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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변증법>의 김곡, 김선 감독
2002-05-24

나는 사유한다, 고로 영화를 만든다

한여름의 어느 날. 화가인 효식은 테이블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서 ‘똑같이’ 그리는 데 몰두해 있다. 생계를 위해 시작한 뮤직비디오 편집 일은 뒷전이다. 마감을 독촉하는 실장의 전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사과를 그리고, 또 그린다. 케이블방송국에서 VJ로 일하는 미나와 통화할 때만 이젤 앞에서 자리를 뜬다. 그런 효식을, 후배 경숙은 짝사랑한다. 비디오대여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그녀는 자신을 쫓아다니는 남자를 뿌리치고서 매일 효식의 화실을 찾지만 효식은 그녀를 귀찮아한다.

고차방정식

김곡, 김선(24)씨가 올해 인디포럼에 내놓은 <반변증법>과 <시간의식>은 실험영화에 가깝다. 내러티브를 갖추고는 있지만, 여러 번 짜깁기해야 이해가 가능할 정도로 복잡하다. 연출을 맡은 이들은 사실 “내러티브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등장인물들의 관계를 간략하게 정리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는 것. 가벼운 크로키 정도로 봐달라는 것이다. 이들의 관심은 “철학사가 제기한 화두를 영상으로 풀어내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기존의 영화형식의 룰을 어겨가면서. “영화는 사진과 문학의 사생아일 수 없다”는 확고한 원칙을 갖고 있는 김곡씨는 김선, 김동명씨와 함께 만든 유령단체 ‘곡사’를 비타협적 영화집단이라 소개한다. 이들의 영화를 보지 않은 지금, 벌써부터 졸립지 않은가. 그런데도 이들은 딱 잘라 말한다. “그래도 우린 일차방정식 같은 단순한 영화에는 관심없다”고 말이다.

눈(目)

이들의 첫 번째 극영화 <반변증법>을 보면, 낯선 실험이 야기하는 두통을 체감할 수 있다. “인간의 코드화된 시선과 인식에 대한 증오를 담고 싶었다”는 <반변증법>은 첫 장면부터 점프컷을 난사하고, 인물들의 행위순서를 무시한다. 장 뤽 고다르에 대한 오마주라는 붐 마이크의 등장은 그나마 애교 수준이다. 행위의 동기는 드러나지 않으며, 내러티브는 난자당한다. 대신 이들은 반복해서 “모든 사물은 눈을 갖고 있다”는 황당한(?) 계율을 설파한다. 사과를 그리는 주인공조차, 예외는 아니다. 그는 어느 순간 보잘것없는 객체로 돌변한다. 사과의 ‘눈’에 비친 주인공의 재현 욕구는, 충족불가능하고 경박하고 우스꽝스러운 시도의 반복일 뿐이다. ‘거대한 주체의 시선이 등장하면서 사물의 죽음을 불러왔다’는 후기 현대철학의 문제제기를 수혈한 이 영화는 다소 장황하고 도식적인 구석이 없지 않지만, 기존의 영화문법을 거스르며, 끊임없이 되씹는다는 점에서 근래 보기드문 시도다.

일란성

카메라를 함께 든 김곡, 김선씨는 부지런한 수행승의 외모를 갖춘 쌍둥이 형제다. 78년 인천 출생. 3분 차이로 생의 순간을 각기 맞이한 이들은 실제로는 “영화 찍을 때가 아니면 얼굴 보기도 힘들다”고 말하지만, 지금까지의 궤적은 외형만큼이나 꼭 닮았다. 5년 전 공대생이었다 나란히 인문학으로 ‘전향’했던 것이나, 더 거슬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중학교 때부터 데이비드 린치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을 양팔로 추켜세우며 열광했던 것이나, 쌍둥이는 “서로를 자극하는” 더없는 ‘공생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러다보니, 처음 대면하면 꼭 머리 둘에, 몸은 하나인 괴물과 마주친 듯하다. 질문 하나를 던져놓기가 무섭게 다퉈댄다. 제지하지 않으면, 둘만의 문답은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대답을 받아먹으려는 이는 평소보다 인내심을 두배로 발휘해야 할 정도다. 일란성 쌍둥이의 습관성 입씨름은 지난 여름 첫 번째 극영화 <반변증법>을 같이 찍으면서부터 증상이 부쩍 심해졌다. “사실 혼자 쓴 게 아니에요” 철학을 전공하는 김곡씨가 <반변증법>의 각본을 썼지만, 그는 촬영에 돌입해서도 매번 항로를 놓고서 머릴 맞댔고 이빨을 풀어댔으니 둘이 함께 만든 것이라고 강조한다.

실험

김선씨가 각본을 쓴 두 번째 작품 <시간의식>은 전작보다 명료하다. “아무래도 첫 작품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끼워넣으려고 했던 것 같다”는 김선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김곡씨 또한 “두편을 본 사람들에게 굳이 일러주지 않아도 다들 <시간의식>이 나중에 만든 영화라는 걸 안다”며 웃는다. <시간의식>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몸 파는 아내로부터 멸시받는 처지인 절름발이 중년 시인지망생은 결국, 자신의 아내를 목졸라 살해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자신이 그녀를 어쩌다 죽인 것인지, 아니 정말 죽이기나 한 것인지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기억의 재생을 거듭하던 시인은 심지어 그녀가 비닐봉지를 뒤집어쓰고 자살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미친다. 훗설의 동일제목 저서를 텍스트로 삼은 이 영화는 후반부에 가서는 내러티브가 가능하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논리적 구획을 무너뜨린다. 울부짖는 시인과 아내의 시체를 여행가방에 담는 시인과 창문을 슬쩍 내다보는 시인이 한 장면에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이 대표적. “우리가 현재라고 말하는 그 순간은 이미 과거 아닌가?”라고 되묻고 싶었다는 김곡, 김선씨는 차기 프로젝트는 “여성은 항상 결핍된, 불완전한 존재인가?”라는 질문으로 시작할 예정. “마음이 맞는 한 함께 갈 것”이라는 이들은 색다른 또 하나의 실험이 어떠냐고 묻고선 덧붙였다. “혹시, 투자하실 의향이?” 글 이영진·사진 정진환

▶ 인디포럼에서 만난 독립영화 감독 3인의 세상보기, 영화 만들기

▶ <반변증법>의 김곡, 김선 감독

▶ <아름다움에 대한 갈증>의 원숙현

▶ <삼천포 가는 길>의 윤성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