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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에서 김득구로 돌아온 유오성
사진 이혜정김현정 2002-06-19

순수한 고집, 그 지고(至高)한 열정

유오성은 동양챔피언이 된 김득구 선수가 몇년 전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 연설하는 장면에서 유일하게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느꼈다. 그는 당황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고 오버하는 김득구가 순박하고 순수한 사람일 뿐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지금 그의 소망은 관객 역시 김득구를 순수한 한 남자로 바라봤으면 하는 것.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에, 당신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약속조차 할 수 없었던 남자를 위한 소망이다.

유오성은 <챔피언>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촬영은 이미 5월에 마쳤지만, 그는 여전히 일주일에 두번 체육관에 가서 권투하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챔피언>이 개봉하는 날까지 나는 연습을 계속할 것”이라는 약속은 쉬는 틈틈이 예전 기사를 들춰볼 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유오성은 죽은 사람을 욕되게 할 수 없다는 스스로를 향한 다짐과 처음으로 돌아간 듯 불안한 기분 속에서 혼신을 다한 <챔피언>의 결과를 아직 보지 못한 것뿐이다. “나같이 단순한 놈”이라는 말을 살짝 흘리며, “여름에 하는 운동은 몸 만드는 덴 하나도 도움 안 되고 살만 빠져요”라고 말하는, 마른 얼굴의 유오성. 그는 보충 촬영이 있는지 확인도 해보기 전에 단발 비슷한 머리를 짧게 깎아버리고선 무서워진 나머지 낮술을 마셨던 소박한 배우다. “뻐꾸기 날린다”고 표현하는 그와의 인터뷰도, 그처럼 소박하고 명쾌했다.

사진 찍는 것을 무척 싫어하기 때문에, 인터뷰를 최대한 길게 끌어 사진 촬영 시간을 줄이기로 작정한 유오성은 초반부터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 “곽경택 감독이라는 인간 자체를 믿어서” 채 시나리오도 나오지 않은 <챔피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는 영화보다 사람을 앞에 두고 사는 것 같다. 체육관에 머물며 열번 넘는 경기장면을 찍던 기간, 억대의 주연배우 유오성은 옥상에 올라가 조·단역배우들이 대기하고 있는 천막에 기어들었다.

“영화 찍을 때는 사람 사이의 신뢰가 무엇보다 중요해요. 나는 기분이 좋은데, 상대배우가 심란하면 영화가 제대로 나올 수 없죠. 내가 연기는 잘 몰라도 사람 기분은 알거든요. 영화 찍는 순간만이라도 사람을 챙길 수는 있어요.” 아마도 그처럼 계산없이 다져진 믿음 때문일 것이다. 감독 몰래 라면 끓여 먹으며 어울렸기 때문에, “<챔피언>의 권투장면을 보니까 얼굴은 난데, 몸짓은, 딱 트레이닝을 해준 그 친군거예요”라며 자신있게 웃을 수 있을 것이다.

오른손잡이 유오성이 왼손잡이 복서였던 김득구의 동작을 완벽하게 익힐 수 있었던 데는 그 자신의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아침에 일어나서 체육관으로 출근, 다섯 시간 연습한 뒤 지쳐 떨어지기를 몇달. 그러다보니 1월1일에도 별 생각없이 체육관에 나가 복싱을 할 정도로 군대 같은 생활이 몸에 배버렸다. <챔피언> 포스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굵은 근육과 함께 영화 홍보용으로 딱 좋은 소재지만, 유오성은 때려치우고 싶었던 순간을 신경써서 감추지 않았다. “지난해 2월에 훈련 시작해서 7월이 됐는데, 여름엔 힘들잖아요. 남들은 대박 터뜨리면 잘만 사는데, 나는 뭐 과시한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날 괴롭히나, 푸념이 나오더라구요. (웃음) 그래도 김득구 선수는 죽었으니까, 나는 살아 있으니까. 그러면서 버텼어요.” 불행하게도 독하게 훈련한 몇달 뒤 처음 권투 경기장면을 촬영하다가 유오성은 팔목 인대가 늘어나는 사고를 당했다. 연습한 만큼의 결과가 거짓없이 드러날 거라는 생각에 지나치게 흥분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무조건 일주일 안에 이 장면 다 찍어야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부상을 돌아볼 틈이 없었다고 한다. “현장에 나가면 감독이 최고라고 믿어야 해요. 고민은 집에서 혼자 하는 거지.”

유오성이 내뱉는 대답을 들을 때 못지않게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 때는 그가 웃는 순간이었다. 냉철하면서도 문득 온기를 내비치는 <친구>와도, 무식하게 내지르는 <주유소 습격사건>과도, 순진한 비애를 품은 <간첩 리철진>과도 다른 무엇. 꼬마 같은 느낌이라면 맞지 않을까 싶은 웃음이다. 어린 유오성은 교수와 검사로 자라난 형제들이 맞은 매를 다 합쳐도 못 따라올 만큼 많이 맞았던 말썽쟁이였고, 아버지가 된 유오성은 특수분장으로 부어 오른 눈동자를 하고선 정말 맞은 척 곽경택 감독을 미안하게 만드는 천진한 어른이다. 그는 또 김득구 선수가 촬영현장 곁에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한다. 현장 하늘 위를 맴돌던 독수리 한 마리가 그의 혼이 아닐까 한다며 눈동자가 순간 깊어진다.

물론 그는 약한 남자가 아니다. 그는 축구를 한번 할 때마다 4, 5게임은 뛴다. 세 번째 게임까지는 한골도 못 넣는 경우가 많지만, 다른 선수들이 헐떡이는 네 번째 게임부터는 혼자 에너지를 자랑하며 골을 넣기 시작한다. 그런 유오성이 요즘은 사회부적응자처럼 멍해졌다. 아직 <챔피언>이 개봉하지 않아서,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득구 최후의 경기를 찍은 LA 현장에서 그의 외로움은 극에 달했다. “외국인 엑스트라들이 몰려 있으니까 실제 김득구 선수는 정말 외로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그가 부여잡을 거라곤 링뿐이었을 거고. 그렇게 생각하니까 다 성가시고 싫더라고. 내가 정말 혼자라는 느낌이었어요.”

무모한 원정 경기, 14라운드를 버티고서야 뇌사상태로 링에서 내려왔던 김득구. 유오성은 그의 도전과 사랑을 담은 <챔피언>을 아직은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다. 영화의 80%를 차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뭐라 말할 수 없어, 곽경택 감독은 그가 영화에 실망한 줄 알고선 혼자 고민에 빠지기도 했을 정도다. 그러나 유오성은 소문에 휩쓸리지 않고, 정말 보고 싶은 관객만 봐줬으면 좋겠다고 할 만큼 <챔피언>을 아낀다. 그는 동양챔피언이 된 김득구 선수가 몇년 전 도망치듯 떠나온 고향으로 돌아가 연설하는 장면에서 유일하게 치밀어 오르는 눈물을 느꼈다. 그는 당황해서 세계 챔피언이 되겠다고 오버하는 김득구가 순박하고 순수한 사람일 뿐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지금 그의 소망은 관객 역시 김득구를 순수한 한 남자로 바라봤으면 하는 것. 이미 죽어버렸기 때문에, 당신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약속조차 할 수 없었던 남자를 위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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