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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사수‥>로 영화 데뷔하는 드라마 <피아노>의 PD 오종록
2003-01-15

˝드라마의 힘으로 승부하겠다˝

3, 4년 전쯤 ‘충무로로 간 PD 출신 감독들이 왜 성공하지 못하나’에 대한 기사를 쓴 적이 있다. 기사가 나가고 몇주 뒤였던가, 새 미니시리즈를 준비하는 오종록 PD와 통화를 하는데 대뜸 그가 이런 말을 했다. “PD들이 와(왜) 영화를 찍고 싶어하는지, 와 성공하지 몬하는지 그거말고도 다른 이유를 제가 조만간 보여드릴낍니다.” 그의 ‘조만간’은 조금 길어져 ‘몇년’이 되긴 했지만 결국 오종록 감독은 2003년의 시작과 함께 차태현, 유동근, 손예진 주연의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라는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작품으로 영화감독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첫사랑을 향한 한 남자의 눈물의 순애보를 경쾌한 코미디 리듬 속에 실어내는 영화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의 크랭크인을 앞둔 그를 일산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최근작인 <피아노>가 큰 성공을 거두었고 프리랜서 드라마 PD로도 안정된 생활이 가능한 상황인데 굳이 영화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드라마적인 한계를 느낀 것인가.

→ 가장 큰 이유는 TV 드라마 제작환경이 너무나 열악하다는 거다. 영화로 간 배우들이 다시 드라마로 잘 안 돌아오는 걸 보면 알 수 있는 일 아닌가. 미니시리즈의 경우 1년에 8개월은 대본준비네 기획입네 하고 빈둥빈둥 놀 수밖에 없는 일이고 결국 보통 사람 1년에 하는 노동을 4개월에 다 하는 셈이다. 두달 방송 나가는 동안, 한달 반 전에 촬영나가고 방송 중에도 촬영은 계속 하니까 사실상 석달 반을 일하는데, 105일동안 최고로 촬영을 많이 해본 게 98일이고, 최고 적었던 게 88일이었다. 결국 평균 90일 촬영을 하는데, 15일은 타이틀 만들고 편집하고 꼬박 일을 해야 한다. 일년 중 200일을 놀고 100일 일하는 동안은 부모제사도 못 가고 명절도 다 생략하고 하루 19시간을 촬영했다. 담배만 무지하게 피우고 잠을 못 자면 온몸에 마비증세가 온다. 계단에 발끝이 살짝살짝 걸릴 만큼 감각이 이상해지고 걸음이 비틀비틀해진다. 그 지점에서 방송사 PD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두 가지다. 데스크로 가든지 연출의 욕심을 버리고 연속극으로 가는 거다. 나는 둘 중 어떤 선택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전공을 바꾸는 수밖에.

영화라는 장르에 대한 욕심도 작용한 건가.

→ 솔직히, 영화를 많이 본 적도 없고 영화가 드라마보다 우등한 장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영화에 환장했달지 그런 것도 아니다. 물론 예술적인 영화를 하시는 분들도 많고 그분들의 작품은 그 자체로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내가 하는 이 정도 영화를 가지고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20% 이상의 시청률을 올린 TV드라마와 몇백만 관객이 든 영화의 사회적 영향력도 같지가 않은 거고, 또 영화감독 연출료가 1억원이라면 2년에 한편 찍으면 연봉 5천만원인데 그런 식으로 치자면 방송사 PD가 더 낫다.

그렇다면 왜 이 배고픈 세계로 뛰어든 건가.

→ 아직 MBC 드라마 계약이 2편 남아 있다. (웃음) 계속 영화감독만 하겠다고 선을 그은 적은 없다. 다만 이런 생각은 하고 있다. 사실 영화계 내지는 영화판이란 것이 있다면 내가 잘 나가는 잔치판에 달랑 숟가락 하나 들고 파먹겠다고 들어간 형국이 아닌가. 그동안 한국 영화판을 떠짊어지고 온 사람들 눈에는 저 새끼가 뭐 얻어먹으러고 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을 거다. 부인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우리나라 영화판이 이 정도로 발전해오는데 뭐 하나 도와준 게 없지 않나.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 밥값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첫 번째로 충무로 안에서 현실과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로 토착화된 관습적 서사구조, 관습적 캐릭터가 있다는 거다. 반면 TV드라마는 회전구조가 빠르고 현실감, 그걸 놓치면 끝이다. 오늘 만들어서 내일 방송 나가는 것과 오늘 찍어서 6개월 뒤에 보여주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다. 결국 현실과 빠르게 반응하면서 돌아가는 그런 감각을 충무로에 불러오는 것으로 내가 한 부분 밥값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있는 거다. 두 번째는 이런 거다. 예상 가능한 대한민국 최대 관객이 500만명이라고 볼 때, 물론 이번엔 처음이라 30억원 정도 드는 영화로 시작했지만, 다음에 내가 중심에서 영화를 찍는다면 손익분기점 100만명 정도의 영화만을 만들 거다. 손익분기점을 100만명을 잡고 200만 정도의 관객이 든다면 감독, 제작자, 투자자, 배우들까지 아무도 불행할 이유가 없다. 대박을 꿈꾸며 영화를 찍을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20억원이 넘어가지 않으면서도 영화가 볼 만하려면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드라마 트루기’라는 거다. 특수효과도, 스펙터클, CG도 아니라는 거다. 결국 나란 사람은 16, 17년을 드라마 트루기만 만들려고 노력해온 사람인데 그런 면에서 역시 나름의 밥값을 하지 않겠는가.

드라마 시청자와 영화 관객이 다를 거라는 걱정은 없나.

→ 분명 다르지. 드라마는 옛날에 남도 같은 데서 부잣집에 초청되어 놀아주는 판소리꾼 같은 거다. 술 먹여주고 밥도 주고 노잣돈도 쥐어주면서 남의 집 안방에서 놀아주는 사람. 그러니까 눈살 찌푸리는 짓을 절대 하면 안 돼, 하지만 영화는 다른 거다. 영화는 우리집에 걸판지게 상을 차려놓았으니 여러분 오셔서 드셔보세요, 하는 거라고, 그러려면 뭔가 특별한 메뉴가, 뭔가 새로운 먹을거리가 있어야 된다.

동성애라는 파격적인 소재와 다양한 영상실험을 보여주었던 <재즈> 이후 <내 마음을 뺏어봐> <해피 투게더> <줄리엣의 남자>, 조재현 신드롬을 일으켰던 <피아노>까지 도발적이고 용감한 소재를 선택해왔던 그간의 ‘오종록 드라마’와 비교해 보았을 때 <첫사랑…>은 다소 안전한 시나리오라는 느낌이 든다.

→ 그런 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영화에서 오종록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시키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있을 거다. 그렇다고 미심쩍어하지 말라고 무턱대고 주장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웃음) 영화는 4, 5년 전부터 준비해왔다. 원래 F2층(20대 여성 관객)에서 F3층(30대 초반 40대 중반)을 모두 대상으로 한 멜로시나리오를 썼었는데 메인 타깃군이 아니라 꺼려하더라. 마음에 드는 시나리오였는데 나중에 잘되면 해보려고 한다. <첫사랑…> 준비한 건 지난해 5월부터다. 어떻게 보면 소프트랜딩을 위한 선택일 수도 있을 거다. 처음엔 코미디로 끝나는 코미디를 썼는데 트리트먼트 과정에서 감동이 있는 코미디로 조금 수정되었다. 5월 초에 절에 들어가 열흘 만에 초고를 썼다. 각색하는 과정이 각색작가 4명이 붙어 다섯번, 나 혼자 고치기는 10번 정도 했다.

주인공인 태일은 어딜 봐도 차태현이란 배우를 염두에 두었다는 생각이 든다.

→ 해준다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나 혼자 차태현을 놓고 썼다. 5월부터 쓰기 시작했고 캐스팅 완료된 건 지난해 10월이니까. 차태현은 타고난 재능이 많은 배우다. 관객을 위한 서비스 정신이 충만하고. 나는 그런 배우가 좋다. 웃기면서도 울리는 캐릭터 ‘니마이 미만 쌈마이 이상’(2류 미만 3류 이상)의 캐릭터는 전형적인 주인공 캐릭터가 아니지만 늘 내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왔다. 그 캐릭터는 내가 특허청에 특허를 내야 된다. (웃음) 그런 면에서 차태현은 ‘니마이 미만 쌈마이 이상’을 가장 잘 소화해내는 배우다.

<피아노>의 억관이 대표적인 경우지만 대부분 오종록 드라마에서의 사랑의 방식은 우매할 정도로 절대적인 부분이 있다. <첫사랑…>에서 차태현이 손예진에게 보여주는 사랑도 그렇고. 이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믿는 것인가.

→ 사실 <피아노>에는 부제가 있었다. 바로 ‘아사다 지로식 판타지’다. 나는 90년대 하루키가 주었던 충격과 유사한 충격을 아사다 지로에게서 받았다. <피아노>의 조재현은 아사다 지로식 판타지에 가장 근접하는 인물이다. 신분차가 많이 나는 한 여자를 1년간 사랑했고 여자가 죽은 뒤 그 2년간의 사랑으로 평생을 살 수 있는 남자. <첫사랑…> 역시 그 판타지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속도위반한 남자와 여자, 그러나 딸을 낳고 부인이 죽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죽은 부인의 기억을 가지고 평생을 살아간다. 그의 심리적 대용물이 일매, 즉 딸이다. 차태현이 일매를 사랑하는 것과 영달이 부인을 사랑하는 것은 똑같은 복제의 개념이다. 나는 30대엔 <결혼> <사랑은 없다> <재즈>처럼 거의 동반자살 게임 같은 드라마를 썼었다. 그런데 40살 넘어가면서 늙어서 그런지 자식 키우면서 조금 변한 부분이 있는 거다. 내가 믿고 있는 사랑의 방식은 그런 것 같다. 짧게 다가왔지만 길고 오래가는 사랑. 사실 남녀간의 사랑뿐 아니라 모든 사람관계가 그런 편이다. 조명도 카메라도 오디오도 모두 10년 이상 같이 일해왔다. 그중엔 술먹고 나랑 다찌마리한 놈들도 많은데 결국 지금까지 왔다. 배우도 마찬가지다. 조재현도 그렇고 차태현도 벌써 3번째 같이 일한다.

그동안 오종록 감독의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흥미롭게 보았던 것이 세트였다. 다다미방이라든지 창의 모양, 특이한 가옥구조 등 기존 드라마에서는 본 적 없는 다른 공간을 브라운관으로 옮겨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다소 왜식이라는 느낌도 들었고. <첫사랑…>에서도 그런 식의 세트가 등장하나.

→ 사실 세트에 대한 논문을 하나 써놓았을 정도로 세트미술에 관심이 많다. 세트에 대한 개념이 바뀐 건 아마 <내 마음을 뺏어봐>부터였을 거다. 나는 물론 시골 사람이지만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아이들에 대한 드라마를 만들고 있고 그들에게 이 도시는 다른 개념일 거라는 생각을 한 거다. 도시적인 것이 비정함, 허망함, 반자연적이라는 개념은 시골 출신 도시거주자들이 붙여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분류한 대로 도시에서 자라나 도시에서 살고 있는 ‘3세대 도시인’은 콘크리트벽과 아스팔트에 추억과 향수있는 놈들이란 거다. 가령 국민주택에 사는 소년이 옆집 소녀를 좋아했는데 코너를 돌다가 부딪쳐 여자아이 코에서 코피가 났다고 치자. 소년이 엉겁결에 손으로 코피를 닦아주고 그 피를 콘크리트벽에 닦았을 때, 그에게 콘크리트벽은 내가 보는 건조한 콘크리트벽이 아닌 거다. 가끔 나를 일본 문화의 신봉자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건 아니다. 그저 현대적인 공간과 옛날 공간이 한 화면에 들어오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옛 공간 중에 왜식건물이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고. 이번 영화에서는 영도 청학동에 70년대 지어진 바다가 보이는 슬라브집을 찾았다.글 백은하 lucie@hani.co.kr·사진 조석환 sky0105@lyco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