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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민 감독의 고군분투 영화찍기로 본 독립영화의 경제학 (1)
2002-03-22

빚 안 지고 영화했으면 하는 소망이 있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전하는 산악인의 이야기를 영화로 찍는 일은, 그 자체가 험난한 산을 오르는 과정이었다. 고영민 감독의 . 이 영화는 작년 제27회 독립단편영화제에서 최우수상의 영광을 누렸으나, 완성되기까지 2년의 제작기간은 눈밭을 헤치고 얼음비탈에 미끄러지는 춥고 굴곡진 길이었다. 영화 속 등반이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보다 1m 더 높은 ‘가상의’ 목표를 향하는 반면, 영화 만들기는 현실 여건의 장애물들과 부대끼며 이룬 싸움과 타협의 결과인 것이다. 감독이 “무전여행 같았다”고 말하는 그 배고픈 여정의 대차대조표까지 들추며 지나온 길을 낱낱이 복기하는 것은 잔인한 일이 될지도 모르나, 이 땅에서 단편영화를 만드는 이들이 넘고있는 봉우리의 굴곡진 지형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있다. 편집자

콧물 방울이 턱까지 흐르기도 전에 얼어붙을 것 같은 혹한의 설산. 매서운 바람 속을 뚫고 위태로운 발걸음을 옮기는 등반대원 앞에, 먼저 출발한 동료가 고지를 눈앞에 두고 싸늘하게 쓰러져 있다. 대원은 동료의 옷에서 태극기를 꺼내품는다. 여기까지는 사뭇 진지하고 경건하기까지한 휴먼드라마인가 싶다.

그러나 이야기는 갑자기 반전을 맞는다. 천신만고 끝에 정상을 정복한 대원, 간직했던 태극기를 꺼내들고 이 감격적인 순간을 찍어 역사에 남기려하지만 쉽지 않다. 카메라가 쓰러져서, 태극기가 얼굴을 가려서, 셀프타이밍을 놓쳐서 번번이 실패하며 분위기는 우스꽝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연발하는 좌절에 따라 관객들의 웃음이 잦아지는가 싶다가, 결국 마지막 장면에서는 사진을 찍지 못하고 대원이 숨지는 것으로 영화는 맺음한다. (연출 고영민, 35mm, 12분)는 이렇게 탄력있는 12분으로 관객을 사로잡는다.

인간의 욕심과 허영을 깔끔한 코미디로 그려낸 이 작품은, 독립단편영화답지 않은 세련된 품새를 보여준다. 한눈에 봐도 외국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규모가 그렇고, 눈덮인 산맥 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산 정상을 넓은 화면으로 시원하게 담아낸 35mm 필름의 스케일이 그렇다.

지난 2월 아트선재센터에서 있었던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 전에서 무대 인사를 하는 고영민 감독의 얼굴은 붉었다. 그리고 그 뺨의 홍조가 관객들 앞에서 자기 영화에 대한 애정을 애써 숨기느라, 혹은 드러내느라 열이 오른 작가의 수줍음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곧 알게 되었다.

촬영 1주일, -7kg

인터뷰를 위해 다시 만났을 때도 고영민 감독의 얼굴은 여전히 발갰다. 를 찍으면서 추위에 피부가 노출되어 한달 정도는 활동이 힘들 정도의 동상을 입은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얼굴 동상 정도는 대수로운 일이었다며, 촬영 당시 이야기의 말문을 열었다.

지난해 4월. 동계올림픽 개최지인 일본 나가노의 북알프스 지역에서 진행된 의 촬영은 그야말로 악전고투였다. 카메라는 외상으로 빌리고, 비행기삯만 겨우 챙기고서 한국에서 가져간 쌀과 김치로 버티며 15일을 난다는 빡빡한 일정. 온통 눈천지인 산을 꼭대기까지 오르는 이야기이니 감독을 비롯해 촬영진 모두가 아마추어 산악인이 되어야하는 건 당연했다. 해발 2400m의 텐트에서 자고, 일어나면 얼어있는 신발끈을 호호 녹여 묶고서 3010m의 촬영지까지 산을 오르내리는 데만 꼬박 6시간이 걸렸다. 부실한 식사로 추위를 견디며 촬영하는 것만도 큰일인데 매일 등반 아닌 등반까지. 스탭들 모두 살이 7∼8kg씩 빠지고, 일주일을 넘기면서는 하나둘 나가떨어지기 시작했다. 변덕스런 날씨와 엄청난 체력소모 때문에 결국 돌아오는 날 아침까지 촬영을 했음에도 원하는 결말을 찍지 못한 채 철수해야 했다. 과욕의 도전이었다.

현지의 돌발요소들을 미리 계산에 넣지 못한 실수도 뼈아팠지만, 제작비가 좀더 넉넉했더라면 스탭들을 덜 고생시키며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또한 크디컸다. 영화가 덜컹댈 때마다, ‘제작비’ 문제는 그 알파와 오메가에 걸려있었다.

계획서를 들고 ‘영업’ 뛰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고영민 감독의 제작비 고민은 영화진흥위원회 독립영화 부문 지원작으로 당선되면서부터였다. 지원금만으로는 부족한 나머지 예산을 충당해야했기 때문에, “돈 걱정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던 셈. 가 영진위 하반기 제작지원작으로 뽑혀 600만원의 지원금을 받은 1999년 11월 직후부터는 프리프로덕션 작업과 함께 투자자 유치를 위해 발로 뛰는 ‘영업’의 날들이었다.

2000년 초까지는 촬영장소 헌팅을 다녔다. 처음에는 당연히 국내의 산들을 염두에 두었다. 주말마다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으로 각지의 산을 떠도는 것은 물론, 영화의 특성상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전망을 살펴야했기 때문에 매번 꼭대기까지 올랐다(그는 그때까지 등산이라고는 해본 적도 없는 데다 고소공포증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후조건에서 ‘세상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1m 위’를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문제에 부딪쳤다.

해발 8849m의 고지는 수목이 전혀 자라지 못하며 눈과 얼음으로 덮여있다. 앵글이 좁은 샷들은 소금이나 밀가루를 동원해서 커버한다고 해도,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산 전체의 조망까지 해결할 방도가 난감했다. CG비용은 비용대로 들면서 완성도는 떨어질 우려가 있는 것. 그리고 힘겨운 도전의 과정과 꼭대기에 오르고나서 소동의 아이러니를 그림만으로 표현해야하기에 우리나라 산들의 눈에 익은 지형은 화면에서 전달하는 힘이 떨어질 거라는 부분도 걱정이었다. 결국 그는 마지막으로 오른 한라산 정상에서, 외국으로 나가야겠다고 결론내렸다. 독립영화를 해외에서 찍는다는 이례적인 결정은 이런 고민 끝에 이루어졌다.

해외 로케를 결정하면서 몇배로 늘어난 예산의 부담을 안고, 먼저 영화 속에 등장하는 등반장비 협찬에 나섰다. 고산등반 전문장비들은 물론 스탭들이 사용할 등산화며 방한복도 필요했다. 그러나 우리나라 등반장비 업체들을 거의 다 다녀도 협조해준다는 곳이 없었다. 언제 어디서 개봉할지도 모르는 작은 영화에 고가의 물건을 내놓을 수 없다는 것. 결국 등반전문가들을 만나 각개격파하는 식으로 도움을 구했고, 등산 관련 잡지의 발행인이 본인 장비를 흔쾌히 빌려주어 촬영이 가능했다. 영화 속에서 중요한 소품으로 등장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SK글로벌의 지원을 받았다.

현물지원은 해결되었다해도 파이낸싱은 산 넘어 산이었다. 시나리오에 자신이 있던 고영민 감독은 처음엔 자신만만했다. 투자자를 찾기가 어렵지 않으리라 보고, 빵빵하게 준비한 자료집을 들고 제작비 마련을 위해 뛰었던 것. 그러나 메이저 영화사들부터 한창 열기가 뜨겁던 인터넷 닷컴기업들까지, 줄잡아 30여 군데를 최고 서너번씩 돌아다녔는데도 별 소득이 없었다. 제작비 유치에 성공한 곳은 LG화재 한 군데뿐. 등반대원의 옷소매에 적힌 로고에서 회사명을 드러내는 방식의 PPL로 300만원을 지원했다. 보람없는 시간이 7월까지 꼬박 반년을 이어가면서 “빚지고는 영화 안 찍는다”던 평소 그의 신조도 “젊어서 아니면 언제 빚져보냐”로 바뀌었다.

그러나 10월에 다시 한번 영진위의 지원금을 얻어, 당장 빚을 지는 일은 없게 되었다. 이번에는 장편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공모부문. 여기서 받은 우수상 상금 1천만원에, 인츠닷컴 시나리오 공모에서 받은 200여만원, 애초의 영진위 지원금 600만원까지 얼추 1800만원을 시나리오와 영화기획서 공모를 통해 모았다. 총 2200만원. 이 정도면 촬영에 착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좌절한 헌팅, 실패한 첫 로케이션

처음 촬영장소로 물망에 올랐던 곳은 뉴질랜드. <반지의 제왕> 촬영 시기가 1999년에서 2000년 사이였으니, 잘 하면 같은 땅덩이의 이쪽저쪽에서 나란히 영화를 찍을 뻔한 셈이다. 국립공원 소장에게 이메일을 보내 도움을 구하고, 그 주변 스키장들에 직접 공문을 띄우며 협조를 요청할 때만해도 가능성이 보였다. 그러나 2000년 3월의 현지 헌팅길에서 부딪친 것은 역시 돈 문제. 뉴질랜드 국립공원에서는 매일 촬영비를 내는 것과 함께 안전요원 몇 사람 이상이 촬영에 동행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장소협찬비에 인건비 부담까지 지게된다는 얘기에 결국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향한 곳이 일본 나가노다.

현지 한국인이 일본 관광청과 다리를 놓아주어 접촉하게된 나가노의 북알프스는 뉴질랜드에서 부딪치던 조건들이 모두 자유로운 것으로 보였다. 사용료 없이도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는 데다, “스스로 안전을 책임지겠다”라는 각서 하나로 무사통과여서 안전비용이 덜 든다는 점 또한 다행스러웠다. 2001년 1월, 세부조건들이 서로 합의되자마자 고영민 감독은 사전방문 없이 바로 촬영에 나섰다. 준비만 길었던 영화, 어서 촬영에 나서고 싶은 마음에다 뉴질랜드 헌팅에서 헛걸음하고 돈만 날린 것을 만회해볼 작정이 합해졌던 것이다.

그러나 헌팅비 100만∼200만원을 아끼려던 의도는 결국 더 큰 손실을 낳았다. 영하 수십도까지 내려가는 1월의 악천후를 감안하지 못했던 것. 2∼3m씩 눈이 내리고, 스탭들이 눈구덩이 속을 뚫고 들어가면 카메라가 얼어서 멈추어버렸다. 촬영팀은 현지의 상황에 대해 몰랐고, 중간 섭외를 맡아준 한국인은 영화촬영의 메커니즘에 대해 알지 못했던 서로의 무지가 낳은 악재였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하는 심정으로 버티다가 결국 스탭들이 조난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총 2100만원의 제작비 중 1700만원을 날리고, 애써 찍어온 필름도 배우가 다쳐 교체되면서 버릴 수밖에 없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다. ▶ 고영민 감독의 고군분투 영화찍기로 본 독립영화의 경제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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