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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저예산영화 <미소>의 감독과 배우가 말하는 `미소의 고행길`

불행은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모두 혼자니까.

<미소>가 만들어낸 ‘작은 신화’에 처음으로 박수를 보낸 건 제5회 서울여성영화제다. 개막작으로 공개된 <미소>는 요즘 상업영화가 쓰는 제작비의 20%도 안 되는 규모로 만들어진 초저예산영화다. 여러 차례 엎어질 뻔했던 위기를 겪었음에도 스크린 안에서 그런 흔적들을 찾기란 힘들다. 16㎜나 디지털카메라가 아닌 35㎜로 촬영한 화면에는 수많은 로케이션 장소에서 완성도 있게 찍은 컷들, 심지어 근사하게 뽑아낸 항공촬영까지 등장해 그 예산으로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장면들을 쏟아낸다. 엄청난 고집이 있었다. 오로지 이 작품을 위해 프로듀서의 고행길을 자처한 임순례 감독, 시나리오와 캐릭터가 좋다는 이유로 무보수라는 상황까지 수긍한 배우 추상미, 단 한 가지도 타협하지 않았다는 박경희 감독, 편집기사와 연출부로 헌신한 여성 스탭들, 연기라는 모험을 기꺼이 택해준 송일곤 감독 등.

험악하게 데뷔전을 치른 박경희 감독이 임순례 감독을 만난 건 90년대 초 파리에서다. 잉마르 베리만 회고전이 열리던 퐁피두센터에서, 작가영화들을 상영하던 극장에서 두 사람은 자꾸 마주쳤고, 조금씩 친해졌다. 박 감독은 “서로 말이 없어서 친해진 것 같다”고 했다. 영화를 보고 이렇다저렇다 섣불리 비평하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믿음을 쌓았다. <미소>에도 많은 말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진작가 소정이 시야가 계속 좁아져 언제 실명될지 알 수 없는 희귀병에 걸린 뒤, 스스로 자신을 추스르기 위한 긴 여정에 들어간다. 잔잔하고도 격렬하게 요동치는 소정의 여행길에 무엇이 있었기에 그 많은 사람들이 애타게 매달린 걸까. 박경희 감독과 배우 추상미를 ‘따로 또 같이’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일부러 예쁘지 않게 찍은 것 같다.

추상미__감독이 소정은 절대로 예쁘면 안된다고 했다. 꾸미지 않았는데도 촬영장에서는 그래도 예쁘다고 야단이었는데(웃음), 나중에 보니 감독에게 속았구나 싶더라. 살도 쪄 보이고. 그런데 보기 좋더라. 외모에서 완전히 해방되기가 쉽지 않은데, 내가 어떻게 보일까 하는 고민에서 벗어났었으니까. 근데 정말 근질근질했다. 너무 꾸미고다니고 싶어서. 촬영 끝나자마자 머리 스타일 바꾸고 한동안 치마만 입고 다녔다.

연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추상미__대사로 설명하는 게 아니니까 어려울 수밖에. 감독이 중후반으로 갈수록 커지는 심리적 고통을 1차원적으로 드러내는 걸 원치 않았다. 감독은 일상성을 강조했다. 맘으로는 요동칠지 몰라도 겉으로 막 풀어헤쳐놓는 여자가 아니라며. 이건 나와 너무 다른 인물이다. 내가 소정 같은 경우를 당하면 울고 불고 하면서 애인 같은 측근의 사람들에게 털어놓고 의지하고 그럴 텐데. 소정은 그런 것 없이 가니까 그게 어려웠다.

소정이란 인물을 놓고 감독과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게 마치 성격치료 같았다고.

추상미__그동안의 내 삶에 대해 전반적인 것을 모두 얘기했으니까. 좀 들떠 있고 산만한 내가 소정이 되기 위해서는 많이 침잠해져야 했다. 촬영에 들어가기까지 4∼5개월 동안 대인관계를 단절하고 집에 혼자 있거나 홀로 사진 찍으러 다녔다. 그런 과정 속에서 마음이 굉장히 섬세해지고 주변의 사물이나 사안에 대해 민감해지더라. 마음이 깨끗해지고 단순해지면서 아주 사소한 것까지 보게 됐다. 어, 왜 지금까지 이런 걸 몰랐지 싶더라.

그 덕분에 당시 갖고 있던 고민이나 문제를 해결한 게 있나.

추상미__촬영기간까지 합친다면, 연예인으로서 갖고 있던 쓸데없는 욕심이나 허영심 같은 걸 많이 버리게 됐다. 내 또래 여배우들에 비해 덜하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론 그렇지 않더라. 그동안 영화하면서 몸에 익은 배우에 대한 대우나 시스템을 버리게 됐는데, 처음엔 그게 뭔가 불안하고 적응하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아주 환경이 좋은 상업영화를 하게 돼 막 챙겨주는 시스템에 들어가면 부담스러울 것 같다.

일하면서 감독과 얼마나 친해지는 편인가.

추상미__사람에 따라 다를 텐데, 멀어진 감독이 없진 않다. 홍상수 감독은 많이 친해진 경우고, 아무래도 여성감독이 처음이라 그런지 가장 친해졌다. 무덤까지 가져가야할 사적인 이야기를 너무 많이 나눴다. 집을 오가며 함께 잔 적도 많은데 요즘 좀 소홀했던 것 같다.

세명의 감독과 동시에 작업한 셈인데.

추상미__촬영장에서 감독님 하고 부르면 세명이 동시에 돌아보곤 했다. 처음에는 박경희 감독이 아니라 임순례 감독만 돌아봤다. 송일곤 감독과 연기하는 게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결과적으로 아주 좋았다. 송 감독이 연기에 대한 욕심도 고민도 많았고 작품에 대한 의견도 많았다. 배우는 대부분 개인주의 성향이 있고 또 그래야 하는데 작품 전체에 대해 고민하는 걸 배웠다고 할까. 임순례 감독은 현장에서 감독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프로듀서의 선을 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의 포지션을 자연스레 인정하게 됐다.

인터뷰는 월북 문인 이태준이 살던 집을 보존해 단아한 찻집으로 꾸민 곳에서 이뤄졌다. 박경희 감독이 마당 한켠에서 봄의 따사로움과 한적함을 즐기는 사이 추상미와 먼저 대화를 나눴고, 이어서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서울여성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한 것과 관련해 남인영 수석프로그래머가 “그동안 한국영화에서 고통받는 여성은 많았으나 고통을 생각하는 여성은 없었다”며 <미소>를 평가한 대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박경희__한국영화를 많이 안 봐서 잘 모르겠다. <미소>는 여성의 인권이나 페미니즘을 주장하지 않는다. 여자주인공을 통해 인간 보편의 문제를 말하는 것, 여성을 통해 삶을 이야기하는 것을 중요하게 본 것 같다. 특히 임순례 감독과 추상미씨의 순수한 의지와 신뢰가 없었다면 만들어질 수 없는 영화였다는 점을 평가해준 게 아닐까 싶다.

추상미__영화제 개막작 경험은 처음인데, 영화제 이야기가 나올 때 기분이 아주 좋았다. 지금까지 여성영화제에서 많은 영화를 봤는데 작품들이 좋았기 때문에. 극단적 페미니즘이 없던 건 아니지만 다큐멘터리도 참신한 게 많았다. 우리나라 옛날 영화를 많이 본 편인데 남인영 프로그래머의 말은 맞는 것 같다. 처음 <미소>의 시나리오를 봤을 때 캐릭터에 대해 후련함을 느꼈다. 여성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본다든지, 여성이 고통을 다루는 방법이랄지 하는 건 그동안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보도자료에 “한국영화가 많이 부상했다고는 하나 영화산업 안에서 신인감독에게 강요되는 자본의 논리는 여전히 너무나 기세등등하다”고 써 있는데, 우여곡절을 겪은 당사자들로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박경희__한국 영화계가 많이 좋아진 것 같으나 자본의 논리는 너무 가혹하다. <미소>는 그 가혹의 최첨단에 섰던 게 아닌가 싶다. 시나리오를 보여주면 늘 그 다음날 당장 해보자는 전화가 왔다. 그만큼 시나리오에 대해 좋은 평가를 해주면서도 막상 제작하길 꺼렸다. 시나리오를 좋게 봤으면 프로로서의 계산이 서야 하는데 그걸 못하더라. 내가 너무 변방에 있기 때문이란 생각도 했다. 여성이고, 인맥도 없고, 판단의 근거가 될 전작도 없고…. 제작자들이 아주 약간씩 시나리오의 수정을 요구했는데 철저히 비타협적으로 나갔다. 외부의 요구로 바뀐 게 단 한 가지도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과연 그게 잘한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필요했던 과정이고 경험이었던 것 같다.

추상미__영화는 산업이니까 사실 결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장사가 되거나 작품으로 인정받거나 둘 중 하나는 돼야 하지 않나. 그런데 답답한 건 비상업적 작품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너무 없다는 거다. 시나리오를 보는 안목도 좀 그렇고.

<미소>를 보면 누군가의 불행에 동참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가족도, 운명적으로 만났다고 믿는 애인조차도.

추상미__나라면 가족이나 애인과 나누려고 시도는 할 거다. 안정감 같은 걸 얻으려고. 그렇지만 나중에는 소정처럼 전적으로 자기 문제라는 걸 깨닫게 될 것 같다. 그렇다고 소정이 완전히 현명했다고 보지는 않는다. 어떤 영화에서 “난 삶을 이해할 수 없어”라고 했던 대사가 생각나는데, 소정은 그걸 깨달은 거 같다. 그게 무의미하진 않겠지.

박경희__인간은 누구나 다 혼자라는 생각을 갖고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철저하게 혼자다.

박경희 감독은 두번쯤 격앙했다. <미소>가 상업영화의 시스템에서 받은 대우를 기억할 때, <미소>가 개인적인 영화로 느껴졌다고 기자가 말했을 때. 잠시 어색한 시간이 흐르기도 했지만, 덕분에 박 감독은 자신의 철학을 지면에 다 담아낼 수 없을 만큼 자세히 쏟아냈다. 그러고 난 뒤 박 감독은 관객이 영화를 만나기 전에 너무 많은 말을 한 게 아닐까 하고 곤혹스러워했다. 박 감독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치열한 주관을 갖고 있었다.

할머니의 입관식, 증조부의 무덤, 1500년 전의 고분 등 세개의 무덤이 나온다. 왜 이리 많은 무덤을 등장시켰나.

소정이 인상깊게 바라보는 경주 봉황대까지 치면 무덤이 네개다. 아마도 죽음에 관심이 많았나보다. (웃음) 삶이 고통스러울 때, 죽음이 뭔진 모르지만 죽음으로 그 고통에서 풀려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죽음을 정리하는 게 아니라 삶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게 되는 게 아닐까.

소정이 방 안을 오가며 노래를 부르다가 갑자기 문과 벽에 머리를 부닥치면서 불안한 내면을 드러내는 식의 디테일 묘사가 뛰어나다. 자신의 경험들을 활용한 건가.

소정이란 인물을 설정해놓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생각해본 것뿐이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결국 사람은 다 비슷한 게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이런 성격이라면 이렇게 나오지 않을까 하는. 물론 본 것, 겪은 것, 들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긴 했을 거다.

묘사가 굉장히 사실적이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개인적인 영화가 아닐까.

블록을 쌓듯 그 다음이 연상되는 장르영화와 달리 인류 보편에 관심을 보였을 뿐인데 개인적이라는 표현은 기껍게 들리지 않는다. 한 사람의 시선을 주욱 따라가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 역시 동의하기 어렵다. 나뭇잎이 수없이 많이 달려 있지만 그 근원을 따라가면 하나의 뿌리로 이어지듯 한 사람을 아주 깊게 들어가서 보편과 맞닿는 방식을 취한 것이다. 다른 걸 섞지 않고 자기 고민을 풀어갔기 때문에 개인적이라고 표현할지 몰라도 자기 관심사를 가장 깊이있게 진솔하게 말하는 게 작가 아닌가. 지금 전쟁이라는 굉장히 고통스러운 현실이 있는데 난 왜 인간은 이렇게 살 수밖에 없나를 혼자 고민하는 스타일이다. 파병 결정에 분노하면서 정치적으로 대응을 하는 게 아니라 그런 결정을 내린 인간에 대해 생각하는 쪽이다.

반가사유상의 미소에서 제목을 따오고, 소정이 과학을 전공하는 애인에게 “입자의 실체도 밝히지 못하는 과학자” 운운하자 “공즉시색”이란 말로 받는 등 불교적 색채가 짙은데.

인간이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소정에 대해 공즉시색이란 말로 대꾸하는 건 소정의 공허한 집착을 가리키는 것이다. 소정은 원인도 진행과정도 알 수 없는 병으로 갑작스럽게 고통받게 됐다. 그런데 다른 동물보다 인간이 고통에 대해 더 고통스러워하는 건 인간이 고통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관념적으로 공허한 욕망이나 집착은 돈이나 권력에 대한 물질적 집착과 결국은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근거없는 초월이나 포기에서 미소가 떠오르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 등 사건의 본질을 직시했을 때 떠오를 수 있는 미소라는 뜻에서 반가사유상의 미소를 차용했다. 인간의 한계를 정확히 직시하면 그 안에서 행복해지지 않을까.

관객의 위치랄까 위상에 대한 고민이 있을 것 같다.

영화가 이러저러해야 관객이 좋아할 거라고 투자자들이 상정하는 게 현실적으로 드러난 관객의 위치다. 그게 현실의 큰힘이 됐는데 다른 힘도 생겨나야 한다. 인스턴트가 아닌, 향신료를 가미하지 않은 맛도 음미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영화가 감독의 자의식으로 가득 차거나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식으로 만들어지는 건 좋아하지 않는다.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취향의 문제다. 의식과잉이 아니면서도 관객과 만나는 접점이 뭘까를 고민하며 영화를 만들었다. 많은 말을 했는데 그건 영화 밑을 이루는 기저일 뿐이다. 영화는 논문이 아니다. 영화는 정서적 감응으로 뭔가를 전달하는 매체이고 그렇게 만들고 싶다. 글 이성욱 lewook@hani.co.kr·사진 정진환 jungjh@hani.co.kr