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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의 원숙현
2002-05-24

“난 인어공주, 엽기의 희생양이랍니다”

한 여자가 비디오를 비디오데크에 밀어 넣은 뒤 거실 소파에 비스듬히 눕는다. 곧 모니터 화면에는 <인어공주> 동화의 영상이 흘러나온다. 영화 속 영화인 <인어공주>에서 주인공 인어공주는 인간이 되기 위해 문어에게 몸을 바치고 그물에 걸려들어 쥐에게 하체를 갉아먹혀 사람의 다리를 얻는다. 인어공주가 문어에게 강간당하기 직전, 비디오 보던 여자는 잠시 비디오를 스톱시키고 욕조에 물을 받고 들어간다. 검은 옷을 입은 누군가의 팔이 그녀를 물 속으로 밀어넣자 곧 인어공주가 강간당하는 비디오의 화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이웃나라 공주와 왕자가 결혼을 할 때, 어느새 비디오를 보는 건 여자가 아니라 인어공주 인형이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는 모호하다. 점점 남성화되어가다 결국 남성의 성기를 달게 된 여자는 영화의 끝에 인어공주 인형을 불태워 죽이고 그 불로 담뱃불을 붙인다. 해피엔드를 보여주지 못한 인어공주를 없앤 뒤, 여자는 다시 처음처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을 안고 분홍색 인형상자 안에 들어가 웅크린다.

♧ 안데르센

“다른 동화 속 공주들은 다 행복하게 사는데, 인어공주만은 그렇지 않은 게 너무 불쌍했어요. 왜일까, 왜일까, 끊임없이 생각했어요.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왜 불행해지는지, 영화를 찍고 난 지금도 다는 이해할 수 없어요. 여전히 갈증을 느껴요.”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의 ‘원작’인 <인어공주>는 원숙현(24)씨가 어릴 때부터 가장 좋아한 동화다. “완벽한 여인의 모델”인 인어공주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이야기는 정말이지 “이상했다”고 그는 돌이킨다. 스물넷이 되어 오랫동안 품은 그 이야기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기 위해, 그는 동대문에서 바비인형을 산 뒤 그 하체에 수산시장에서 산 은빛 생선의 껍데기를 꿰매 인어공주를 만들었다. 학교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충전기 없는 디지털카메라를 빌려 독점했고(왕자와 이웃 나라 공주가 만나는 장면을 동해에서 찍은 걸 제외하면 이 영화의 배경은 모두 그의 집 안이다), 예전에 외국여행중 사놓은 발목까지 오는 긴 가발도 꺼냈다. 바비인형과 생선껍데기의 결합체인, 이상하지만 여전히 예쁜 인어공주를 가지고, 원숙현은 동화의 기본골격은 따르되 세부적인 사건들과 정조는 사뭇 다른 그만의 인어공주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거기서 인어공주는 문어에게 강간당하고 쥐에게 갉아먹히고 자신을 조종해온 ‘분라꾸 여인’에게 불태워 죽임을 당한다.

♧ 미인

처음에 원숙현씨를 보았을 때 ‘미스코리아풍’으로 생겼다는 생각을 했는데, 아니나다를까 미인대회 출전 경험이 있었다. 그는 지금 졸업반인 단대 연극영화과에 들어오기 전 가톨릭대 철학과 1학년일 때 ‘미스 유니버시티 선발대회’에 나갔고 ‘미스 월드 평화’로 뽑혔다고 한다. 미국의 선케어 브랜드의 동양권 모델인 ‘미스 하와이언 트로픽’이 되어 칸영화제에서 시가행진도 했다고. “창피했지만 재미도 있었어요. 합숙을 하는데 제 스스로 몰라보게 몸이 변하는 거예요. 이상하죠. 꼭 남자들이 원하는 모양대로 몸이 진화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이런 ‘미인’이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건 조금은 아이러니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이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이냐고 묻자, 그는 말했다.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자체가 어느 정도는 비판적인 생각을 담아내는 거겠죠. 하지만 저는 그런 여자의 심리상태를 그냥 묘사하고자 했어요. 바비인형 같은 외모는 남성들이 원하는 것이지만, 저 자신이 그런 외모에 대한 갈증이 많이 있거든요.”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에 원숙현 자신의 존재는 ‘<인어공주> 비디오를 보며 자신과 인어공주를 동일시하는 소녀’와 ‘인어공주 인형을 조종하는 분라꾸 여인’에 분열적으로 투사돼 있다. ‘분라꾸’는 일본의 고전연극.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얼굴도 검은 천으로 가린 인형사가 인형을 조종한다. 이 작품에서 인형인 인어공주를 움직이는 동력이 바로 여자를 조종하는 남자를 상징하는, 검은 옷을 입은 분라꾸 인형사다. 원숙현은 동화의 화사한 오리지널 스토리에도, 그 이면의 추한 어두움에도 모두 흠뻑 젖어 있는 듯, 여성으로서 스스로의 이중적이고 복합적인 태도를 분라꾸 기법과 시종일관 미소짓는 바비인형을 통해 이 영화에 담았다. 마지막에 분라꾸 인형사가 인어공주를 불태우는 건, 그래서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도, 혹은 그것에 대한 집착으로도 읽힌다.

♧ 신디 셔먼

“혼자서 제작, 연기, 촬영, 조명, 편집을 다 할 수 있는 영화를 찍고 싶었어요. 신디 셔먼처럼. 처음엔 인어공주도 인형으로 안 하고 제가 직접 연기를 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촬영을 할 수 없어 인형을 썼어요.”

분라꾸 인형사에 동생들, 미술에 조각가인 어머니, 연기에 아는 언니, 촬영과 편집을 친구가 도운 것을 제외하면 원숙현은 소망대로 거의 모든 것을 혼자서 해냈다. 외모에 있어 그녀의 모델이 인어공주라면, 작품 활동에 있어 그녀의 모델은 신디 셔먼이다. 신디 셔먼은 70년대 후반부터 활동한 사진작가로, 자신의 모습을 사진으로 많이 찍었다. 청순한 여자, 창녀, 주부, 남자, 커리어우먼, 소설 속의 주인공 등으로 스스로를 변장시켜 사진을 찍었고, 후기에 컬러로 작업을 하면서는 인형을 소재로 이용하기도 했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은 원숙현이 처음으로 만든 영화다. 단국대 연극영화과에 연기 전공으로 입학한 그는 졸업작품인 이 작품 전에는 친구들의 영화에 연기자로만 참여했다. 그녀가 맡은 캐릭터는 “술집 아가씨 같은 이미지나 남자친구 바람맞히는 독한 여자, 귀신 혹은 시체” 같은 평범치 않은 것이었다고. 신디 셔먼에게 많은 영향을 받아 만들었다는 첫 영화에서 그는 처음으로 카메라 앞이 아닌 뒤에 섰고 인형에게 자신을 대체하는 연기를 시켰다. 처음 해보는 연출이 연기보다 훨씬 재미있었다고.

원숙현의 앞으로의 계획은 미디어 아티스트가 되는 것이다. 확정되지는 않았지만 시카고 미술대에서 실험영화를 공부할 생각이란다.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도 유학을 위한 포트폴리오용으로 찍었다고.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미술을 계속했던 그는 상업영화적인 카테고리 안의 영화작업보다는 미술에 가까운 미디어 아트를 하는, 실험영화 작가가 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그의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은 지금 실험영화를 향해 있다. 글 최수임 sooeem@hani.co.kr 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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