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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생충> 비평①] <기생충>을 통해 봉준호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잉여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에 대하여

침입, 복선, 초과

봉준호의 영화에서 장르 규범은 늘 관객을 유인하는 일종의 맥거핀이다. 그는 장르 규범을 따르는 척하면서 무너뜨린다. 등장인물의 욕망에 따라 궁극의 성취를 향해 가는 목적론적 서사로 위장한 플롯은 어느 단계에서 애초의 궤도를 이탈하고 관객을 엉뚱한 지점에 데려다놓는다. 원인과 결과는 일치하지 않으며 애초의 동기는 다른 결과를 불러오고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자신들의 의지로 세상에서 원하는 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복합적인 구조적 효과를 증명하는 사례의 당사자가 된다. <살인의 추억>(2003)은 살인범을 잡는 형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형사들이 살인범을 잡지 못하게 된 사회구조의 효과에 방점을 찍었다. 이 영화에서 형사들은 그들의 능력이 달려 범인을 못 잡기도 하지만 범인을 잡지 못하게 만드는 후진적인 국가 시스템의 희생자들이기도 하며 그 때문에 이 영화는 통상적인 범죄 스릴러 형사 영화의 규범에서 벗어난다. <마더>(2009)는 살인 누명을 쓴 아들의 결백을 증명하려는 어머니의 사적인 탐문을 담지만 그 과정에서 어머니는 아들의 결백 여부를 확신하지 못하며 아들 대신 혐의를 뒤집어쓰는 또 다른 누군가의 운명을 슬퍼한다. 아들의 범죄에 관한 진실의 단추를 영원히 봉인하는 어머니의 고뇌는 개인의 안위에 무심한 공동체의 타락과 그것을 방조하는 개인들의 탈규범적 행위들을 동시에 주목하게 하면서 모성이라는 절대적 신화에 가린 어머니의 병리적인 증상을 슬픈 정조로 관찰한다. 어느 쪽으로도 관객이 기대한 원인-결과의 해결 플롯이 아니지만 이런 당혹스러운 서사적 전개를 펼치는 한편으로 봉준호는 (<살인의 추억>이나 <마더>의 마지막 장면들이 그랬던 것처럼) 화면들이 서사를 설명하는 기능적 역할 이상의 것을 성취하는 인상적인 이미지의 잉여를 만들어냈다.

침입 그리고

장르 규범을 이용하지만 장르의 기대지평을 배반하는 대신 다른 것을 창조하는 봉준호의 영화적 개성에 대해 다양하게 논의할 것이 있지만 이제 그의 신작 <기생충>에 초점을 맞춰보자. 부잣집에서 벌어지는 계급간의 충돌을 다룬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김기영의 <하녀>(1960)에 대한 봉준호식 오마주이자 한국영화의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21세기 버전으로 계승하며 새로 창조하는 모범이다. 임상수 감독이 김기영 영화의 핵심을 외면하면서 자기 것을 창조했던 <하녀>(2010)에서의 방식과 다르게 봉준호는 김기영 영화의 핵심을 되살리면서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김기영의 <하녀>에서 아직 중산층 계급이 정착되지 않은 당대의 현실은 1층과 2층으로 분리된 양옥집의 계단과 각각의 방의 미닫이문을 효과적으로 활용해 넘나드는 극중 주인공 하녀의 숱한 ‘침입’을 통해 시각적으로 강조된다. 김기영 영화에서의 하녀 주인공은 주인집 남자와 정을 통한 후 그걸 무기로 거실과 작업실을 잇는 1층과 2층 사이의 계단을 자기 마음대로 왕래하거나 안방 미닫이문을 아무 때나 드르륵 열고 드나들면서 마나님 행세를 하고 자신의 상승된 권력을 과시한다. 반대로 임상수의 <하녀>에서 계급 이동과 상승의 수단으로 쓰였던 계단과 문의효과는 초반부터 원천 봉쇄된다. 주인과 정을 통한 후 하녀가 다음날 아침 의기양양하게 그 남자를 대할 때 남자는 우아하게 피아노를 치며 아예 여자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돈이 든 봉투를 가져가라고 여자에게 눈짓할 뿐이다. 임상수 영화에서 하녀는 주인들의 공간에 침입할 기회를 전혀 갖지 못하며 계단 모티브는 오히려 그가 마음대로 오르내리지 못할 장애로 설정된다. 영화 말미에 주인공은 자기 몸을 태우고 이층에서 떨어져 죽는 끔찍한 최후를 맞는다.

봉준호는 임상수와는 좀 다른 시도를 한다. 2층 양옥집을 주 무대로 삼았던 김기영의 서사 공간을 다세대 주택이 몰려 있는 빈곤층 동네와 넓은 정원을 갖춘 대저택이 몰려 있는 부유층 마을로 확장하고, 전반부를 서울의 저지대에 사는 가난한 4인 가족 주인공들이 고지대 상류층 동네 박 사장(이선균) 집에 취직하는 이야기로 전개시키고 중반 이후를 그 부잣집 대저택에서 일어나는 대혼란의 비극적인 소동극으로 끌고 간다. 기택(송강호)의 아들 기우(최우식)가 친구의 소개로 IT 기업을 경영하는 박 사장 부부의 큰딸 과외교사로 들어가면서 시작하는 도입부는 일종의 강탈영화 플롯처럼 전개되는데 기택 가족은 박동익의 아내 연교(조여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바탕으로 이 집안의 운영에 필요한 여러 업무를 담당하는 자리에 취직해 경제적인 안정을 꾀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푼다.

기택 가족이 동익과 연교 부부를 속여먹는 초·중반까지 기택네 가족 일당의 행위는 부도덕하지만 그들의 목표에 관객을 공모시킴으로써 그들의 행위에 어떤 도덕적 책임도 묻지 않게 만든다. 그때까지 기택 가족이 겪는 가난으로 인한 불편과 모멸은 충분히 묘사되었으므로 그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꾀하는 경제적 이윤 추구의 동기는 목표지향적 플롯이라는 장르 규범의 관성에 기대어 납득 가능해진다. 이 사이에 잠시 망각되는 것은 기택과 충숙(장혜진)이 취직하기 위해 꾸민 책략의 희생자들, 그 집에서 원래 일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누군가가 차지하고 있던 일자리를 다른 누군가가 대체할 수 있다는 생존게임의 논리는 장르의 규정판 안에서 유희적으로 묘사되는 덕분에 용서된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게임의 논리를 위해 희생되었던 현실의 논리는 슬금슬금 플롯으로 밀려들어오며 현실의 조건들을 상징적으로 모방한 모티브가 중반 이후 전면화 된다. 영화에서 점층적인 대구법으로 쓰이는 가장 주요한 모티브는 ‘침입’인데 초반 기택의 집 묘사 장면에서부터 가동된다. 반지하방에 사는 기택네는 그들이 밥을 먹을 때를 비롯한 일상사의 전면에서 창가에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노상방뇨하는 취객들로부터 고통을 받는다. 때론 무심한 일상사로 치부하고 넘겨버리지만 가끔 그들의 심기가 불편할 때 이 노상방뇨 침입은 시비를 부른다. 기우의 친구 민혁(박서준)이 기택 집에 찾아오는 장면에서 기택 식구들은 여느 때처럼 해질녁에 자기네 집 창가에서 노상방뇨를 하는 취객을 보며 심상하게 대하지만 민혁은 단호하게 취객을 상대해 혼을 내고 쫓아낸다. 똑똑한 친구는 역시 다르다고, 기택은 민혁을 칭찬하는데 나중에 식구들이 박 사장네 집에 취업하기 시작한 시점 이후에 이들 가족은 노상방뇨하는 취객에게 이전보다 더 단호한 태도로 응징을 가한다. 기택과 기우 부자는 밖으로 나가 페트병에 물을 담아 취객에게 물을 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양동이에 담긴 물로 취객을 공격한다. 전반부의 유쾌한 희극적 톤에 실려 묘사된 이 침입에 대한 응전의 사례는 후반부의 호우가 몰아치는 장면으로 공명되는 시각적 메아리를 만들어내며, 아울러 침입의 연쇄 사태가 이어지면서 맞게 되는 대단원의 파국을 예감시키는 복선이기도 한데 무엇보다 물을 퍼부어대는 과정에서 튀는 물방울들의 잔영을 통해 누군가의 침입과 그에 대한 응전 보복이 피바다의 유혈극으로 맺음되는 결말에 대한 잔혹한 전미래적인 농담이기도 하다.

선을 넘지 않(아야 하)는 관계

영화 중반, 이제 모두 박 사장네 집안의 직원이 된 기택네 식구들은 박 사장 가족이 야외로 캠핑간 틈을 타 그 집 거실을 차지하고 거나하게 술판을 벌인다. 그때까지 그들이 가장하고 있던 직책을 내던지고, 곧 학벌 좋은 대학생과 오랜 경력의 솜씨 좋은 운전사와 가정부 집사의 품위를 연기하던 가면을 벗어던지고, 그들이 그 집안 내부에서 노는 다소 상스럽고 거친 언행은 보기에 아슬아슬하다. 남의 집 거실을 차지하고 앉아 기택네가 벌이는 이 난삽한 술판은 그들의 무례한 침입을 강조하지만 이 술판의 질펀한 흥은 벼락을 동반한 호우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깨진다. 그때까지 가난을 탈출하기 위한 목적을 걸고 그들이 연기했던 모습을 즐기면서 동조했던 관객은 이 시점에서 당황하게 된다. 술에 취한 기정(박소담)은 욕을 하기 시작하고 기택은 거기에 장단을 맞추듯 아내 충숙을 향해 거친 상소리를 퍼부은 다음 그게 다 장난이었다고 하는 해프닝을 벌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비루함을 자각하고 있으며 그것이 모두 돈이 없어서 초래된 것이라고 여긴다. 그들은 돈이 사람을 반듯하게 만들어주는 다리미 같은 것이며, 박 사장네 사람들이 예의바르고 착한 것은 모두 돈 덕분이라는 데 서로 동의한다.

곧이어 이 집에서 쫓겨난 가정부 문광(이정은)의 느닷없는 방문과 문광이 오랫동안 감춰뒀던 지하실의 비밀이 밝혀지면서 침입의 모티브는 기생의 모티브와 겹치며 중층적으로 강화된다. 기택과 마찬가지로 대왕 카스테라를 파는 사업이 망하면서 무일푼으로 전락한 문광의 남편 근세(박명훈)는 수년간 박 사장네 지하의 비밀 피난처에 은거하고 있었고 박 사장네 아들이 언젠가 봤다는 귀신의 정체도 바로 거실에 몰래 올라왔던 근세였다는 것이 드러난다. 기택네는 이 느닷없는 제3자들의 침입에 당황하고 그들의 자리를 위협하는 문광, 근세와 싸워 완력으로 제압하지만 퍼붓는 호우로 캠핑을 취소하고 돌아오고 있다는 연교의 전화가 오면서 기택네가 처한 곤경은 더욱 켜켜이 쌓인다. 기택네가 간과했던 것은 그들이 도덕적 가책을 받지 않고 행했던, 다른 사람들을 밀어내고 대신 차지했던 기생적인 삶의 형태가 결과적으로 그들이 의식하지 못했던 침입의 형태로 변환되었으며, 그 침입은 문광과 근세의 지하실 기생 사실이 밝혀지면서 위협받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의기양양하게 여겼던 것처럼 박 사장네 사람들의 공간을 자유로이 염탐하고 점유함으로써 박 사장네 식구들의 부를 자기들 것으로 일부 전유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들의 의도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이었는지를 자각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해 그들이 받는 모욕와 치욕은 슬프면서도 우스꽝스러운 상황으로 드러나는데 거실의 큰 탁자 밑에 숨어 있던 기택과 기우, 기정은 정원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는 아들의 안전을 염려해 거실 소파에서 잠을 청하던 박 사장 부부 동익과 연교가 잠결에 성교를 하는 걸 보고 듣는다. 그들이 들키지 않기 위해 숨을 참고 숨어 있을 때 그들이 생생하게 보고 듣는 동익과 연교의 내밀한 부부관계는 그들이 박 사장 부부, 동익과 연교에게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는 상황 때문에 치욕을 준다. 그들은 엿보는 자의 권력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동익, 연교에게는 보이지 않는 존재여야 하기 때문에 치욕을 느낀다. 그들은 동익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대로 ‘선을 넘지 않는 관계’에 머물러야 하는 존재들이다. 이 상황은 그들에게 선을 넘지 않는 상태로 상층 계급 사람들의 생활 범위에 들어가면 안 되는 그들의 처지를 새삼 실감시킨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존재여야 하고 그들이 보이는 존재여야 할 때는 그들을 부리는 사람들이 그들을 필요에 따라 호출할 때뿐이다. 기택네는 그들이 방금 전에 응징한 문광, 근세와 똑같은 처지에 처해 있다. 이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은 원래부터 그러했다. 그들은 당당하게 공세적으로 박 사장네 공간을 점유/침입했다고 착각했지만 사실은 숨어 사는 기생의 존재와 다르지 않다. 아울러 그들은 문광, 근세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존재를 감추기가 힘든데 동익이 그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를 눈치 챌 뻔하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영화가 김기영의 영화와 갈라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김기영의 영화에서 하녀는 권력의 전도가 가능하다고 믿고 함부로 집 안을 헤집고 다녔다. 봉준호가 김기영의 <하녀> 못지않게 참조한 것으로 보이는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1995)에서도 주인공 가정부와 그의 반란을 충동질하는 우체국 여직원은 주인집 식구들의 사생활을 염탐하고 그들이 없는 틈에 그들이 사는 공간을 점유하면서 유사 주인 행세를 하는 데 거리낌이 없으며 그들의 그런 행위가 드러난 순간에 받는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인집 식구들을 가차 없이 응징한다. 반대로 <기생충>은 낮은 계급이 높은 계급을 이기는 목적론적 서사의 필요충분조건을 충족시킬 것처럼 위장했으나 탁자 밑에 웅크리고 숨었다가 반지하방이 있는 저 낮은 곳의 자기네 동네로 퇴각하는 실패담으로 귀결된다.

계획하지 않았던 상황

기택과 기우, 기정이 가파른 계단을 따라 집으로 돌아갈 때 그들은 세차게 내리는 비를 맞는다. 비에 흠뻑 젖은 그들의 모습은 그들의 반지하방 창가에 노상방뇨를 하던 취객이 기택과 기우가 뿌린 물세례를 받았던 앞선 장면의 세찬 반향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집을 침입했으며 그에 따른 일차적 과보를 받았다. 도덕적 인과응보라는 장르 규범의 또 다른 측면을 끌어오면서 배치한 이 이미지의 잔상에 겹쳐 봉준호의 천재성이 발휘되는 건 그다음이다. 영화 속 한 장면에서 기택은 위기를 타개할 계획이 있다고 기우에게 말하는데 나중에 기우가 그 계획이 무엇이냐고 묻자 아무 계획이 없는 것이 바로 계획이라고 답한다. 그렇게 아무 계획이 없는 것이 최선의 삶의 방도라고 믿었던 기택은 마지막 장면에서 전혀 예기치 않게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다. 기택은 동익의 아들 다송이(정현준)의 생일파티에서 희생자 인디언을 연기하기 위해 인디언 복장을 하고 행사를 치르다가 살인을 저지른다. 그는 계획하지 않음으로써 무탈하게 자신과 가족의 생존과 번영을 도모할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가 살아가면서 체득할 수밖에 없었던 냄새는 동익과 연교에게 끊임없이 그의 존재, 그의 계급적 처지를 상기시킨다. 인디언 희생자를 연기하는 기택의 모습은 그가 계획하거나 계획하지 않거나 그가 차지한 사회적 적대조건의 상태를 대변한다. 환상에 기초해 살아가거나 당장의 물질적 필요에 끌려 행동하는 것이 살아서 견디는 유일한 방식이라고 여겼던 기택과 기택의 가족은 그들이 계획하지 않았던 상황, 사회적 적대관계의 모순에 끌려나온 전쟁의 당사자로 호출당한다. 장르적 규범이 삶이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또 다른 형태의 프로파간다로서 유용하다면 봉준호는 그 선동의 유효성을 거절한다. 그 어떤 고함이나 외침보다 냉정하게 현실의 지표를 제시하는 봉준호의 대리인으로서 송강호는 대단원의 장면에서 인디언 분장을 하고 곧 살육의 소란이 벌어질 행사장에 입장하기 위해 대기하는 기택의 피로와 불안과 분노가 섞인 표정을 연기한다.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과는 또 다른 맥락에서 정서의 초과를 경험하게 해주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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