가 <다크 시티> 이후 가장 프로야스적인, 모두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기묘한 상업영화를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노잉>은 이런 질문으로부터 시작한다. “지구의 종말을 어떻게 막지?”

“지구의 종말을 어떻게 막지?” 극중의 니콜라스 케이지가 말한다.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은 지구의 종말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아마겟돈>의 브루스 윌리스도 아니고 <인디펜던스 데이>의 윌 스미스도 아니다. 이 찌뿌듯한 할리우드 스타의 얼굴에 비장한 영웅의 면모는 없다. 그러니까 저 대사를 들을 때쯤 영리한 관객은 대충 이해하게 될 거다. <노잉>에서 지구의 종말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말이다. 예고편을 보니 니콜라스 케이지가 재난과 종말을 예언한 숫자들을 손에 쥐고 있었는데 그런 퍼즐 맞추기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그렇다. <노잉>은 결정론자의 종말론이다.

그럼 복잡한 이야기 하나 간단하게 해보자. 과학자(그리고 철학자)들의 오래된 논쟁 중 하나는 결정론과 비결정론이다. 결정론자들은 우주의 모든 일이 이미 정해져 있는 대로 일어나는 것이라고 믿는다. 비결정론자들은 우주의 모든 일이 우연이나 자유의지에 의해 불규칙적으로 일어나는 거라고 믿는다. 뭐가 맞냐고? 양자물리학이 등장하면서부터는 많은 사람들이 비결정론을 더욱 지지하지만, 낸들 알겠는가. 아직 해답은 없다. <노잉>이 던지고 스스로 찾아헤매는 질문도 바로 그거다. 모든 재앙과 인류의 종말은 이미 예정된 것인가. 인간은 이미 예정된 종말의 날을 자유의지로 되돌릴 수 있는가. 결정론의 숭배자였던 아인슈타인은 말했다. “나는 신이 우주를 상대로 주사위놀이를 하는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알렉스 프로야스도 같은 생각이다.

테러 연상시키는 공포의 재난영화

<노잉>은 1959년의 어느 날로 시작한다. 새로 개관한 초등학교의 학생들이 상상 속의 미래를 그림으로 그린다. 아이들의 그림은 타임캡슐에 봉인된 다음 50년 뒤에 공개될 예정이다. 그런데 한 소녀는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귓가에 속삭이는 숫자들을 종이 위에 빽빽하게 적어내리기 시작한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어느 날 타임캡슐은 다시 세상으로 나온다. 새로운 세대의 학생들은 50년 전 선배들의 그림을 하나씩 물려받는다. 소녀가 휘갈긴 숫자들이 적혀 있는 종이는 천체물리학 교수 존 코슬러(니콜라스 케이지)의 아들인 캘럽 코슬러(챈들러 캔터버리)의 손에 들어간다. 우연히 이를 발견한 존은 종이에서 09112001이라는 숫자에 주목한다. 9월11일. 2001명의 사람이 죽었다. 존은 숫자들이 지난 50년간 발생한 대형 재난의 날짜, 사망자 수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경악한다. 게다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재난까지 이미 종이 위의 숫자들은 예고하고 있다.

문제는 존이 그저 한명의 천체물리학자일 따름이라는 거다. 그에게는 정부의 고위관리와 연락할 길도 없다. 누구도 그가 부르짖는 진실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존은 예언서에 나와 있는 두번의 거대한 재앙인 비행기 추락사고와 지하철 탈선사고를 직접 체험한 뒤 아들인 캘럽이 어떻게든 50년 전의 예언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다.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검은 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남자들이 아들의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존은 예언서에 쓰인 마지막 숫자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50년 전 숫자들을 쓴 소녀의 딸인 다이아나(로즈 번)와 손녀 애비(라라 로빈슨)를 만난다. 존 부자와 다이아나 모녀는 숫자의 마지막이 묵시록의 날에 대한 경고라는 걸 깨닫는다.

<노잉>은 여러 가지 혼성 장르가 마구 섞여 있는 영화다. 전반부는 나이트 샤말란식 음모이론 스릴러와 재난영화(이 둘을 합친 것이 샤말란의 지난 작품 <해프닝>이었다), 후반부는 종말론적 SF영화다. 전반부의 재난영화로만 평가하자면 <노잉>은 지금껏 개봉한 어떠한 재난영화의 스펙터클도 훌쩍 뛰어넘는다. <노잉>은 롤랜드 에머리히의 영화로 대표되는 익숙한 할리우드 재난영화가 아니다. 전반부를 강타하는 비행기 추락 장면과 지하철 탈선 장면은 상업적인 재난영화라고 하기에는 지나칠 정도의 공포를 안겨주는 시각적 테러다(<데스티네이션> 시리즈를 떠올려보시라). 추락한 비행기에서 기어나온 가족은 갑작스러운 폭발에 휘말려 불에 탄 채 니콜라스 케이지의 눈앞에 쓰러진다. 지하철을 기다리던 직장인들은 선로를 탈선한 차량에 짓이겨진 피죽이 된다. 게다가 비행기 추락 장면은 단 하나의 숏으로 촬영되어 있어서 유튜브의 아마추어 리얼리티 재난 영상들을 연상시킨다.

나이트 샤말란식 음모론+스필버그식 SF

알렉스 프로야스는 “재난을 매혹적으로 묘사하는 걸 최대한 회피하려 노력했다. 그래서 속이 울렁거릴 만큼 현실적으로 재난을 묘사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몇년 전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극장에서 봤을 때가 생각난다. 영화가 시작한 지 10분 뒤 나는 관객의 반응을 보고 싶어서 객석을 돌아봤다. 세상에. 나는 그렇게 공포에 질린 얼굴들을 이전에는 단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는 그때까지 관객이 한번도 영화를 통해 체험하지 못했던, 전장 한가운데 직접 갇혀 있는 듯한 공포를 안겨줬다. 너무나도 사실적인 표현. <노잉>에서 내가 원했던 것이 그거였다.” 알렉스 프로야스가 묘사하는 재난이 지나치게 노골적이라고 불평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야스가 이러한 시각적 테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분명하다. 그는 재난의 현장에서 무방비로 죽어나가는 사람들과 그들을 무방비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존의 모습을 통해 인간 존재의 어쩔 수 없는 나약함을 관객에게 주지시킨다.

거기서부터 영화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방향으로 흐른다. 존이 도달하는 결론은 마지막 재앙으로 죽는 인간이 ‘모든 인류’라는 사실이다. 50년 전 소녀가 휘갈긴 종이의 숫자들은 전 인류의 멸종을 암시한다. 인류는 개미처럼 ‘이미 결정된’ 재앙에 쓰러져갈 것이다. <노잉>은 결정론을 믿는 결정론자의 재난영화다. 여기서부터 영화의 진정한 스포일러가 시작되기 때문에 더이상의 이야기를 까발리는 건 예의가 아니다. 다만 <노잉>의 후반부가 초기 스티븐 스필버그 영화의 영향력을 기묘하게 드러낸다는 것 정도는 미리 알아둬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넘버 23>으로 시작한 영화는 ‘9·11 이후 재난영화’와 샤말란 영화(특히 <싸인>과 <해프닝>)의 혼성으로 진행되다가 <딥 임팩트>와 <미지와의 조우>의 경지에 도달한다. 고전SF 팬들이라면 로드 서링의 오래된 TV시리즈들을 연상할 것이다. 니콜라스 케이지도 여기에 동의한다. “이 영화는 나에게 <환상특급>이 지니고 있던 강렬한 느낌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최고작 <다크 시티>와 이란성 쌍둥이

<노잉>이 나이트 샤말란과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향력 아래서 만들어진 영화인 동시에, 지극히 알렉스 프로야스적인 영화라고 말하는 것 또한 온당하다. 특히 <노잉>은 프로야스의 최고작인 <다크 시티>와 이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다. 알렉스 프로야스는 “현실이라고 믿는 세계가 사실은 컴퓨터 프로그램 따위의 허상에 불과하다는 내용의 SF소설을 보며 자랐다. 나는 그런 소설을 읽고 꿨던 악몽으로부터 <다크 시티>를 창조했다”고 말한 바 있다. <다크 시티>는 밤마다 모습을 바꾸는 도시의 이야기다. 이 도시는 외계인들이 인간에게 가상 기억을 주입해서 실험하기 위해 만들어낸 허상의 지구다. 마지막에 가서야 주인공은 자신이 허상의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노잉> 역시 마찬가지다. 지구의 미래는 이미 오래전부터 우주에 의해 결정되어 있었다. 지구인들은 거대한 우주의 불가해한 힘에 의해 예정된 길을 걸어가는 존재일 따름이다.

<노잉>의 니콜라스 케이지는 <다크 시티>의 루퍼스 스웰(심지어 <아이, 로봇>의 윌 스미스)의 형제다. 그들은 진실을 알기 위해서라면 언제라도 빨간약을 삼킬 준비가 되어 있다. 알렉스 프로야스는 자기 영화의 캐릭터들을 “의미를 찾아헤매는 나의 또 다른 버전들”이라고 일컫는다. “니콜라스 케이지의 캐릭터는 과학자이자 실용주의자다. 논리와 물리법칙을 믿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믿음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때닫는다. 그는 나다. 나는 의미를 찾아헤맨다. 답변할 수 있는 질문을 찾아헤맨다. 나에게는 여전히 해답보다는 의문이 더 많다. 게다가 해답을 찾아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내 흥미를 자아내는 건 해답이 아니라 탐구 그 자체다. 그래서 내 영화의 남자들은 존재 가치에 대한 증거들을 찾고 싶어한다. 이 영화는 영적인 탐험이다.” <노잉>은 실존주의적인 SF작가라 할 만한 알렉스 프로야스의 성향이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나는 영화다.

천재적 야바위꾼의 주사위놀이

그런데 프로야스의 탐구정신이 그리 새로운 건 아니다. 지난 19세기로부터 수많은 SF 작가와 감독들은 끊임없이 ‘우주에서의 인간 존재’를 탐험해왔다. 그 질문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풀어내는 순간 SF 장르 특유의 경이감(sense of wonder)이 발생한다. 그런데 알렉스 프로야스의 영화가 주는 경이감은 진정한 경이감이라기보다는 경이로운 서커스에 가깝다. 그의 영화들이 꼼꼼한 장르 SF처럼 시작한 뒤 결국엔 불가지론적 철학서처럼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이, 로봇>이 그러하다. 프로야스는 주인공 로봇의 진화를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에 입각해서 설명하는 대신 불가해한 진화로 뭉뚱그려버린다. 그래서 <아이, 로봇>은 재미있는 블록버스터였지만 아시모프의 팬들이 좋아할 만한 영화는 아니었다. 독창적인 장르적 해설을 바라는 팬들에게 프로야스는 SF소설 지망생의 습작 같은 결론을 툭 던져버린다. 비록 프로야스가 “내가 SF를 좋아하는 것은 ‘아이디어’가 바탕이기 때문이다. 감독으로서의 의무는 이같은 아이디어를 액션, 감정과 함께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지만, 그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조한 적은 거의 없다.

대신 프로야스는 독창적인 이야기꾼들이 과거에 완성해놓은 아이디어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활용하는 데 대단히 능하다. 재미있게도 바로 그런 지점으로부터 <노잉>의 경이로움이 시작된다. 알렉스 프로야스는 이 6천만달러짜리 재난-음모론-묵시록적 SF를 만들기 위해 자신이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장르의 클리셰들을 모조리 끌어들인 다음, 도저히 상업영화가 이룩할 수 없는 차원의 결말까지 이야기를 확장해버린다.

<노잉>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관객의 뺨을 후려치는 영화가 아니다. 감독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들의 클리셰를 모조리 끌어모아 퀼트처럼 하나의 이야기 속에 이어붙이는 서커스로 관객의 뒤통수를 치는 영화다. 무서울 정도로 대담하다. 그리고 바로 그 대담함 때문에 많은 관객은 알렉스 프로야스가 관객을 상대로 우주적 주사위놀이를 했노라 불평할 것이다. 맞는 소리다. 알렉스 프로야스는 야바위꾼이다. <노잉>은 속는 셈치고 온몸을 던져볼 만한, 천재적 야바위꾼의 주사위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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