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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작 <첼로> 준비중인 감독 방은진
문석 2003-04-17

어떤 이야기로 관객 꼬실까, 그 생각 뿐이다

“아, 방은진 감독님 뵈러 오셨어요?” 이스트필름의 한 직원이 취재진을 맞이하며 건넨 말이 낯설게 느껴진다. ‘배우’라는 단어와 떨어질 수 없을 것 같던 그녀의 이름이 ‘감독’이라는 직함과 만나면서 발생한 화학작용 탓이리라. 그렇다. 방은진은 감독이다. 아니, 감독 준비생이라고 할까. 현재 방은진은 <첼로>(가제)라는 멜로영화를 준비 중이며 아는 사람들에게는 ‘다크호스’로 꼽히는 인물이다. 직접 시나리오를 쓰면서 장편영화 연출을 준비한 지도 3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감독 방은진’이란 호칭이 뜨악하게 느껴지는 것은 배우로서의 그녀 이미지가 강하다는 이유뿐 아니라 한국에선 배우가 연출을 한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한국영화의 태동기를 제외하면 배우 출신 감독은 최은희, 하명중 등 극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할리우드에선 찰리 채플린,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버트 레드퍼드, 케빈 코스트너, 숀 펜, 그리고 조디 포스터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배우 출신 감독이 있지만, 배우를 지적 능력과 연관시키지 않는 풍토가 확고한 한국에선 배우의 감독 도전은 일개 해프닝으로 치부될 위험마저 있다. 게다가 여자배우라니. 이 당찬 예비감독을 이창동 감독이 앉았다는 전망 시원한 창가 자리에서 만났다.

제목이 <첼로>라고 들었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니다. 나는 다른 생각을 했는데 명계남 대표가 일단 그렇게 하라고 하달하셔서….

어떤 내용인가.

간단히 말하자면 새아버지와 딸의 사랑 이야기다. 시나리오상에서 아내는 30대 후반이고 남자는 30대 초반, 딸은 열일곱, 열여덟 정도다.

파격적인 영화로 들린다.

아니다. 시나리오는 굉장히 서정적으로 풀었다. 흔히 의붓아버지와 딸, 이러면 굉장히 육체적 코드로 생각하는데 나는 다른 것을 생각했다. 사랑이란 게 ‘이건 사랑해도 되고, 이건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잖나. 어느 날 너무너무 예기치 못한 사랑이 찾아오고 그 예기치 못한 사랑을 찾는, 아니 쟁취해야 한다고 해야 하나, 그런 얘기를 그리고 싶었다.

그래도 소재의 무게 때문에 주위에서 우려는 했을 것 같다.

뭐 그런 시각도 있긴 했다. 하지만 남편과 처제의 사랑을 그린 TV드라마 <눈사람>에 출연했던 명계남 대표가 “야, 이 코드 먹힌다. 걱정하지 말고 가보자”고 얘기했다.

어떤 톤의 영화로 만들 것인가.

굉장히 쿨한 느낌이다. 관객은 도덕적이나 윤리적으로 ‘저럴 수가 있어?’ 하면서 볼 거고, 영화 속에 배신과 고통, 충격이 있긴 하지만 많은 부분을 건너뛰고 보여주려 한다. 되도록 쿨하게. 예를 들어 엄마가 남편과 딸의 사랑을 알았을 때 딸이 말한다. “나도 사랑한다”고. 그러면 엄마는 “그럼 나 물러나나? 기다려. 나 이혼할 때까지”라고 한다. 남편한테도 “내 딸이 나보다 널 더 사랑한대. 그럼 어쩌니”, 뭐 이런 식이다. “너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내 딸 건드렸어?”, 이런 식의 반응이 아니라서 어쩌면 남자는 더 돌아버릴지도 모른다.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이유가 있다면.

살다보면 정말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 정말 겪지 말아야 할 감정, 나를 비껴갔으면 하는 상황, 뭐 이런 것들이 닥치지 않나. 이혼이나 결손가정의 자녀, 재혼 같은 것에 대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지금 이혼율도 올라가는데 그런 자녀들이 많다는 것 아닌가. 사랑의 결핍 속에서 자라난 인물들은 비끄러질 가능성이 더 많은 것 같다. 부모와의 관계가 이렇게저렇게 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새아버지도 그냥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다는 거다. 그리고 나는 사랑을 대단히 안 믿는다. (웃음) 어, 사랑이 3개월? 맞지. 결혼이 해피엔드? 절대 아니지, 이런 식이다. 아, 그리고 우리 엄마가 지지난해에 결혼했다. 58살 때. 내가 결혼식장에서 엄마를 데리고 들어갔고 부케도 받았다. 내 영화도 딸이 엄마의 부케를 받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결국 사람들이 만났는데 왜 헤어지는가. 뭐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서부터 시작한 것 같다.

이야기는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떨림> 시나리오를 엎었을 즈음, 친구가 무지무지 희극적으로 이혼을 했다. 증인미비, 서류미비, 뭐 이래서 세번인가 네번인가 법정에 갔야 했다. 그래서 <이혼이야기>라는 것을 구상했다. 92년 <결혼이야기>, 2002년 <이혼이야기> 이렇게. 약간 블랙코미디쪽으로 가보자고 했다. 그런데 이창동 감독이 계속 반대하더라. 그게 TV드라마에선 소재가 될지 모르지만 그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보러 극장에까지 오겠나며. 그래서 또 다른 이야기를 구상해야 했다. 이혼문제를 바탕에 놓고 별별 관계를 다 생각해봤다. 그때쯤 김인식 감독이 아이디어를 줬다. 김인식 감독과는 <로드무비> 때 내가 서린의 연기지도를 해주면서 친해졌다. 그 보답으로 김 감독이 언젠가 내 시나리오를 써주겠다고 했는데, 어느 날 그러더라. 새아빠와 딸의 사랑 얘기 해보는 게 어때, 이렇게. 그게 발단이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있다면.

<첼로>라는 가제에서 드러나지만 아이는 첼로를 연주하고, 남편은 시립오케스트라의 지휘자다. 음악으로 많은 부분을, 그러니까 정서나 감정을 처리하게 된다.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

캐스팅이 문제일 것 같다.

그렇다. 고민이다. 30대 후반에서 40대인 여배우나 10대 후반의 여자 연기자를 찾기가 어렵다. 대부분 방송에서 활동 중인데 영화의 호흡은 다르니. 아무튼 내가 보장할 수 있는 부분은 있다. 내가 배우 아닌가. 한국 영화계에선 진짜 여배우가 할 역할이 없다. 상업영화는 더하다. 사실 내가 영화의 만듦새, 이런 것은 몰라도 30대 후반에서 40대, 그리고 열일곱, 열아홉살, 이 두 여배우에게는 정말 빛나는 역할을 주고 싶다. 꼭 내 얘기를 하는 건 아니지만 아무리 연기 뛰어나다고 해도(웃음) 역할을 못 받으면(웃음) 무슨 소용이 있나. 그런 상황에 대한 분노가 있는 거다.

직접 주연을 맡는 것은 생각해본 적 없나.

사실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내가 영화를 만들어본 사람도 아닌데 그 양쪽을 다 하다보면 죽도 밥도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를 만들게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 내가 쓰고 연출하고 출연하는 영화를 만들어 보고 싶다.

감독이 되겠다는 생각을 한 게 꽤 오래됐다고 들었다.

생각해보면 1998년이었던 것 같다.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공연하려던 게 엎어졌고, 시나리오 들어오는 것도 내겐 안 다가오는 내용이라 도저히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여러 가지 사정이 얽혔다. 영화라는 분야를 떠나지야 않겠지만, 연기를 할 수는 없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면 카메라 뒤로 가보자, 내가 어떻게 보이나, 그런 생각을 했다. 김기덕 감독의 <파란 대문>에서 연출부를 하려고 하다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무산됐다. 김진한 감독의 단편영화 <장롱>에서 연출부를 하게 된 것은 그 이후다. 직접 단편영화도 찍으려고 이스트만 코닥 영화지원 프로그램에도 지원하기도 했고 기획시대 유인택 대표로부터 <이재수의 난> 찍고 난 필름 1만2800자를 받기도 했다. 그러다가 드라마 나오게 되고 해서 현실화는 못했지만.

장편영화는 어떻게 시작하게 됐나.

2000년 3월인가 4월에 명계남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갑자기 만날 일이 있다고 하더라. 명계남 선배나 나나 연극을 오래 하면서 이런저런 경로로 알아왔던 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단히 가까운 건 아니었다. 그래서 뭔가 하는데, 마르시아스 심의 <떨림> 소설책을 주면서 “이게 좀 세거든. 성애소설인데…”, 이러더라. 그래서 벗는 연기인가보다 하는데 “당신이 감독하지 그래”라고 했다.

김해곤 작가가 <떨림> 초고가 무척 뛰어났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읽어보면 알겠지만 원작은 한 남자의 다양한 성애를 에피소드로 담은 거다. 거기에서 이야기를 만들고 하다보니 주인공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야 했다. 그러다보니 좀 지적인 느낌이 됐고. 시나리오를 고칠 때마다 더 어려워지고, 이른바 예술영화쪽으로 나갔다. 회사에서 서서히 압력을 줬는데, 그런 뜻이었던 것 같다. 첫 영화치곤 너무 어렵지 않나, 그 어려운 얘기 갖고 다 소화를 못 시키면 치기어린 영화가 될지도 모른다는. 끝까지 붙들고 작업했지만 결국 과감히 콱 엎었다.

명계남 대표는 밖에 나가서 <첼로>가 돈 벌 영화라고 말한다는데.

나도 그렇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떨림>을 억지로 만들려고 했으면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저예산 작가주의 예술영화풍으로. 그런데 이창동 감독이 상업영화선에 있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러더라. 자신이 첫 작품에서 그랬듯이. 어디 가서 상을 받고 이런 게 의미없다는 거다. 관객이 봐줘야 가슴 아파하든 재밌어하든지 할 것 아니냐는 얘기였다. 또 그러더라. “지적 허영심을 버려라. 의미 찾고 그러지 마라. 그런 건 평론가가 다 찾아준다. 어떤 이야기로 1시간30분 동안 관객이 빠져들게 할까, 그걸 한다고 생각해라 제발.” 그게 귀에 못이 박혀서 요 정도까지 온 것 같다.

배우로서 감독을 하려니까 생경할 것 같다. 장단점이 있다면.

장단점이라면, 아직 시작하지 않아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의 작업만으로도 굉장히 다르다. 일상이 달라지고, 태도도 달라진다. 감독이 되면서 자유롭고 홀가분한 것도 있다. 꾸미지 않은 내 자신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이랄까. 사람들이 그런 질문을 많이 한다. 그럼 이제 감독으로 전업한 거냐고. 그건 아니다. 연기는 여전히 하고 싶고, 배우로서 평생을 살고 싶다. 감독도 계속 하면서.

지금도 이창동 감독, 아니 문화부 장관이 조언을 해주나.

장관 임명 전에는 세세하게 많이 봐주셨다. 대사까지 읽어가면서. 이창동 감독이 어떤 부분을 읽는데 어찌나 닭살인지, 그래서 그 부분 바로 잘랐다. 장관이 된 뒤에는 일산 집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앞으로는 민원신청을 하거나 일산 집 앞에서 기다려서 만나야지. (웃음)

시나리오를 모니터해주는 사람들이 또 있나.

이창동 감독 외엔 김인식, 김진한 감독에게 보여주고 의견을 구하는 편이다. 각자 다른 측면이 있어서 도움이 된다. 명필름 심재명 대표에게 부탁한 적도 했다.

여성영화인모임 창립 멤버이자 올해 여성영화제의 사회를 맡기도 했다. 김소연 프로듀서는 여성영화제 출신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면 여성주의 영화일 것 같기도 하다.

꼭 그렇진 않다. 그렇다고 여성주의에 반하지야 않겠지만 나는 여성들의 삶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바로 그 점만 봐도 이 영화가 관객지향적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웃음) 여성이 주체적 인물로 등장하는 것일 뿐이며 대중문화예술 속에서 여성을 주체로 놓는 작품이 드물다. 엄마와 딸을 주체로 놓은 것도 그런 생각이 있는 거다. 사실, 여성감독이라고 해서 꼭 여자를 잘 그리는 것도 아니다. 임순례 감독이 멋진 게 여성이면서도 남자들의 이야기를 잘 그리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성 관객, 특히 아줌마 관객을 끌어들이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아줌마들이 조금 늦게 움직이지 않냐. 지금 아줌마들은 문화주체로서의 의식이 굉장히 커져 있긴 하지만, 개봉날부터 극장에 몰려오고 그런 정도는 아니다. 그들이 움직이려면 적어도 개봉하고 2주는 지나야 한다. 그게 걱정이다. 나중에 내가 극장 꼭대기에 올라가서 간판 못 내리도록 붙들고 있기라도 할까. (웃음)

이번 영화를 앞두고 참고한 텍스트가 있나.

=루이 말의 <데미지>를 다시 봤다. 어둡고 불쌍한 이야기이긴 한데, 관계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맛을 익히기 위해서였다.

평소엔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가. 내 인생의 영화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도 있나.

내 얘기를 듣고 칙칙하구나, 할까봐 꺼림칙한데, 솔직히 말하자면 예술영화쪽에 꽂히는 편이다. 대개의 영화광들이 좋아하는 영화를 나도 좋아한다. 특히 ‘스키’로 끝나는 감독들의 영화가 좋다. (웃음) 테오 앙겔로풀로스의 <안개 속의 풍경>은 내 인생의 영화라 할 만하다. 그래도 <매트릭스> 속편을 기다리고 있고, 재패니메이션 세계에도 빠져 있다.

최근 들어 연기는 좀 뜸했던 것 같다.

지난해엔 <비디오를 보는 남자>(미개봉)에만 출연했다. 처음엔 김학순 감독이 시나리오를 읽어달라고 부탁하더라. 그러다가 출연하게 됐다. 아무래도 연출을 준비하다 보니까 여유가 없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역할도 안 들어오고 해서 그랬던 것 같다.

연출을 준비하면서 본업인 연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나.

99년 <떨림>을 시작했던 해에는 그랬다. 연기를 너무 하고 싶었다. 조금 지나니까 시나리오도 잘 안 들어오던데. (웃음)

독립영화쪽과도 상당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EBS에서 <단편영화극장>을 진행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됐고 여기저기 많이 불려다녔다. 청소년영화제 심사위원도 했고 단편영화제의 사회를 보기도 했다. 장호준 감독의 <돌아갈 귀(歸)>나 헬렌 리의 <Subrosa>에도 출연했고, 박진오 감독의 <피스>란 작품에서는 스틸을 찍어주기도 했다. 학생 작품에선 출연 제의가 많이 들어온다.

주류영화계와 독립영화계, TV드라마와 사회운동 등 다른 배우들과는 달리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을 하는 것 같다.

그건 내가 좀 용감하고, 좀 정의파이며, 좀 의리 따지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다른 여배우처럼 “내가 어떻게 그런 데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부산영화제는 4번이나 사회를 봤다. 독립영화제, 여성영화제, 퀴어영화제까지 다양한 행사에서 사회를 보기도 했다. 왜 그렇게 많이들 찾는다고 생각하나.

그거야 내가 잘해서라기보다는 개런티가 싸기 때문이 아닐까. (웃음) 부산영화제도 지난해에야 처음 개런티를 받았다. (웃음) 연극행사에서도 단골로 사회를 보기도 한다. 거기엔 그런 생각도 있는 것 같다. 내가 그런 행사나 모임에 평소엔 잘 참여할 수 없으니까 그쪽에서 필요로 하는 때 잘해야지, 하는.

3월21일엔 한국 정부의 이라크전 파병 반대를 위한 1인시위에 나서기도 했다.

그동안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등 내가 얼굴마담으로 뭔가 해야 할 일이 있으면 조금씩 해왔다. 굉장히 활발하게 활동해온 건 아니고. 참여연대의 요청으로 참여했는데,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요청을 받아왔다. 절실하게 느끼는 문제고 해서 하기로 했다. 사실 그때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강원도에 있다가 서울에 와서 1인시위를 하고 다시 내려와야 했다.

배우로는 드물게 그런 사회적인 문제에 앞장선다.

그날 참여연대쪽에도 그랬다. 나는 뭐 그렇게 대중적인 사람이 아니라 도움이 될지 몰라도 앞으로도 일이 있으면 꾸준히 연락을 달라고. 배우한다고 해서 내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게 아니잖나. 사회문제에 참여할 만한 나이나 시간도 됐고.

명계남 대표나 이창동 대표와는 다른 입장을 취한 것이잖나. 결국 노무현 정부의 정책을 반대한 것이니.

결정을 해놓고 보니 부담이 되더라. 처음 제의를 받았을 때는 나 개인으로 생각하다가 막상 시위현장에 가보니 기자회견 분위기가 돼 당황했다. 돌아오면서 명 대표에게 전화를 했다. 나 오늘 1인시위 했는데, 괜찮아요? 이렇게. 명 대표가 그러더라. 당신하고 나하고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으니 잘했다, 고 말이다.글 문석 ssoony@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