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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의 왕자는 청바지를 입는다?
이화정 2010-01-12

그리스 신화를 배경으로 한 리얼리즘 판타지,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 현장을 가다

밴쿠버 시내에서 동쪽으로 미니버스를 타고 한 시간여,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의 촬영은 빽빽한 침엽수가 울창하게 들어찬 휴양림 ‘골든 이어즈 파크’에서 진행됐다. 메이플 릿지에 위치한 이곳은 도심에서 고작 한 시간만 지나면 광활한 자연을 내준다는 점에서 밴쿠버 시민들의 여름 피크닉 장소로 각광받고 있다.

피크닉을 하기엔 아직 이른 철이라서일까(현장공개가 이루어진 시점은 작년 5월이었다). 촬영 전날, 제작사인 이십세기 폭스로부터 전달받은 ‘현장촬영을 위한 필수 복장’은 ‘비를 대비한 장화와 우비, 따뜻한 옷가지’였다. 그러나 제작사의 당부사항이 무색하게도 아침부터 날씨가 화창하다. 폭스사의 현장 매니저는 “어제까진 일주일 내내 비도 많이 오고 추웠어요. 취재진이 오니까 거짓말처럼 날씨가 개네요”라며 오늘 촬영이 순조롭다는 걸 일러준다. 날씨 칭찬이 끝난 지점부터는 차가 진입하지 못하는 비포장도로. 현장까지 꼬박 걸어서 가는 수밖에 없다.

거대한 숲길을 따라 걷다보니 원작이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사용한 판타지소설 <퍼시 잭슨과 올림포스의 신>인 만큼 이 비현실적인 숲이 효과적으로 사용될 수 있을 거란 짐작을 해본다. 아니나 다를까, 내리막길 끝 호숫가, 칼과 창, 투구와 갑옷 등을 챙긴 보조출연자들이 모여 마침 점심을 하러 나선다. 딱 봐도 십대 청소년들이 전부. 그런데 고대 그리스 전투 장비를 제외하곤 면 셔츠에 청바지와 미니스커트, 레깅스 등 각각 제멋대로의 편안한 차림이다. 쉬는 시간이라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았냐고 묻자 “아뇨, 저희는 이 옷 그대로 입고 영화에 나와요”라며 웃어 보인다. 자, 청바지를 입은 신화의 세계.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의 리얼리즘 판타지의 구현은 이렇게 시작된다.

번개도둑 찾으려는 반신 소년의 험난한 여정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은 <해리 포터> 시리즈의 1, 2편을 연출한 크리스 콜럼버스가 연출을 맡은 판타지영화다. 이미 판타지 소설로는 <해리 포터> 시리즈에 이어 전세계 2만명의 팬층을 확보한 릭 라이어던의 소설 <퍼시 잭슨과 올림포스의 신>이 원작으로,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인간 사이에서 특별한 능력을 부여받고 태어난 ‘반신’(Demi-God) 소년 퍼시 잭슨의 모험담이다. 제우스의 번개를 훔쳤다는 오해를 받은 퍼시 잭슨이 번개를 훔쳐간 진범을 찾으러 나서는 험난한 여정이 이야기의 뼈대. 17살이 되도록 출생의 비밀을 모르고 자란 평범한 소년 퍼시 잭슨은 졸지에 번개도둑을 찾아내 신들의 대전쟁을 막아야 하는 영웅으로서의 절대임무를 부여받는다. 영화는 퍼시가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되고 모험을 하는 소설의 1편 <미스터 D의 여름캠프>와 2편 <번개도둑>까지의 내용을 토대로 한다. 신화 속 그리스 신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에 올림푸스 신이 살고 있으며 2차 대전은 제우스와 포세이돈의 자식들과 하데스의 자식들이 편을 갈라 싸운 것이라는 일견 어처구니없는 상상이 거리낌없이 전개된다. 뉴욕과 로스앤젤레스, 라스베이거스 같은 대도시들이 그 모습 그대로, 신화의 공간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크리스 콜럼버스는 “그리스 신화는 리얼함과 상상이 공존하는 세계다. 그게 바로 이 영화가 그리는 현재다”라며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의 세계를 설명한다.

제임스 본드, 수트 대신 레깅스 입다

취재진에게 공개된 신은 신과 인간의 자식들인 반신들이 다니는 반쪽피 캠프에서 이루어지는 게임을 그리고 있다. 붉은 깃발과 푸른 깃발로 팀을 나눈 80명의 보조출연자들 사이로 퍼시 역의 행운을 거머쥔 신예 연기자 로건 레먼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3:10 투 유마> <게이머>에서 얼굴을 알린 배우다. 게임은 뒷전, 아이들은 모두 번개도둑이자 포세이돈의 아들이라 알려진 이 이방인에게 더 관심이 가는 듯 수군거리기에 바쁘다. 아레스의 아들과 비너스의 딸이 모두 모인 자리. 퍼시 잭슨을 향한 오해와 견제로 그를 향한 반감이 팽팽하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시끌벅적함을 잠재울 역할은 이들을 지도하는 교사이자 퍼시 잭슨의 정신적인 스승이 될 시론에게 맡겨진다. 헤라클레스, 알렉산더 대왕, 마이클 조던, 타이거 우즈까지 쟁쟁한 ‘반신’들을 모두 교육시킨 교사 역은 피어스 브로스넌이 연기한다.

본드의 멋진 슈트차림 대신 오늘 그가 입어야 하는 옷은 ‘굴욕적인’ 초록 레깅스다. 게다가 키를 높이기 위해 스카이 콩콩을 연상시키는 장대를 두 다리에 끼운 채다. 다리는 말의 형상을 한 영화 속 시론을 위한 특수분장용 의상. 후반작업 특수효과를 거치면 이 우스꽝스러운 복장 대신 신화 속 인물로 거듭나는 것이다. 딱 봐도 여간 불편해 보이지 않는다. 브로스넌은 잠깐의 짬이라도 나면 다리를 쉴 간이의자를 찾느라 바쁘다. 반면, 칼과 창을 휘두르는 액션이 주가 되는 만큼 로건 레먼은 촬영 전부터 5개월간 꼬박 연습한 액션 연기를 실천하랴, 대사까지 소화하랴, 여유 부릴 틈이 없다. 혼란스런 장면이지만 크리스 콜럼버스는 큰소리 한번 내는 법 없이 배우들에게 연기를 꼼꼼히 지도한다. 리어카에 잔뜩 실은 간식용 샌드위치와 아이스크림 차가 현장으로 들어오는 순간, 아슬아슬한 긴장도 잠시 휴식이다. “아침 다섯시에 일어나서 현장에 왔다”며 “그게 생활인걸” 하고 말하는 브로스넌도 소란 속 촬영 대신에 가져온 잡지를 꺼내들고 혼자만의 시간을 찾아 들어간다.

주인공 퍼시, 사춘기 소년으로 변모시켜

2009년 2월 촬영을 시작으로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은 2010년 2월11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최근 들어 할리우드가 팝콘 무비용 영화로 그리스와 로마 시대를 주목하는 추세라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에 대한 관심이 적지 않다. 물론, 태생부터 ‘<해리 포터>의 아류작’이라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떠안은 영화라는 점에서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은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의 운명이 만만치 않음을 인정한다. <해리 포터>의 성공과 동시에 할리우드는 ‘넥스트 <해리 포터>’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 역시 그렇게 기획된 무수한 판타지 블록버스터 중 한편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입견을 가지고 보는 건 금물이다.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의 장점은 그러니 <해리 포터>의 그늘을 한 꺼풀 벗고서부터 찾아나서야 할 것이다.

소설 속 주인공이 12살인데 반해 크리스 콜럼버스는 퍼시 잭슨을 17살의 민감한 청소년으로 변모시켰다. <해리 포터>를 통해 발굴한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하는 대신, 그는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을 통해 17살 퍼시의 생활을 조명하려 한다. 갑작스럽게 알게 된 아버지의 존재, 엄마와의 불화, 친구들과의 관계 등 퍼시 잭슨이 처한 모든 상황은 판타지라는 가정을 벗고 보면 곧 또래 청소년들이 공감할 수 있는 바로 자신의 문제가 된다. 그가 <나홀로 집에> <미세스 다웃 파이어> <스텝맘> 같은 할리우드 가족영화에 일가견이 있다는 점을 볼 때, 그야말로 전공인 셈이다. 아니나 다를까, 벌써 “시리즈로 만들고 싶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는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은 누구보다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의 장점과 한계를 잘 알고 이 영화를 만들었다. 큰 기대보다는 안정적인 그의 판타지영화라면, 물론 환영할 만하다.

“메두사 머리 보면 깜짝 놀랄 것”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인터뷰

<해리 포터> 시리즈 1, 2편을 연출한 크리스 콜럼버스는 백기를 들었다. 물리적으로 힘에 부쳤다고 했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지도 못하는’ 현장 대신 그는 <해리 포터>의 프로듀서를 택했다. 그러나 다시 현장으로 돌아온 그는 활기차고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촬영 중 그가 잠깐 짬을 내서 인터뷰를 허락했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물리적으로 힘에 부쳤다고 했다. 다시 현장에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가. =제2의 <해리 포터>는 없다고 생각했다. 하루에 8시간에서 10시간을 2년 넘게 꼬박 일했다. 물리적으로 힘에 부쳤다. 그럼에도 신화와 관련된 책을 좋아하는 걸 못 참겠더라. 고전이지만 신화는 여전히 현대에 적용시켜도 매력적인 돌아볼 만한 이야기들이다. 영화로 만들고 싶었다.

-<해리 포터>를 그만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나. =전혀 없다. 물론 감상적인 부분은 있다. 내가 캐스팅한 아이들이 커가는 것을 볼 때 말이다. 내가 더이상 그 세계에 속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멜랑콜리한 감상에 젖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세계로 다시 돌아갈 생각은 없다.

-<퍼시 잭슨과 번개도둑>은 그리스 신화의 세계를 스크린에 창조해내야 한다. =정말 정교한 CGI 작업이면 가능하다. CGI로 사람들이 결코 본 적 없는 광경을 만들 수 있다. 커다란 도전이지만 가능하다. 예를 들어, 메두사 역을 맡은 우마 서먼의 경우 머리에 뱀을 얹은 모습이 CGI로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화면에서 보면 깜짝 놀랄 만큼 멋지다.

-원작 소설 팬들의 기대가 크다. 팬들은 그대로 재현해주길 바라지 않나. =아쉽지만 원작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원작 팬들이 보기엔 퍼시가 나이가 좀 많아 보일 거다. 책에서는 12살 소년이지만 영화에서는 17살이다. 민감한 시기이니 캐릭터의 고민이나 생활들이 좀더 흥미로워졌다. <해리 포터>와 달리 이번엔 좀 자유롭게 원작을 바꿨다.

-대니얼 래드클리프를 비롯해 해리 포터의 신예들을 발굴했다. 퍼시 역의 로건 레먼 역시 그런 기대를 갖게 한다. =이런 말 잘하지 않는데, 로건 레먼은 놀라운 배우다. (웃음) 난 그가 할리우드의 톱배우가 될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17살의 나이에 그런 집중력과 현실감각을 지닌 배우를 보지 못했다. 다른 배우들 역시 캐스팅이 정말 엄청나게 잘됐다. 피어스 브로스넌은 물론이거니와 우마 서먼도 주목할 만하다.

-<해리 포터> 시리즈에 일정 부분 빚을 지고 있다. 비슷한 구석이 많은데. =나도 잘 알고 있다. 이런 영화라면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분명 <해리 포터>와 같은 관객층을 겨냥하고 끌어들이기 위해 기획한 영화인 점은 맞다. 그러나 ‘해리’와 ‘퍼시’는 분명 다른 소년이다. 영화는 극장에 가서 봐야 알 수 있으니 판단은 관객에게 맡기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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