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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감독, 관객을 만나다 [4] - 박찬욱 ①
사진 이혜정 정리 위정훈 2002-05-17

불평분자 박찬욱, 엉뚱한 영화에의 입문기를 고백하다

“연출부 100년해도 소용없어요, 좋은 각본을 쓰세요”

(‘젊은 감독, 관객을 만나다’ 4번째는 원래 장진 감독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첫날 예정되었던 박찬욱 감독이 전주영화제에서 올라오는 도중 비를 만나 제시간에 도착하기 힘들게 되어 부득이 장진 감독과 시간을 맞바꾸게 되었다. 약속시간 약 15분 전, 어린 시절 자신을 사로잡았다는 영화 속 ‘스파이’처럼 짙은 색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박찬욱 감독은 ‘바꿔친 감독사건’의 원인제공자로서 사과의 멘트로 ‘나의 인생, 나의 영화’에 대해 입을 열었다.)

장진 감독을 만나러 온 분들에게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월요일에 전주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출발했는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그만…. 다음 작품 때 <씨네21>이 혹평을 해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웃음) 용서해주시리라 믿고,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할게요. 저는 1963년에 태어났어요. 부모 양가가 서울에서만 오랫동안 여러 대에 걸쳐 살아온 보기드문 서울 토박이인데, 그런 출생의 발견이 어려서는 콤플렉스 비슷한 것이었어요. 대개 위대한 예술가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시골 사람이(웃음) 많잖아요. 서울 토박이는 깍쟁이, 예술가보다는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어울릴 것 같구요. 어렸을 때 영화를 좋아하긴 했어요. 부모님이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셨구요. 어머니도 영화를 좋아하셔서 당시 <동아일보>가 석간이었는데 저한테 주말영화 프로그램을 읽으라고 시키곤 하셨어요. 예를 들어 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주연 누구 하면서 읽으면 “아, 그 영화! 봐야지” 하곤 하셨죠.

저는 보통 우리 세대 동료 영화광들과는 취향이 달랐던 것 같아요. 제임스 본드의 영향이 컸고, 첩보, 스파이 영화에 소년다운 호기심을 가졌죠. 고교 때 영화라는 매체에 매력을 느껴 감독이 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영화판은 터프한 곳, 나약한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영화과는 지레 겁먹고 포기했죠. 왜 그렇게 겁이 많았나 몰라. (웃음) 예술에 가까운 다른 길을 해볼 수 없을까 생각해봤고 글재주는 좀 인정받았는데 가난하게 살아야 한대서…. (웃음)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작가는 되지 못해도 미술비평을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미술비평과가 없어서 철학의 한 분과로 미학과를 가려다 주위의 조언으로 철학과를 가게 됐어요. 그런데 집안이 대대로 오래된 가톨릭 집안이라 서울대 아니면 서강대를 가야 하는 분위기야. 서울대는 못 갔고, 서강대를 갔는데 거기 철학과는 당시에는 미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곳이었어요. 중세 교부철학에서의 미학, 할아버지 신부님의 토마스 아퀴나스 강의(웃음) 이런 것만 듣고 있으려니 못하겠더라구요.

백수 생활, 날품팔이 생활, 그리고 데뷔작

일찌감치 포기하고 동아리 활동에 취미를 붙였는데 영화와 그나마 비슷한 사진반에 들어갔어요. 서강대는 영화와 관련된 책들이 비교적 많은 학교였는데 그런 책들 뒤에 대여카드에 이름이 씌어 있잖아요. 근데 서강대는 작은 학교니까 빌려간 사람이 뻔하거든. 하나둘씩 만나기 시작했죠. 83년쯤에는 전국에 영화를 진지하게 공부하겠단 사람들이 많았어요. 정성일, 김소영, 그런 사람들 만나고 체계적으로 영화를 공부하면서 점점 깊숙이 수렁에 빠져들게 됐죠. 졸업할 때쯤 되니 막막했는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익히라고 충고해주더라구요.

이장호 감독님의 회사에 연출부 막내로 들어가 유영식 감독의 <깜동>을 했어요. 이장호 감독님은 엄청 다혈질이라 이런저런 고생을 했는데, 당시 연출부 세컨드하던 곽재용 감독이 “제작사 차릴 테니 조감독 해라” 해서 고속승진했죠. 같이 각본을 써서 <비오는 날의 수채화>라는 영화를 만들었어요. 근데, 곽재용 감독님은 또 이장호 감독님 저리 가라 할 만큼 다혈질이라서 좀 힘들었어요. 그래서 나왔는데, 그땐 이미 결혼도 한 상태라 살길이 막연하고…. 이렇게 끝낼 순 없으니 시나리오라도 한편 써보자 해서 처음으로 장편 시나리오를 혼자 썼어요. 그런데 써놓고보니 이런 재능을 충무로에서 나오게 하는 건 너무나 큰 피해다 싶어(웃음) 마음을 추스르고 작은 영화사에 취직했죠. 싼 외화 사다가 자막번역도 하고, 보도자료도 쓰고. 보따리장사 같은 것을 한 거죠. 그때 그 영화사에서는 영화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작비만 모이면 데뷔시켜주겠다는 약속이 있었어요. 고맙게도 제작자가 약속을 지켜주더라구요. 1억원이 조금 넘는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때는 데뷔만 할 수 있으면 뭐든 하겠다는 생각이었으니까 찍었죠.

당시엔 저예산영화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고, 흥행은 해야 하니까 아주 토속적인 스토리에 형식은 이렇게 하면서 아주 현학적인 태도로 <달은 해가 꾸는 꿈>을 찍었어요. 주연배우는 영화사에서 이승철을 시키라고 해요. 당시 마약파동 때문에 인기는 있는데 TV 출연 못하니까 이럴 때 영화 만들면 얼마나 좋겠나(웃음) 이승철 아니면 안 찍겠다 하는 거예요. 선배 감독을 만나 고민을 털어놓으니까 데뷔 여부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니 무조건 하라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이승철이 너무 바쁜 사람이라 도무지 만나주질 않는 거야. 촬영 전날 처음 만났어요. (웃음) 첫 마디가 “감독님, 줄거리가 뭐예요?” (웃음) 어쨌든 데뷔작은 실패하고, 그뒤로 오랜 백수 생활을 했죠. 글쓰고, 방송 출연하고 하는 날품팔이 생활. 그무렵에 이훈이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일찍 죽어서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정말 싸구려 B급영화를 두편 만든 사람인데, 그 사람을 소개받아 미국서 사온 영화를 보면서 영화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살아 움직이고, 거칠고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영화의 세계를 안 거죠. 정말 나한테는 큰 영향을 준 친구예요. 이런 친구들의 영향이 <달은…>과 <삼인조> 사이에 있어요. 어쨌든 <삼인조>도 흥행이 안 됐고…. 내 영화로 만들고 싶은 아이디어는 너무나 많은데 계속 남의 영화만 갖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못 견디겠더라고. 그래서 돈을 구해서 단편영화 <심판>을 하다가 명필름에서 <공동경비구역 JSA> 기획을 의뢰받아서 일을 시작했어요. 이 정도까지만 하고 질문을 듣죠.

모호함이 남아있는 영화가 좋다

-잡지에서 읽었는데, <공동경비구역 JSA>를 퀴어영화로 갈까 했다는데….

=남북한 병사의 우정은 약하다. 저 정도 가지고 감동이 올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우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웃음) 어차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휴머니즘을 억압하는 체제와의 싸움을 다룬 영화니까 병사들의 사랑과 그걸 용납 못하는 군대가 겹쳐지면 주제가 더 강해지지 않을까 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죠. (웃음) 아니, 대꾸를 안 하더라구요. 침묵이 잠시 흐르더니 그 애기를 아예 못들은 척하는 거야. 다시 이야기했더니 “농담이시죠?” 이래서 그냥 싸움이 끝나버렸지. 결과적으로 그렇게 안 한 것은 잘한 것이라 생각해요.

-영화감독이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감독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관객이 이해 못할 때가 있잖아요. 관객과의 의사소통을 못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복수는 나의 것>이나 <공동경비구역 JSA>를 관객이 감독님이 원하는 만큼 이해했다고 생각하시나요.

=관객은 여러 사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니까 관객에 따라 다른 거죠. 하나의 해석만을 바라면서 만드는 건 아니고, 다양한 해석이 있을수록 재밌죠. <공동경비구역 JSA>는 비교적 비슷하게 받아들인 영화였다면 <복수는 나의 것>은 정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더라구요. 그런데 다른 건 다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도덕적 비난은 받아들이기 힘들더라구요. 너 감독 아니지라든지, 인명을 경시한다라든지. 또 명확한 정치적 노선을 갖고 만든 영화는 아닌데, 이건 스탈린주의라고. (웃음) 어떤 분은 이 영화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는 그냥 웃자고 한 말이다 전혀 진지한 게 아니라는 분도 있는데, 다 좋아요. 나름대로의 독법이 있는 것이고. 하여간 정말 훌륭한 영화는 한줄로 꿰어지지 않고 뭔가 모호함이 남아 있는 어떤 것이 있어야 재밌다고 생각합니다.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질문드리겠는데요. 호두 이론이라고, 하드고어는 껍데기가 딱딱해 깨물면 이가 빠져 진짜 맛있는 알맹이는 먹을 수 없는 호두와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복수는 나의 것>이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감독님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 딱딱한 껍데기 때문에 관객이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생각해요. 그것에 대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정도로 하드고어라고 할 수 있나? (웃음) 너무 잔인한 폭력묘사라든가 이런 데 눈을 뺏겨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는 말이죠? 그건 이 경우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는 토마토예요. 껍질도 먹고, 알맹이도 먹고. (웃음) 그러니까 폭력묘사도 내가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한 이 영화의 핵심이고. 그 안에 그것말고 다른 뭔가 맛있는게 있지는 않았다는 거죠.

단편 <심판>도 그렇고, <복수는 나의 것>도 그렇고 굉장히 종교적 냄새가 나는데, 아까 가톨릭 집안이라고 하셨는데 처음부터 그런 해석이 들어갔는지 궁금하구요. 또 <복수는 나의 것> 마지막 장면이 상당히 실망스러웠는데, 송강호가 죽는데 배두나씨 조직이 와서 죽이잖아요. 그전까지 배두나 혼자 생각인 줄 알았는데 정말 조직이 와서 죽이는 것이 껄끄러웠고, 또 조직에서 가슴에 꽂은 죄명을 송강호가 보잖아요. 그것이 약간 촌스럽게 느껴졌거든요. 그런 점에서 감독님의 죽음에 대한 철학을 좀 밝혀주세요.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것이 분명히 영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죄와 구원의 문제를 눈에 선한 이미지로 제시하는 것도 그렇고, 인간의 원죄나 수많은 성인들의 순교사 같은 것들이 영화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어요. 제 영화에서는 항상 죄와 구원의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 같아요. <복수는 나의 것>의 끝은 보기 나름인 것 같아요. 저는 그 장면이 촌스러움의 반대라고 생각하는데, 극단끼리 만난다더니 그렇게 보는 분도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송강호가 판결문을 보는 부분은, 나라면 죽기 전에 자기를 살해한 사람이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알고나 죽자는 하는 마음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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