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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영화광 김봉석, 일본 V시네마 현장을 가다
2002-05-10

`300엔 영화관`, V시네마는 어떻게 일본 장르영화의 산실로 자리잡았나

나 홀로 극장, 비디오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영화관의 3분의 1도 채 안 되는 대여료에 섹스이건 잔혹한 폭력이건 상관없이 나만의 영화를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것. ‘비디오 오리지널’, 즉 극장에서 개봉을 하지 않는 비디오 전문영화인 일본의 V시네마는 이러한 배경에서 태어났다. 주로 20대 남성을 타깃으로, 그들만의 독특한 취향을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일본의 V시네마는 89년 <크라임 헌터>로 시작했다. 10년의 세월이 흐르고, 비디오의 황혼이 찾아온 지금도 여전히 1년에 100여편이 제작되고, V시네마에서 출발한 미이케 다카시라는 거장도 낳았다. 스타와 장르라는 두 가지 안전판 사이에서 철저하게 상업적이고, 또 그만큼 자유로운 실험이 가능했던 V시네마는 그러나 이제 전환점에 서 있다.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이미 전성기가 지난 일본 V시네마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우리에게 부족한 장르영화의 가능성을 찾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일본 V시네마는 싸구려이고, 도식적인 장르영화이고 그래서 즐거운 영화다. 영원히 '비열한 거리'에 남아 있을.편집자

90년대 중반, 부산국제영화제 등에서 만난 일본의 영화인이나 기자들은 대부분 ‘일본영화는 망했다’라고 단언했다. 사회적 이슈가 되거나 대중의 관심을 끌 화제작은 거의 나오지 않고 젊은 세대는 일본영화에 관심이 없다, 해외영화제에서 수상하는 일본영화들은 개인적이고 돌발적으로 등장하는 작품일 뿐이다 등등. 하지만 외부인의 시선으로 보이는 일본영화계는 조금 달랐다. 70년대는 거대한 폭풍이 몰아친 직후처럼 초라했지만, ‘망했다’던 80년대에는 작지만 많은 걸작이 있었다. 모리타 요시미쓰, 이시이 소고, 소마이 신지 등 자주영화 세대가 일본영화계의 중견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89년에는 기타노 다케시가 나왔다. 90년대 후반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말고 사회적 이슈가 되는 일본영화는 <실락원> <쉘 위 댄스> 정도였지만, 조금씩 일본영화계는 활력을 찾고 있었다.

각광받는 작가는 비디오 전용영화로 시작했다

현재 일본영화계에서 1년간 메이저 배급망을 통해 전국 개봉을 하는 일본영화는 50여편, 단관상영 등으로 상영되는 영화는 50여편 그리고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고 바로 비디오로 출시되는 영화 즉 V시네마가 100여편이다. 이처럼 일본에서는 매년 200여편 이상의 영화가 만들어진다. 집에서 개인적으로 만들어지는 홈무비가 아니라,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스크린이건, TV건) 만들어지는 영화가. 90년대 말 이후 ‘망했다’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그럼에도 에너제틱한 한국영화계를 부러워하는 것만은 여전하다. 일본 대중문화의 중심은 여전히 만화이고, 영화는 약간 비껴나 있다. 바깥에서 보기에, 일본인들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80년대나 지금이나 별다른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일본영화는 살아나고 있다. 영화편수도 많고, 재능있는 감독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고, 해외에서의 평가도 높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90년대 그나마 일본영화가 명목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자주영화를 찍다가 80년대 활발하게 움직인 젊은 감독들 덕이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나오는 법이다. 요즘 해외에서 주목하는 감독은 미이케 다카시와 구로사와 기요시다. V시네마로 시작했고, 지금도 V시네마를 만들고 있는 미이케 다카시는 유럽과 미국에서 각광받는 ‘작가’다. 점점 평가가 높아지는 구로사와 기요시도, 과거와 다름없이 여전히 V시네마를 만들고 있다. 혹시 그들이 걸어온 길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90년대 중반, 일본의 V시네마를 꽤 본 적이 있다. 있는 돈을 탈탈 털어 위성을 달고, 일본의 위성채널을 봤다. <스코어> <멋대로 해라> <제로우먼> <치한일기> <신백합족> <여교사> 등등. 당시에는 V시네마가 무엇인지 몰랐지만, 그 영화들이 일종의 저예산영화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97년인가 미이케 다카시의 데뷔작 <후도>를 본 뒤,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자유로운, 이렇게 파격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이 있다면 당연히 영화는 진보할 것이라고. 물론 미이케 다카시는 탁월한 재능의 소유자이고 경직된 시스템을 뛰어넘은 작가이지만, 가능성은 모두에게 열려 있었다.

미국이라면 ‘B급영화’로 불릴 V시네마를, 그 ‘장르영화’들을 보는 일은 꽤 흥겨웠다. 80년대 후반 비디오대여점에서 싸구려영화들을 마구 빌려다 볼 때 간혹 있었던 ‘발견의 즐거움’이었다. 최소한 자신들이 만드는 영화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는 장르영화들. 너무나 단점이 명확해서, 때로는 장점이 되기도 하는 영화들. 미국의 경우에도,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고 바로 비디오로 직행하는 영화들이 있다. 주로 공포물과 에로물 그리고 액션영화다.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황혼에서 새벽까지>는 2편과 3편이 비디오 전용으로 만들어졌다.

인재 육성과 장르 영화의 인큐베이터

일반적으로 비디오 전용영화는, 소수의 관객을 대상으로 특정한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다. 싼 제작비로, 공포영화의 경우는 잔인하게, 에로물은 야하게. 물론 제작비를 많이 들여 화려하고 완성도가 높은 영화를 만들어서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는 일이 최선일 것이다. 하지만 할리우드 메이저에서 만드는 영화들의 성공 확률도 1/4 정도에 불과하다. 거액의 제작비를 투자하다가 망한 할리우드의 제작사(심지어 메이저도)는 한둘이 아니다. 비디오용 영화의 전략은 작게 확률이 높은 베팅으로, 작게 조금씩 이익을 내는 것이다.

V시네마 출범의 사령관이었던 도에이비디오의 구로사와 미쓰루 전무는 V시네마의 역할이 “인재 육성과 장르영화의 유지”였다고 말한다. 일본 비디오업계의 산 증인이며, 이란 책을 쓴 영화비평가 다니오카 마사키는 ‘V시네마는 일본영화의 중흥을 밑에서 일구고 있었다’라고 평가한다(다니오카는 V시네마의 대표적인 배우 아이카와 쇼의 일종의 ‘배우론’인 <아이카와 쇼 철포탄전설>을 아이카와와 함께 내기도 했다). 70, 80년대 일본영화의 침체기에 일본 영화스탭들은 생계유지조차 힘들었다. 60년대 <고지라> 시리즈를 비롯한 특촬물을 대거 만들었던 도호의 특수촬영 스탭들은 도통 영화 일이 없었던 까닭에 도쿄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성이나 나가사키의 하우스템보스의 건설에 참여하기도 했다(닛카쓰에서 로망포르노를 만들라는 요구를 거부하고 영화계를 떠난 중견감독들도 많다. 그 덕에 일본의 전통적인 도제 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바로 감독에 데뷔한 젊은 감독들이 많았고 그들이 80년대 뉴웨이브의 주역이 되기도 했지만). 89년에 시작된 V시네마는 기존의 영화스탭들을 그대로 고용했고, 젊은 감독을 기용하는 데에도 인색하지 않았다(연출료가 싸다는 이유도 있었다). 극장용에 비해서 규모가 작기는 했지만, 그외의 모든 것은 동일했기 때문에 V시네마는 영화인의 단련장으로도 유용하게 작용했다. 감독을 비롯한 스탭만이 아니라, 배우들의 경우에도.

'비디오 오리지널', 89년 <크라임 헌터>로 시작

일본의 V시네마는 ‘비디오 오리지널’ 즉 극장에서 개봉하지 않는 비디오 전문영화를 말한다. 젊은 남성을 타깃으로 하는 액션이나 에로물. 개인에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비디오 대여점에만 판매하기 때문에 미리 판매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감독이나 배우, 영화의 제작비에 따라 대강의 가이드라인이 정해지는 것이다. 89년 도에이비디오에서 ‘V시네마’라는 라벨명으로 <크라임 헌터>를 출시하면서, 일본 시장에서는 비디오 전문영화 붐이 일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V시네마는 도에이비디오에서 등록한 비디오 전문영화의 라벨명이다. 하지만 해외나 일본 내에서도, V시네마를 비디오 전문영화의 통칭으로 사용한다. 워크맨이 소니에서 발매한 휴대용 카세트의 상품명이었던 것처럼. 로망포르노가 애초에는 닛카쓰가 제작한 에로틱한 영화의 라벨이었지만, 이제는 70년대의 선구적인 에로틱 영화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통명사화한 것처럼(약간 차이는 있다. 로망포르노는 등록을 하지 않았지만, V시네마는 상표권 등록을 했다). 도에이가 V시네마라는 라벨명으로 출시를 시작한 이후 닛카쓰의 V피처, JVM의 V시어터, JHV의 V무비, VIP의 V피처 등 유사 라벨로 비디오 전문영화를 출시하는 제작사가 생겨났고 다이에이의 신영화천국, 쇼치쿠의 SHV시네마, 도호의 시네팩 등 메이저를 비롯하여 제작만 하는 가가, 시네마파라다이스, 일본영상 등 독립제작사들도 시장에 뛰어들었다.비디오의 매력을 새삼 일깨우다

70년대 이후 오랜 침체에 빠져 있던 일본영화계는, 80년대 후반 비디오의 대대적인 보급으로 전기를 마련했다. 극장 개봉과 TV 상영 이외에도 수익을 거둘 수 있는 거대한 시장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일본영화계는 비디오를 염두에 두고 장기적인 투자를 한다든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할 힘이 없었다. 80년대의 일본영화계를 이끌어간 것은 기존 메이저보다는, 오히려 TV방송사다.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다가 89년 일본영화의 제작편수가 줄어들자, 도에이비디오는 비디오 전문영화를 만들기로 결정을 내린다. 도에이의 V시네마 이전에도 개봉을 하지 않고, 바로 비디오로 직행하는 영화들은 있었다. 독립적으로 제작한 자주영화나 소수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청춘물, 공포물, 핑크영화 등등. 하지만 이 영화들은 지독한 저예산이었고, 다분히 아마추어적인 영화들이었다. 도에이는 과거 닛카쓰가 핑크영화와 차별화하기 위해 극영화의 스탭과 기술을 동원하고 세배 이상의 제작비를 투자하여 로망포르노를 만들었던 전략을 따라간다. 비디오 재킷에 ‘영화관과 같은 스케일과 즐거움을 주는’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크라임 헌터>는 60분의 상영시간에도 불구하고, LA의 리틀 도쿄를 배경으로 총격전과 폭파장면 등 소규모 영화에서는 엄두도 못 내던 장면들을 과감히 보여주었다.

89년 3월 <크라임 헌터>로 V시네마의 첫발을 내디딘 도에이는 <저격>과 <크라임 헌터2> 두편의 V시네마를 더 내놓은 뒤 90년 2월 ‘도에이 V시네마 10작품 제작발표’를 한다. <블랙 프린세스> <크라임 헌터/데포다마> <흉악한 문장> 등 10작품을 내놓으며 V시네마의 잠재력을 충분히 깨달은 도에이는 90년 10월 다시 28작품의 제작발표를 한다. V시네마 이전까지, ‘영화는 극장에서 본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비디오는 ‘다시’ 본다거나, 극장에서 보지 못한 영화를 ‘뒤늦게’ 보는 매체였다. 하지만 가정용 비디오카메라의 인기와 함께 V시네마는 비디오의 매력을 새삼 일깨워주었다. 91년에는 TV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데이비드 린치의 <트윈 픽스>와 트렌디드라마 <도쿄 러브스토리>가 비디오로 출시되면서 극장용 영화 이상으로 ‘비디오 붐’을 일으켰다. 이런 상황을 보고 모든 비디오 제작사가 과거의 일본영화를 속속 출시하는 것과 함께, 개봉하지 않은 외화를 찾아 비디오로 출시하는 등 비디오 시장의 열기가 더해졌다.

20, 30대 젊은 남성들이 타깃

도에이가 V시네마를 계속 만들어낸 것은 물론, 엄청난 이익을 남겼기 때문이다. V시네마의 평균 제작비는 5천만엔 이하였다. 요즘에도 1천만엔 이하로 만들어지는 핑크영화 등에 비하면,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이 정도의 제작비를 들이면, 거의 확실하게 이익이 보장되었다. 당시 렌털점에 판매되는 비디오의 물량은 S급이 5만개, A급이 2만∼5만개, B급이 1만∼2만개, C급이 1만개 이하였다. 89년 당시 도에이에서 출시한 V시네마는 매번 3만개 정도씩을 팔았다. 닛카쓰의 1탄 <수도고 트라이얼2>는 3만개, 쇼치쿠의 1호 <여형사 사시바>는 2만3천개 정도였다. V시네마는, 최소한 B급영화 정도의 성적은 올렸던 것이다. 91년에는 21개사에서 150편 정도가 제작되었다. V시네마는 판매용이 없었고, 전체를 비디오 대여점이 구입했다. 대여점 수는 89년이 피크로 1만6천여개였지만, 90년대 중반부터는 8천여개로 줄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V시네마의 인기가 한풀 꺾인 지금도 각 영화의 질에 따라 2만개에서 2천개까지 팔리고 있다. 초기에는 2만개 이상이면 히트작이었지만, 지금은 1만개 정도가 팔리면 성공으로 본다.

예나 지금이나 V시네마를 주로 보는 층은 젊은 남성이다. 20, 30대의 젊은 남성들. 학교나 직장에서 쓸쓸한 집으로 돌아가다가 약간의 즐거움을 얻기 위해 비디오를 빌리는 사람들. 89년 당시 조사에서 V시네마의 관객은 90%가 남성으로 나왔다. 마침 80년대 후반부터 지역의 로컬영화관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역전의 소극장은 점차 비디오 대여점으로 바뀌었고, 영화관의 1/3 가격도 채 안 되는 값싼 비디오 대여료 덕에 사람들은 점차 비디오로 눈을 돌렸다. 게다가 비디오는 혼자 보는 것이다. 나만의 방에서, 나만이 원하는 영화를 보는 것. 내가 어떤 영화를 보든, 타인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할리우드 영화와 어덜트물의 사이를 비집고

80년대 이후 일본영화계는 할리우드 대작과 어덜트물의 전성시대였다. 할리우드 대작이 영화관을 장악했다면, 어덜트물은 비디오업계의 무관의 제왕이었다. V시네마가 파고든 틈은 그 중간지대였다. 할리우드영화가 줄 수 없는 것, 어덜트물이 줄 수 없는 그 무엇. 젊은 남성들이 원하는 폭력과 섹스를 보여주면서도, 기존의 것들과는 다른 것. 제작사들은 액션물(친피라, 야쿠자, 학원, 카액션 등), H물(치한, 학교, 여성액션물 등), 갬블(사기, 마작, 파친코, 금융 등) 이 3가지 장르에 집중했다. 액션물은 도에이, 뮤지엄, 킹, 도쿠마 등의 주력상품이었고 H물은 전통의 닛카쓰, TMC, 레전드가 갬블은 KSS, TAKI 등이 주도했다. <오늘부터 우리는> <암화의 화도> <작귀> <치한일기> <파치프로 낭화양산박> <블랙 잭> <마지!> <만안 미드나이트> 등 수많은 인기 시리즈가 등장했고 그중에서 <카를로스> <극도흑사회 Rainy Dog> <치한일기6> <수라가 간다8> <네오친피라/데포다마> <만안 배드 보이 블루> 등이 걸작으로 꼽힌다. 그리고 V시네마는 끊임없이 만들어져왔다. 언제나 똑같은 장르를 변주하면서, 엇비슷한 스타일로 스타를 등장시키면서.

기본적으로 V시네마는 스스로를 착취하며 성장하고, 또 쇠락해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V시네마는 반복이다. 어떤 배우가 인기를 얻으면 그 배우의 출연작이 쏟아지고, 어떤 소재가 히트를 하면 같은 소재가 연달아 터져나온다. V시네마는 단기간에 저예산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최고속으로 움직인다. 지금 대중의 관심이 무엇인지, 그들이 무엇에 굶주려 있는지를 보는 순간 바로 달려든다. V시네마는 철저하게 상업적이고 그만큼 자유롭다. 스타와 장르라는 두 가지 안전판 사이에서 안전하게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외의 실험은 용인된다. 미이케 다카시가 대표적인 경우다. 그는 장르를 만들고, 스타를 기용하면서도 자신의 의도대로 V시네마를 만들어왔다. 그렇게 거장의 자리에 올랐다. 그런 점에서 ‘상식을 뒤엎을 작품이 없고, 누구도 주어진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는 미이케 다카시의 V시네마 비판은 충분히 경청할 가치가 있고, 그럴 자격이 있다. 그러나 V시네마 초기에는 눈여겨볼 작품이 많았지만, 그런 재기와 활력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다.

벌써 10년, 일본영화 기지개의 발판을 다졌다

V시네마가 시작한 지 이미 10년 넘는 시간이 흘렀고, V시네마는 끊임없이 성장해왔다. V시네마의 거장도 탄생했고, V시네마를 출시하기 전에 극장에서 상영하기도 한다. 제작비도 대작의 경우 1억엔까지(그래봐야 극장용에 비하면 터무니없지만) 올라갔다. 물론 비디오 시장은 이미 천장을 치고, 아래로 내려가는 중이다. 대여보다 판매를 중시하는 DVD가 비디오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그럼에도 연간 제작되는 영화의 절반을 V시네마가 차지하는 현실이 획기적으로 바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미이케 다카시나 구로사와 미쓰루의 말처럼, V시네마와 극장용 영화의 본질적인 차이는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은 쇠락하고, 어떤 혁명도 시간이 흐르면 경직되고 구체제가 되는 법이다. V시네마가 획기적인 도전이던 시기는 이미 지났고, 이제는 단지 소규모의 장르영화를 일컫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일본영화가 기지개를 켜면서, 젊은 인재들이 V시네마보다도 자유로운 방식으로 작업할 수 있는 환경이 조금씩 마련되었다는 것도 한 가지 이유다.

지금 한국에서 V시네마를 본다는 것은 그러나, 또 다른 의미다. 한국영화에서 가장 부족한 것은 어쩌면 장르적인 기반이 아닐까. 끊임없이 만들어지면서 다듬어지고, 완성돼가는 장르영화의 경험이 거의 없다는 것. 그것이 미이케 다카시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V시네마의 과거를 돌아보는 이유다. 익숙한 즐거움과 순간적인 카타르시스를 위한 영화. V시네마라는 이름이 언젠가 사라져도 그런 영화는 영원히 남아 있을 테니까.▶ B급영화광 김봉석, 일본 V시네마 현장을 가다

▶ V시네마 대표 장르들

▶ V시네마가 낳은 거장, <비지터Q><고로시야 이치> 감독 미이케 다카시

▶ V시네마의 ‘현재’, 배우 아이카와 쇼를 만나다

▶ V시네마의 ‘현재’, 구로사와 미쓰루 · 무로가 아쓰시를 만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